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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들/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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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집 남자가 매일 저녁 담배를 피운다. 아랫집 남자가 매일 저녁 같은 시간에 담배를 피운다. 벌써 두 달 째다. 저녁 여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면 베란다의 열어둔 창문 틈으로 어김없이 담배냄새가 엉금엉금 기어오른다. 휴일이건, 평일이건, 비가오건, 우박이 쏟아지건,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담배를 태워대는 정성이 어찌나 갸륵한지,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나서서 동네 사람들을 감탄시켰다는 칸트의 일화를 떠올리기도 했다.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정상적인 사회적 사정과 자유의지를 가진 성인이 두 달 이상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행위를 반복하리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식후땡이 제아무리 흡연자의 금과옥조라 하더라도 그렇다. 우선, 매일 밤 같은 시간에 꼭 집에서 저녁을 챙겨먹는 게 어디 ..
Juliet and Paris 영지로 돌아가기 전 날 밤이었다. 아버님은 나를 안채로 조용히 부르셨다. “베로나에 가거든 너와 혼인을 맺기로 한 처자가 있을 게다. 캐퓰릿가의 줄리엣이라고 한다. 어른들끼리는 다 이야기가 된 참이니 가서 인사도 하고 혼인 날짜도 정했으면 좋겠구나. 요사이 봄날 볕도 좋으니 되도록 빨리 했으면 어떨까 싶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혼인이요?” “그래, 혼인.” “아버님. 저는 아직 결혼에는 생각이 없습니다. 어떻게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나이가 찼는데 소식이 없으니 알아본 게 아니냐. 어차피 나중엔 나한테 감사하게 될게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제가 결혼할 사람은 제가 직접 정하겠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 그랬지.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세상에는 자기가 ..
Inside of Dream I.꿈을 꾸었다. 네가 죽는 꿈이었다. 인도양 상공을 이만 오천 피트에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 네가 타고 있었다. 어둠이 깔린 하늘과 검고 고요한 바닷물의 경계에서 모종의 신호처럼 반짝이는 규칙적인 불빛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마치 사방이 스크린과 침묵으로 가득한 우주적인 영화관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발밑에는 구름이 깔리고 고개 위로는 달이 빛났다. 이상 난기류나 포악한 기상현상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한밤의 비행은 누군가에게는 그저 아름다울 고요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불안함을 내포한 침묵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레 거대한 풍경에 내팽개쳐진 내 마음은 그 중간쯤에 서 있었다. 내 마음은 스스로 만들어 낸 꿈속에서도 아무 것도 예측하지 못했다. 나는 그 무력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풍경은 내 ..
Hotel California 사막은 넓고 더웠다. 남자는 눈앞에 안개처럼 뿌옇게 번진 모래바람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며 오른손으로 눈썹 위에 고인 땀방울을 훔쳐냈다. 오래도록 기어 스틱을 붙들고 있던 오른손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끈적한 느낌이 한결 가셔도 작은 먼지들이 두드러기처럼 들러붙은 얼굴이 화끈거려서, 지독한 열기는 쉽게 달래지지 않았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당신 말을 들을 걸 그랬어. 아내는 사막횡단 고속도로를 타기 전에는 반드시 자동차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괜한 노파심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총연장 만 오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사막횡단 고속도로에는 상, 하행선을 통틀어 휴게소가 네 개 뿐이고, 잠시 몸을 쉴 수 있는 곳이라고 해 봐야 세 시간에 한 번 꼴로 나타나는 무인 주유소가 고작이었으니까. 그나..
Ghosts of you 이 편지는 행운의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지구를 한 바퀴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그래요, 당신이 무슨 생각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끝까지 읽어보세요.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니까요? 당신은 아마 이전에도 비슷한 편지를 받은 적이 있을 겁니다. 무시하고 뭉개버린 지 4일이 아니라 4년, 혹은 40년이 지났는데도 특별한 불운 같은 건 찾아올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는 분도 계시겠죠. 혹은 그 편지의 내용을 믿고 4일 안에 7명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행운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확실히..
Farewell, my love 늦게 일어난 탓에 기분이 나빴다. 그래, 그게 문제였던 거다. 기분이 나빴던 탓에 모든 일이 이따위로 이상하게 풀린 거다. 그러니까 사람은 일찍 일어나고 봐야 한다. 자연스럽게 눈이 떠질 때 침대를 툭툭 털고 일어섰더니, 태양은 이미 중천에 떠 있고,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하거나 혹은 잡스러운 웬갖 것들이 나만 홀라당 빼놓고 바쁜 하루를 시작해 버렸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먼저 집을 비운 아내가 아침 여덟 시에 보낸 문자나 점심시간에 찍혀 있는 부재중 통화 기록 같은 것에 진심으로 반응하고 대처하기가 싫어지는 법이니까. 대체로 그런 연락의 목적이란 건 밥은 밥통에 있고 반찬은 냉장고에 있으며 국은 가스레인지 위에 놓여 있으니까 부디 알아서 처먹도록 하세요. 정도로 뻔한 내용인 법이잖아? 한동안 나 볼..
Eclipse 남자는 집에 돌아와 가방을 열어보고 나서야 어젯밤 어머니가 챙겨주었던 팔백육십육만오천삼백이십일원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표 네장에, 현금은 칠십칠만원이었다. 주머니에서 어머니가 적어준 메모를 뒤늦게 찾아내고, 거기 꼼꼼하게 적힌 수표 및 현금 액수, 계좌번호와 은행 이름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사태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간신히 파악할 수 있었다. 썅년같으니. 부르튼 입술을 부르르 떨며 욕설을 내뱉었지만 사실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남자가 집을 방문한 것은 꼭 석달만이었다. 어머니는 나뭇잎에 물이 오를 때 집을 나가 낙엽이 떨어질 때에야 돌아와서는 대뜸 따뜻한 저녁밥을 요구하는 아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태도로 심부름을 맡겼다. 이번 달 곗돈을 무통장 입금시켜 달라는 간단..
Dreaming - 증인은 선서하세요. - 네. …양심에 따라 숨기거나 보태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말하며, 만일 거짓말을 하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증인, 이현경. - 원고측은 심문 시작 하세요. - 알겠습니다. 간단한 사실관계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증인, 증인은 2006년 3월 17일 펴낸 논문에서 최면을 통해서 사람에게 본인이 원하는 꿈을 꾸게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주장한 바가 있지요? - 최면만으로 불가능합니다. 최면치료와 함께 몇 가지 약물처방 및 심리 상담을 병행해서 원하는 때에 원하는 꿈을 꾸게끔 유도하는 방식에 관한 논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임상실험 결과를 함께 수록했으니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당시 실험 성공률도 90% 내외로 측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 논문의 요점은 사람들이 원하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