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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뻔뻔함

소년만화의 클라이막스에서 흔하디 흔한 전개가 있다. 주인공 소년이 악당의 음모를 알아내고 어떻게 그런 짓을... 용서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면 악당은 너같은 애송이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이며 바른 길이다 그러니 조용히 희생당해라 주절주절 거리며 주인공을 곤경으로 밀어넣고 주인공은 절체절명의 순간 우리가 가진 힘을 얕보지 말아라! 혹은 너는 인간이 나약하다 했지만 그것이 인간이 가진 가능성이다! 주절주절 말하며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여기서 성공하는 수도 있지만 (드래곤볼 정도랄까) 작가가 스토리에 좀 더 신경을 좀 쓴 경우 그 일격은 실패. 악당의 음모는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결국 주인공이 설파한 인간/우리의 힘이 어쩌구저쩌구에 의해 어찌저찌 수포로 돌아간다는 이야기 전개. 뭐 좀 더 암울한 계열로 나가자면 에반게리온 같은 경우에는 이런 전개방식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이 시대만큼 뻔뻔한 음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비죽비죽 돋아나고
거기에 체념하거나 심지어 동의하는 사람만 한가득 눈에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사람들은 확실히 낯설거나 전례없는 일,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에 약하다. 한 사람의 성인이 할 수 있는 경험엔 한계가 있는 만큼 세상에 가득한 원형적 이야기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면 좀 더 자연스러울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곤 한다. 슬플 때 왜 술을 마셔야 하는지, 답답할 때 왜 담배를 피워야 하는지, 이별한 후에는 왜 전화통을 붙잡고 울어야 하는지, 사귄지 며칠만에 손을 잡고 며칠만에 어깨에 손을 올려야 좋을지, 100일에는 무슨 이벤트를 하고 프로포즈에는 어떤 선물들을 준비하는 게 좋을지, 기타등등. 선과 악을 판별하고 분노해야 할 일과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을 판별하는 데에도 결국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전형적인 내러티브를 따라 진행되었던 일들, 혹은 이야기들인 법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시대를 횡행하는 굉장히 많은 "나쁜" 일들은 그런 이야기 흐름을 참 노골적으로 비켜나가고 있다. 이를테면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갖은 고생이나 목숨을 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단번에 눈앞에 드러나는 거짓말과 그 시커먼 속내라던지. 이런 식의 뻔뻔함이 워낙 전례없이 낯선 것이다 보니,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지도 잘 잡히지 않는 게 아닐까나. 우리는 분명 악한 일들은 물밑작업을 통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착착 진행된다고 배우고 듣고 알아왔다. 그래서 음모론이란 것도 있는 게고. 그런데

음모론까지 기어들어 갈 것도 없이 투명한 음모들이 워낙 설치니 이건 뭐,
유치하다고 해야 할지 촌스럽다고 해야 할지
감탄스럽게도 어른스럽다고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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