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집에 돌아와 가방을 열어보고 나서야 어젯밤 어머니가 챙겨주었던 팔백육십육만오천삼백이십일원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표 네장에, 현금은 칠십칠만원이었다. 주머니에서 어머니가 적어준 메모를 뒤늦게 찾아내고, 거기 꼼꼼하게 적힌 수표 및 현금 액수, 계좌번호와 은행 이름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사태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간신히 파악할 수 있었다. 썅년같으니. 부르튼 입술을 부르르 떨며 욕설을 내뱉었지만 사실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남자가 집을 방문한 것은 꼭 석달만이었다. 어머니는 나뭇잎에 물이 오를 때 집을 나가 낙엽이 떨어질 때에야 돌아와서는 대뜸 따뜻한 저녁밥을 요구하는 아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태도로 심부름을 맡겼다. 이번 달 곗돈을 무통장 입금시켜 달라는 간단한 부탁이었다. 남자는 나름 두툼한 현금과 수표뭉치를 받아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엄마는 내가 이 돈 갖고 날라버리면 어쩔 낀데? 아들이 자신의 말투를 흉내 내며 던진 농담에 어머니는 웃지도 않고, 아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심한 태도로 과도를 놀려 사과를 깎으며 대답했다. 죽여버릴끼다. 사과즙이 묻어 형광등 아래 찐뜩하게 빛나던 칼날과, 언젠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EBS 따위에서 봤던 소금평원의 갈라진 등짝처럼 짜게 굳어버린 어머니의 표정을 보며, 남자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집을 찾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때의 아버지도 지금의 남자처럼 한 계절을 꼬박 샌 뒤에야 웬 여자와 함께 집을 찾아온 참이었다. 여자는 하얀 물결무늬가 들어간 빨간 블라우스에 검정색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굽이 7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하이힐에서 내려와 문간에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던 여자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입가와 눈꼬리만 살짝 찢어 각시탈처럼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는데, 어머니는 여자의 나이를 짐작케 하는 그 설익은 웃음을 보자 아무 말도 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사과 한 알과 커피 석 잔을 내오곤 아버지와 그 여자 앞에 자리를 잡은 채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중학생이었던 남자는 아버지와 여자가 앉은 소파 옆자리에 어정쩡하게 걸터앉은 채로 세 남녀의 기묘한 만남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의 십분이 지나도록 어머니는 사과만 깎고 있었다. 하얀 꽃이 흐늘하게 늘어진 쟁반 위에 사과껍질이 끊어져 툭툭 떨어질 때마다 벽시계 분침이 소리 없이 한 눈금을 기었다. 고작 사과 세 개를 깎는 어머니의 손짓이 너무나 경건하고 거룩했기 때문에, 그것은 일종의 침묵시위라기보다는, 진작에 준비했던 이별을 맞이하는 어머니 나름의 의식에 가깝게 보였다. 한참동안 어머니를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세 개째 되는 사과를 집자 결국 참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 저기…
- 암 소리 말고 찌그러져 있거레이. 잡소리 지껄였다간 죽여버릴끼니깐.
그래서 아버지는, 정말 아무 말도, 심지어 어머니가 아닌 아들에게조차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사과 세 개를 삼키고는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새장가는 가야 하는데, 죽기는 싫었겠지. 남자는 그 날을 회상하며 홀로 되뇌곤 했다. 남자가 생각하기에 화룡점정은 어머니의 끝마무리에 있었다. 어머니는 사라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에 대고 거인의 목소리로 호령했던 것이다. 어디가나! 간만에 왔는데 저녁은 안 먹을끼가?
남자는 어머니의 쿨한 이별방식을 존경했고 자신에게도 불가피하게 이별이 닥치게 된다면 꼭 저런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지키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하필이면 오늘 낮에 현금 팔백육십육만원이 든 가방과 함께 그런 상황을 마주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침 일곱 시에 별안간 전화를 걸어 곤히 잠든 남자를 깨우고는 지금 시외버스에 탔다고 선언한 그녀는, 오전 열시 반이 되자 다시 전화를 걸어 터미널에 도착했으니 마중을 나오라고 말했다. 남자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씻지도 않은 채로 추리링 차림에 돈이 든 가방만 걸쳐 메고 집을 나서 택시를 잡았다. 갑자기 연락도 끊어버리고 집으로 내려가 버려야만 했던 핑계거리론 마땅히 써먹을 게 없어서, 그는 그저 최대한 대범하고 담담하게 대답할 생각이었다. 남자한텐 가끔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한 거야. 내가 널 사랑하는 마음은 변한 게 아니니까 조금만 이해하고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다. 오빠 믿지? 월세 낼 돈이 없어서 친구 집에 얹혀살다가 친구가 룸메이트를 구하는 바람에 떨려났다는 이야기는 목에 과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꺼낼 생각이 없었다. 그런 말은 남자가 할 말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가 낯선 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점이다.
여자는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고, 남자는 그러자고 했으며, 여자는 카페로 들어가 길거리가 잘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고, 남자는 엉거주춤 그 옆자리에 앉으려다가 여자와 같이 나타난 낯선 남자가 먼저 그 자리에 앉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앞자리에 앉았으며, 여자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남자는 같은 걸 달라고 했으며, 여자는 오랫동안 침묵했고, 남자는 오랫동안 숨죽였다. 무심히 사과를 깎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그 침묵이 필연적인 막바지를 향해 무르익을 때였다. 어머니의 얼굴과, 사과를 깎던 손놀림과, 눅눅하게 젖어가던 과도 모두가 검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칼끝에서 예리하게 빛나던 섬광만 검은 실루엣 끝에서 이글이글 빛났다. 그는 가방을 열어 사과 대신 지갑을 꺼냈다. 과도 대신 계산서를 집어든 그는 계산할 액수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 계산은 내가 할게.
여자는 당황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는 침을 삼켰다. 허튼 소리 했다간 주… 그러니까 그,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몰라. 최대한 큰 걸음으로 계산대로 걸어가 계산을 마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큰길가로 나와 택시를 잡아 탄 후에야 자신이 팔백육십육만원이 들어 있는 가방을 카페에 두고, 달랑 지갑만 들고 카페를 뛰쳐나왔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허겁지겁 택시를 돌려 카페로 돌아가면서도, 아니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 카페 문을 열기 직전까지도 남자는 혹시라도 돈을 잃어버릴 거란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왜 '죽여버리겠다' 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 못했는지, 혹시라도 그녀가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너무 늦어버렸지만 이제라도 '죽여버리겠다' 고 말해줘야 하는 건지, 너무 늦은 고백을 준비하는 스무 살처럼 갈팡질팡하고 있었을 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카페 종업원은 맡아둔 물건을 찾아주듯 익숙한 태도로 남자에게 가방을 건넸다. 남자는 자꾸만 기분 나쁘게 미소 짓는 종업원이 꼭 뭔가 알고 있는 것만 같았지만, 차마 '죽여버리겠다' 고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기 때문에 계면쩍게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카페를 벗어났다. 은행을 먼저 들르는 게 순서였지만, 남자는 어째서인지 집으로 가고 싶었다. 반짝거리는 과도를 들고 쿨하게 이별과 분노를 합치시켜 죽음이란 단어로 소통할 줄 아는 어머니에게 돌아가서 그 삶의 비기를 전수받고 싶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어머니는 아직 퇴근 시간 전이라서 집에 없었다. 대신 남자를 맞이한 것은 자신의 것과 똑같이 생겼지만 다른 사람의 것임이 분명한 가방과, 자신이 방금 팔백육십육만오천이백삼십일원을 잃어버렸다는- 지극히 쿨한 사실 뿐이었다.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 실로 존재론적인 고민 끝에 남자는 여자를 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개썅년이 꼭두 아침부터 잡것을 몰고 이 촌구석까지 쳐들어오는 일만 없었어도, 남자 역시 멀쩡한 곗돈을 길바닥에 처박고 올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니까. 남자는 목이 쉬고 땀이 흐르도록 혼자 방방 뛰며 여자를 욕하다가, 결국 핸드폰을 들어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 변경에 따라 자동 연결 서비스로 연결됩니다. 본 서비스는 한 달간 제공되며, 이후에는… 여자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대충 짐작케 하는 안내가 이어진 뒤, 거의 영원과도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쩌지? 굳이 번호까지 바꿔버렸는데 내 전화를 받아 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참, 혹시라도 전화를 받으면 어쩌지? 죽여버리겠다는 말부터 해야 하나? 아니면 돈은 어쨌냐는 말부터 해야 하나? 설마 돈을 가지고 튄 건 아닐테고, 가방은 카페에 맡겨뒀을 테니까 행방은 모를텐데. 그럼 나는 도대체 왜 전화를 걸고 있는 거야? 둔탁한 고민들이 바다안개처럼 머릿속을 휘감았다. 이상한 순간이었다. 남자는 헤어진 연인들이 대체로 그런 순간들을 이겨내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많은 이들이 현금 팔백육십만원을 잃어버리는 사건과 이별을 동시에 겪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해해 달라고 해야 하는 걸까? 이해해 준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런데 이해해 준다면 뭘 이해해 줘야 하는 거지? 철컥,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 돈 내놔.
여자는 황당하다는 듯 대답했다. 뭐? 내 돈, 아니 우리 엄마 돈 팔백육십육만원, 내놓으라고 이 썅년아. 뭐라고? 팔백육십육만원! 우리 엄마 곗돈 팔백육십육만오천이백삼십일원! 너 땜에 잃어버렸어! 무슨 소리야. 커피 값 얘기하는 거야 지금? 아니, 그거 말고, 내 가방에 있던 우리 엄마 곗돈!
다행히 여자는 침착하게 사태를 정리할 줄 알았다. 남자를 달래가며 자초지종을 파악한 그녀는 남자 못지않게 상기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오빠 바보야? 그런 거면 당장 경찰에 신고를 해야지 왜 나한테 해! 빨리 카페에도 연락해 보고 바뀐 가방 안에 연락처 같은 건 없는지 확인해 보란 말을 남기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멍하니 끊긴 전화통을 바라보던 남자는 껍질 벗겨진 사과처럼 방 한구석에 내동댕이쳐진 가방을 발견하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연락처, 연락처라고?
사정없이 파헤쳐져 지퍼가 뜯어지도록 허연 속살을 벌리고 있는 가방 주변에는, 책 몇 권과, 엠피쓰리플레이어, 오르골처럼 보이는 작은 상자 하나, 그리고 낡은 가죽지갑 하나가 있었다. 아마 돈뭉치를 찾으려고 자신이 정신없이 꺼내 던진 물건들인 것 같았다. 남자는 허겁지겁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확인했다. 보통 주민등록증이 들어가기 마련인 지갑의 투명한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신용카드 두 개, 교통카드 하나, 만원자리 다섯 장과, 10달러 지폐 여섯 장, 그리고 몇 번 접힌 종이가 지폐를 넣는 칸에 함께 들어가 있었다. 남자는 종이를 꺼내 내용을 살펴보고서야 지갑의 주인을 알아낼 수 있었는데, 이런 썅, 그의 이름은 (어떻게 읽는 지도 알 수 없는) Sheridon Delorean M, 종이의 정체는 국제운전면허증이었다. 면허증에는 그의 사진도 함께 인쇄되어 있었다. 증명사진인 주제에 잇몸이 드러나도록 웃고 있는 백인의 허여멀건 한 얼굴이 대체 왜 그렇게 얄미워 보였는지, 남자는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려다가 어젯밤 번뜩이던 어머니의 과도를 떠올리고 나서야 간신히 참아냈다. 경찰에 신고할 차례였다.
경찰은 무덤덤했다. 기다리세요. 자신을 강순경이라고 밝힌 전화 상대방은 주말 저녁시간 독촉전화를 받은 중국음식점 주방장처럼 대답했다. 저, 언제까지 찾아주실 수 있는데요? 글쎄요. 외국인 신원조회는 시간이 좀 걸려서 확답은 드리기 어렵습니다. 가방에 여권은 없다고 하셨죠? 네. 제가 급해서 그러는데 어떻게 빨리 좀 안될까요? 글쎄요. 저희도 빨리 찾아드리면 좋죠. 그럼 언제쯤으로 알고 있으면 될까요? 글쎄요. 일단 접수는 됐으니까 기다려 보세요. 저, 있잖아요. 남자는 잔뜩 울먹이는 목젖을 삼손의 힘으로 찍어 누르며 말했다.
- 저 엄마한테 죽을지도 몰라요.
강순경은 헛기침을 섞어가며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 드릴 테니까 일단 기다리세요. 남자는 전화를 끊고 나서야 그 헛기침이 웃음을 참기 위한 요식행위가 아니었는지 의심했지만,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돈만 찾아준다면.
기다림은 십분 만에 초조함으로 가득 매워졌다.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는 오르골을 열어 보았다. 조그마한 세 개의 플라스틱 구체에 불이 들어오더니 서로를 빙글빙글 돌며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제목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퍽이나 재미없고 몽롱한 음악이었다. 노란 색 불이 들어온, 크기가 가장 큰 구체는 가운데에 정지해 있었고, 그의 삼분의 일쯤 되어 보이는 구체는 푸른빛을 내며 제일 외곽에서 노란 구체를 돌고 있었고, 크기가 가장 작은 구체는 갈색 빛을 내며 푸른 구체를 돌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태양, 지구, 달을 형상화한 물건 같았다. 남자는 나름대로 정교하게 재현된 우주의 신비를 한동안 멍한 기분으로 감상했다. 음악이 멈추자 세 구체는 노랑, 갈색, 파랑 순으로 일직선에 선 채로 정지했다. 일식이잖아. 남자는 중얼거리며 오르골을 닫았다.
돈을 찾아냈단 전화는 오래도록 걸려오지 않았다. 남자는 불안하고 또 불안해하다가 컴퓨터를 잡았다. 인터넷에 접속하니 한 달 뒤에 한반도 전역에서 개기일식을 관측할 수 있을 거란 기사가 떠 있었다. 남자는 달그림자에 삼켜져 버린 태양의 사진들과, 검은 원 가장자리에서 날카롭게 타오르는 하얀 색 불꽃들을 바라보며 과즙이 묻은 어머니의 과도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숨겨놓은 쿨한 삶의 비결이란 어쩌면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고.
어머니의 퇴근시간이 다 되어서야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이었다. 경찰은 가방 주인이 경찰에 수소문을 해 왔으니, 두 분이 직접 만나서 일을 해결하는 게 좋겠다며, 연락처를 알려두었다. 다행히 한국말을 잘 한다는 말도 잊어버리지 않고 덧붙였다. 남자는 메모해 놓은 번호로 지체 없이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퇴근하기 전까지는 모든 일을 원상 복귀시켜 놔야 했으니, 시간이 없었다. 통화 연결음이 두세 번쯤 흐르고, 수화기에선 듣기평가 테이프에서나 듣던 원어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Hello? 남자는 머릿속을 더듬어가며 할 말을 정리했다.
저… 혹시 쉐리던 돌로렌 씨 맞으신가요? What? 쉐... 리던 돌로렌 엠, 씨 맞으시냐구요. 아, 제카 Sheridon 입니타만, 무쓴 일이시죠?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오늘 아침에 카페에서 가방 잃어버린 적 없으세요? 카방? Oh, my... 탕쉰이 제 카방을 가지고 있나요? 아 네. 가방이 서로 바뀐 것 같은데, 쉐리던씨도...
제 팔백육십, 아니 우리 어머니 곗돈 팔백육십육만오천삼백이십일원을 무사히 간직하고 계시나요? 란 말을 미처 꺼내기 전에, 상대방은 다급한 목소리로 남자의 말을 끊었다.
- Orgel, Orgel은 잘 있나요?
네? 그 카방 안에 Orgel… 오르골같은 게 있써쓸텐데, 그게 찰 있냐구요. 아 예… 뭐 내용물은 다 무사한데요. Orgel도 있타는 커죠? 네. 오르골 맞죠? 오르골. 오르골 있어요. 그거 혹쒸 열어 퐜나요? 아까 전에… 심심해서 잠깐 열어보긴 했는데… 노래를 킅카지 들었어요? 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지할 때까지 듣긴 했어요. Oh, Jesus… 아니 그보다 쉐리던씨, 제 가방은… 잠칸만요. 치금 이 천화, 일반 천화에요? 제 핸드폰인데요. Cellphone? Yours? …네. 셀폰. 제 셀폰인데요. Damn it! 우리 통하 시작한 지 얼뫄나 됐죠? 글쎄요, 정확히는… 제 말 잘 들으쎄요. 머지않아 누군가 찾아카거나, 천화를 걸 텐데, 절때로 그 사람둘한테 오르골을 건네줘선 안뙈요. 무슨 뚯인지 알켔죠? …뭐라구요? Shit! 통하가 너무 낄었어요. 제가 다쉬 전하할 테니까 초큼만 기다려요. 네? 쉐리던씨? 여보세요?
쉐리던인지 Sheridon 인지, 어쨌든 상대방은 다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자는 자신이 뭔가 좋지 않은 일에 연관된 것 같다는 인상은 받았지만, 아무튼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곗돈 팔백육십육만오천이백삼십일원이 안전한지 알아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럴 때는 어떡해야 하는 거지? 다시 걸겠다는 전화는 도통 걸려 오질 않았고, 남자는 전화만 붙들고 집안을 순회하듯 서성이다가 다시 경찰에 전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막 통화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오르골을 가지고 있나?
상대방의 목소리는 꽤나 묵직한 저음이었는데, 발음으로 보아하니 한국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까 전화를 받았던 쉐리던 같지도 않았다. 퍽이나 기분 나쁜 존재감이 풍경화의 여백처럼 목소리의 여운을 매우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인상을 찌푸려 가며 대답했다. 누구시죠? 쉐리던 씨 대신 전화하신 거예요?
- 묻는 말에나 대답해. 오르골을 가지고 있나?
어쩐지 주눅 드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무슨 오르골을 말씀하시는 건지… 니가 가지고 있는 오르골 말이다. 쉐리던이랑 통화한 건 다 들었으니까 혹시라도 발뺌할 생각은 말아라. 다 듣다니, 그럼 지금 도청을 했다는 건가요?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고 했다. 남자는 용기를 냈다. 싫은데요. 아저씨나 자기가 누군지 밝혀 보시죠? 경고한다. 뒷일은 책임지지 않겠다.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아저씨나 뒷일 걱정하시는 게 좋을 걸요? 내 돈 내놔요, 내 돈!
남자는 악에 받혀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그게 ‘내 돈’ 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의외로 묵직한 저음의 상대방은 목소리 만큼이나 그 말을 무게 있게 듣는 것 같았다. 시간이 아주 잠깐 흐르고 나서, 상대방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 쉐리던에게 속은 건가?
네? 쉐리던이 얼마를 주기로 한 거지? 아… 예, 뭐, 주기로 한 건 아니지만… 말 해. 그러니까 도합 팔백육십육만오천이백삼십일원이에요. 일원짜리까지 들어간 건 이게 은행 이자가 붙은돈이라 그런 거거든요? 은행이라. 비밀계좌로 넣어주기로 한 건가? 비밀계좌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럼 현금으로? 네. 현금으로 줘야죠. 아니 참, 수표도 넉 장 있었어요. 현금은 총 칠십칠만원인데, 오만원짜리가…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그 돈, 우리가 주도록 하지. 오르골을 넘겨주겠나?
남자는 잠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으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쉐리던은 건네주지 말라고 그랬는데. 지금 어머니의 곗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쉐리던이었고, 쉐리던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가방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 원한다면 더 얹어 줄 수도 있다.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 남자는 다시 마주한 실로 존재론적인 고민 앞에서 한참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뭔가 멋지고 쿨하고 남자다운, 그러니까 어머니의 ‘죽여버리겠다’ 는 선언만큼이나 깨끗한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았지만, 생각나는 말들이라곤 온통 찌질한 향기를 물씬 풍기는 말들뿐이었다. 죄송한데, 그 돈이 제 꺼가 아니라, 엄마한테 물어봐야 되는데요… 라고 하기도, 누구신지도 모르는 분하고 그런 약속을 하기가 좀 어려워서… 라고 하기도, 경찰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잠시 뒤에 다시 전화해 주시면… 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 앞에서, 헐떡대는 남자를 구원해 준 건 결국 답답해진 것 같은 상대방이었다. 상대방은 예의 여운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잠시 뒤에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 돈은 달러로 준비할 테니까 미리 계산해 놔. 아, 그리고… 경찰한테 연락할 필요는 없다. 만일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뒷일은 알아서 수습하는 게 좋을 거다.
네. 라고 얌전하게 대답하고 나자 통화는 중단되었다. 남자는 뭘 어찌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혼자서 결정할 단계를 넘어갔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벽시계로 시선을 돌리니 어머니가 돌아올 시간은 대략 삼십 분 정도가 남은 것 같았다. 경찰에는 연락하면 안 된다고 했고, 가장 현명한 방법은 역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 보는 것이었지만, 어머니의 번뜩이던 과도와 어두운 표정을 떠올리고 나니 도무지 통화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에게 상담해 보자니, 돈이 든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그 가방을 잃어버린 이유란 게 여자 친구가 잡놈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고, 여자 친구랑 그 잡놈 앞에서 최대한 쿨하게 보이고 싶어서였다, 라는 사연을 주절대며 늘어놓아야 했다. 남자는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결국 도움을 청할 사람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는 피곤한 음색으로 전화를 받았다.
- 왜 또. 가방 못 찾았어?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봐. 가방을 가져간 사람이랑 연락이 되긴 했는데, 그게 외국 사람이야. 그런데 이 사람이 내 가방은 잘 가지고 있는지 말도 안 해주고, 대뜸 자기 가방에 들어있던 오르골은 잘 있는지부터 물어보는 거야. 오르골? 응, 오르골. 가방 안에 오르골이 하나 있었거든. 그런데 내가 이걸 열어서 연주하는 것까지 들어봤다고 하니까, 갑자기 오 마이 지저스가 어쩌구 그러더니 전화를 끊어버리더라. 그런데 쫌 있다가 다른 사람한테 전화가 와서, 오르골을 넘겨주면 우리 어머니 곗돈에 웃돈까지 얹어서 달러로 주겠다고 그랬거든. 그런데 쉐리던은 다른 사람한테 오르골을 넘겨주면 안 된다고 했고… 쉐리던이 누군데? 내 가방 가져간 사람. 가방 가져간 사람이 오르골은 딴 사람한테 주지 말라고 했어? 응. 그 오르골이 뭐 중요한 물건 인가봐. 경찰에도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해서 너한테 전화했어. 나 어떡하니? 그걸 지금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그럼 누구한테 물어봐?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대답했다.
- 오빠. 우리 헤어진 거야.
그걸 내가 모르겠니. 알지! 당연히 알지.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자세히 아는 사람이 나랑 너밖에 없단 말야. 아무리,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달리 물어 볼 사람이 없어. 옛 정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좀 도와주라. 지금 내가 너무… 너무 당황돼서 제대로 생각할 겨를이 없어. 돈은 찾아야 되는데, 이상한 일에 얽힌 것도 같고, 다신 안 그럴게. 다시 그럴 수나 있겠냐? 말마따나, 헤어졌는데? 한 번만 도와줘. 너 침착하잖아? 아까 전화했을 때에도 니가 침착하게 가르쳐 줘서 여기까지 잘 풀렸단 말야. 좀 도와줘!
그녀의 반응은 간단했다.
- 전화 끊어도 돼?
안 돼! 너 자꾸 이럴 거야? 우리가 어디 오다가다 만난 사이야? 그래도 벌써 일 년, 아니, 아직 일 년은 안됐던가? 아무튼 일 년이 다 되도록 애인이었잖아. 헤어지는 마당에, 그래도 이 정도 부탁쯤은 해 줄 수 있는 거 아냐? 좋아, 이해해 달란 말은 하지 않을게. 귀찮게 술 먹고 전화하거나 괜히 땡깡 부리는 일도 없을 거야. 너 그놈이랑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도록 충분히 기도하고 빌어줄 테니까, 한 번만 도와주라. 응?
다행히 여자는 침착하게 사태를 정리할 줄 알았다. 지금 여기서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린다면 남자가 한참동안은 더 귀찮게 굴 거라고 판단한 그녀는, 남자를 달래서 다시 한 번 자초지종을 파악한 후에 남자의 어머니만큼이나 짜게 식어버린 말투로 대답했다. 경찰에 신고해. 남자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경… 찰에는 얘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 어쩔 건데? 그냥 거기서 혼자 어버버 거리다가 가방도 못 찾고, 오르골인가 뭔가도 뺐길 거야? 어차피 오빠,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잖아. 경찰한테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해. 이런저런 일이 있고, 지금 신변에 위협도 가해지고 있으니까 빨리 와서 도와달라고. 그럼 도와줄까? 그런 일 하라고 경찰이 있는 거야. 이 정도면 됐지? 그래… 고마워. 그럼 전화 끊을게. 아냐, 잠깐만,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 너 혹시…
- 팔백육십육만오천삼백이십일원, 을 달러로 환전하면 얼마나 되는지 알아?
여자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지만, 남자가 다시한번 물어보자, 잠시 뒤에 칠천육백달러 정도 된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남자는 고맙다고 말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그는 여자가 시킨 대로, 바로 경찰에 연락해서 신변보호를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인터넷을 열어 환전표를 확인해 본 뒤에, 팔천달러를 요구하면 자신이 얼마나 이득을 보게 되는 건지, 사백 달러를 더 가져다준다면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실지, 그 기쁨이 한 계절 동안 깊게 번진 어머니 얼굴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을 만한 것인지, 아니, 그보다는 너무 많은 돈을 보탰다가는 어머니가 불필요한 의심을 하는 건 아닌지, 뭐 그런 일 따위를 곰곰이 고민했다. 그래서 그는 쉐리던에게 재차 전화가 걸려왔을 때, 그의 목소리만 확인한 뒤에 짤막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어버릴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말하자면 모종의 결론을 내렸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는 돌아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시계바늘이 그 나름대로의 마지노선을 넘는 순간, 남자는 당장이라도 초인종 소리가 울릴 것 같은 기분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문득 핸드폰 진동 소리가 초조함을 깨트렸다. 그는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생각은 끝났나. 경찰에 신고한 건 아니겠지.
팔천달러, 팔천달러 준비하세요. 그거면 충분한가? 충분하니까 걱정 말고 오시라구요. 엄마 퇴근하기 전에 와야 되니까 얼른 서둘러요. 여기 주소는… 위치는 이미 파악하고 있다. 쉐리던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지. 네, 네. 아무 말도 안하고 끊었으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오기나 하세요. 혹시라도 엄마보다 늦게 오시면, 아니다, 엄마 오자마자 바로 경찰서로 달려갈 거니까 그런 줄 알고 있으시구요! 왜 어머니가 오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지? 그거, 엄마 돈이란 말이에요! 제가 이러는 거 알았다간 저 엄마한테 죽어요! …알겠다. 서두르지.
남자는 다시 초조하게 현관 앞을 서성거렸다. 베란다로 나가서 혹시 낯선 차가 주차장에 들어오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가로운 평일 초저녁, 흐릿하게 번지는 석양빛에 동네는 먼 곳부터 녹아들고 있었다. 잔뜩 흐느적거리는 촌구석의 저녁은 낯선 풍경이라곤 그 누구에게도 흘리지 않기로 작정한 것만 같았다. 퇴근시간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승용차들이 느린 속도로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와 멈추고, 비슷비슷한 복장을 한 남자, 혹은 여자들이 차에서 내려 저마다 짐을 챙겨 제 갈길로 사라졌다. 남자는 베란다에 서서 손톱을 깨물며 그렇게 먼 곳과 가까운 곳에 주차되는 모든 차들을 초조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아파트 멀리 보이는 길에서 촛농처럼 떨어진 붉은 그림자 하나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오토바이이며 몸에 착 달라붙는 검정색 슈트를 입은 사람이 그 위에 타고 있다는 걸 확인했을 때, 남자는 어쩐지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오토바이가 남자의 아파트 입구에 와서 멈추는 걸 확인한 남자는 현관으로 달려와 슬리퍼를 신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남자는 결국 아파트 통로 중간 쯤에서 오토바이에 타고 있던 사람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는 짧은 단발머리의 동양인 여자였다.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여자는 남자를 지나쳤고, 남자는 그녀가 둘러 맨 가방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문득 투시력이라도 얻은 것처럼 그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현금 팔천 달러를 본 것만 같은 확신을 받았다. 남자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 잠깐만요. 오르골 찾아오신 거 아니에요?
여자는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봤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남자에게는 그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라 여자를 앞지른 남자는 거침없이 소리쳤다. 따라와요! 남자는 순식간에 집 안에까지 뛰어 들어가고는 바닥에 놓여 있던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여자는 현관 문간에 서서 숨을 몰아쉬며, 남자를,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가 들고 있는 오르골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찾으시는 게 이거 맞죠? 남자는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시키려고 했는데, 여자가 손을 내밀며 소리 질렀다. 열지 마! 남자는 손을 멈칫했고, 여자는 현관문을 닫더니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 어머니는?
아직 퇴근 전이에요. 오실 때 다 됐으니까 늦기 전에 빨리 돈부터 내놔요.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거 맞죠? 급하니까 얼른! 여자는 아직 주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방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남자의 채근이 한 번 더 이어지자 굳은 얼굴로 말했다.
- 먼저 한 가지만 묻겠다. 네가 ‘어머니’ 라고 부르는 존재는 도대체 누구냐?
남자의 얼굴이 당혹감에 젖어들었다. 어머니가 누구냐고요? 그래. 어머니가 어머니지 누구긴 누구에요. 이 집 주인이시고, 당신이 가져온 그 돈 주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에요. 한국 분은 아닌 것 같은데, ‘계’ 라고 알아요? 계? 계가 뭐지? 아니 그러니까…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돈부터 줘요. 우리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지 누구긴 누구에요. 별 이상한 소릴 다 듣겠네. 미안하지만… 여자는 왼손으로 어깨에 들쳐 맨 가방을 꽉 움켜쥐고는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설마. 남자가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여자는 이미 오른손에 든 권총으로 남자를 조준하고 있었다. 남자는 기겁하며 자리에 주저앉아 뒷걸음질 쳤다.
- 자세히 설명해 주기 전에는 거래할 수 없다.
미치겠네. 가 시작이었다. 남자의 머릿속에 품은 말이 가감 없이 입으로 쏟아져 나오려는 순간, 여자는 총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공이치기를 잡아 당겼다. 탄창이 회전하며 남자가 이제껏 들어온 어떤 소리보다 차가운 쇳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남자는 갑자기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머릿속에 표백제를 뿌린 것처럼, 온통 희뿌연 공간 안에 어머니의 곗돈을 왼손에 든 채로 자신에게 리볼버를 겨냥하고 있는 낯선 외국 여자의 잔상만이 어지럽게 하늘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했다. 장미십자단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냐? 글쎄요.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꽃은 안개꽃이구요, 교회는 부활절이랑 크리스마스에만 나가는 데요. 꽃 중에는 안개꽃이 제일 싸고, 부활절이랑 크리스마스에는 교회에서 먹을 걸 주거든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었다간 답례로 총알이 날아온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보였다. 정말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자, 이상하게도 눈물이 쏟아졌다. 남자는 혼자 중얼거렸다. 여자 앞에서 울어 본 적은 없는데. 그래도 외국 사람이니까 이런 일이 익숙할지도 몰라. 남자의 눈물 정도는 쿨하게 넘겨줄 줄 아는 여자를 만난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잘 진행되던 일이 이따위로 틀어진 이유가 고작 ‘계’ 라는 단어 때문이라는 점에 생각이 도달하면 다시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복잡한 감정들은 남자의 눈물샘을 하염없이 자극했다. 여자는 그런 남자가 안 돼 보였는지 다소 누그러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어머니’ 의 정체를 밝히는 게 혼자서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다른 사람과 상의해도 좋다. 다만 빨리 하는 게 좋을 거다.
상의, 상의라. 상의 좋지. 기껏 구해 놓은 조언에 따르지 않은 덕택에 이따위 일도 당하고 있는 거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자의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 사람이라곤 딱 한 사람밖에는 없었다. 남자는 고민했다. 다시 전화하면, 그런 나를 이해해 줄까. 이별한 바로 그 날에 전화를 세 통이나 거는 사람은 없잖아. 하지만 이별한 바로 그 날에 낯선 여자가 머리통에 총을 겨누는 일을 당한 사람도 없겠지. 특별한 일은 특별하게 이해해야 하는 거라고. 사람에게는 사람 나름의 일들이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단순히 옛 애인이 아니라 그냥 헤어지고도 잘 지내는 친구 사이로, 그냥 조금 독특한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 사이로 지낼 수도 있는 거야. 그런 건데… 그럴 수 있을까? 남자가 고민하는 사이 여자는 눈동자만 돌려서 방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어.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군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오르골을 책상 위에 두고, 핸드폰을 들고 나와서 통화를 시도했다. 통화연결음이 흐르는 내내 이마에서 끈적한 진땀이 배어나왔다. 여자는 참 착하게도, 다시 전화를 받아주었다.
- 왜 자꾸 이래.
미안해. 미안한데, 지금 한 가지만 더 도와줬으면 해서. 아까 내 말 뭘로 들었어? 나도 오빠랑 좋은 관계 유지하면 좋겠지만, 오늘은 아냐.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아까 내가 네 말대로 경찰에 전화를 하지 않고 돈을 더 주겠다고 한 사람을 불렀거든. 뭐라고? 니가 칠천육백달러라고 해서 내가 팔천달러 불렀단 말야. 아, 진짜… 그런데? 그런데 그 남자가 안 오고 웬 외국 여자가 왔어. 내가 오르골은 건네줄 테니까 돈부터 내놓으라고 했더니, 이 여자가 갑자기 우리 엄마가 누구냐고 물어보거든. 어머니가 누구냐고? 그래. ‘어머니’ 가 어떤 존재인지 이야기 해 주지 않으면 돈을 줄 수가 없대. 이제 어떡하지? 지금 그 여자랑 같이 있는 거야? 응. 지금 우리 집 현관에 서 있어. 신발도 안 벗었어. 뭐야. 그런 걸 왜 물어보는데? 나도 몰라. 그냥 궁금한가 보지. 내가 전화 받으면서 이 돈이 사실 내 돈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 곗돈이라고 얘기했거든. 그런데 이 사람이 외국 사람이라 ‘계’ 가 뭔지 몰라. 아니 그게 아니라,
- 왜 그런 걸 자꾸 나한테 물어보냐고.
아까 말했잖아. 너밖에 불어볼 사람이 없다고. 이 바보야, 그런 건 좀 혼자서 결정해! 아니면 어머니한테 물어보던가! 야, 너 자꾸 이럴 거야? 이 사람이 혼자 결정하기 어려우면 다른 사람이랑 상의해도 좋다고 했단 말야! 아, 진짜. 그냥 이름 말해주면 되잖아! 누구누구 여사님 되십니다. 아니, 구체적인 게 궁금하면 구체적인 걸 구체적으로 물어보라고 해! 그런 질문이 아니라니까! 우리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 그러니까, 나한테 어떤 존재인지, 뭐 그런 걸 물어보는 거라고. 미치겠네, 진짜. 오빠, 나랑 지금 장난하자는 거니? 나 지금 장난칠 기분 아냐. 니가 여기 와서 이 여자 표정을 봤어야 돼. 한끝이라도 실수했다가는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것 같이… 웃기고 자빠졌네. 멀쩡한 장정이 여자 하나 못 이겨서 죽냐? 왜, 그 여자가 총이라도 겨누고 있는 거야? 그래, 이 썅년아!
- 지금 총 겨누고 있단 말야, 총!
여자의 눈썹 끝이 살짝 꿈틀거린 것 같았다. 남자는 홧김에 소리 지르고 나서도 자신이 뭔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건 확실히 인지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영원 같은 순간이 총알 대신 심장을 관통했다. 남자의 귓가에 들린 것은 전화기 너머에 있는 그녀가 뭐라고 대꾸하는 소리와, 적막한 집 안을 삽시간에 뒤흔든 문고리 덜컥 거리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진 초인종 소리뿐이었다. 남자는 지옥의 문이 열리는 신호를 들은 기분으로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끊고, 어느 새 고개를 돌린 채 이를 악물고 있는 여자를 지나, 현관문으로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누구세요?
- 애미다. 문 열어.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들어왔다. 여자가 뭐라고 말릴 사이도 없었다. 당황한 그녀는 권총을 허리춤에 숨기고 현관 한쪽으로 바싹 붙은 채 들어오는 어머니를 가만히 노려보고만 있었다. 남자는 마른 침을 삼키며 두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그저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머니를 맞이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아무튼 저 여자는 권총을 들었고, 여기서 모든 걸 폭로했다가는 어머니나 자신이나 살아남는 것부터가 문제인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검정 타이즈를 입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문간에 서 있는 그녀를 흡사 투명인간 보듯이 지나쳐 버렸다. 남자는 현관 밖으로 한 걸음 비키며 말했다. 오…셨어요? 늦으셨네?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있기엔 다소 좁은 현관에 쭈그리고 앉아 신발을 벗게 되자, 그제야 인상을 찌푸리며 여자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다시 아들을 바라보며 짤막하게 물었다.
- 누기냐?
소… 손님, 손님. 전해 받을 물건이 있어서 잠깐 오시라고 했거든. 그, 금방 갈 거니까 엄마는 신경 안 쓰고 있어도 돼. 손님이라꼬? 여자친구 아니꼬? 아… 아냐! 그런 거. 엄마는 얼른 방에 들어가 있어. 내가 마중하면 되니까. 애이고, 손님이라꼬 오셨는데 암껏도 안 내놓고 집안 꼴은 이게 다 뭔데? 뭔 가방을 이래 다 싸질러 놨노? 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니깐! 됐다. 들어오시라 캐라. 저녁 묵을 시간 다 됐는데 따순 밥이라도 한 술 뜨셔야재. 내가 니 왔다고 해서 이래 장도 봐왔다 안카나. 글쎄, 그럴 거 없다니까! 야가 참말로… 손님대접 그리 푸되게 하면 괜히 동티난데이. 신발도 안 벗고 있는 거 봐라. 어려워 말고 어여
- 들어오이소.
이런저런 말들을 흘리며 부엌까지 들어가 전등불을 켠 어머니는 현관에 선 여자를 향해 사뿐히 손짓했다. 전등을 등지고 선 어머니의 얼굴엔 시커먼 그림자가 서렸고, 흔들리는 손등만 반짝거리고 있어서, 아들과 여자는 어머니의 표정은커녕 손끝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남자는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딱딱하게 굳은 여자의 얼굴은 어머니의 검은 얼굴에 고정된 채로, 보이지 않지만 혹시나 읽힐 지도 모르는 어떤 비밀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어머니의 손짓을 무시한 채 신발끈조차 풀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대범하게 뒤돌아서서 그림자 속에 완전히 모습을 가려버렸다. 여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 당신이 ‘어머니’ 입니까?
어머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모퉁이를 뚜벅뚜벅 돌아서며 한 마디를 대답처럼 흘렸을 뿐이다.
- 내가 야 어머니는 맞는데, 와 들어오지는 않고 그런 걸 물어보능교?
여자는 계속해서 물었다. 당신이 이곳 지부를 관리하는 사람입니까? 관리? 통장 아지매 찾아왔는가배. 옆 동 301호라예. 여자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그게 아니라… 당신이 ‘계’ 를 관장합니까? 계라꼬? 무신 계를 묻는지 모르겠네. 내가 혼자 살면서 이래저래 큰 돈 들어갈 일이 많아서 여기저기 계는 쫌 많이 하고 있는데. 와. 계 들라꼬? 여자는 굳은 표정으로 가방을 현관 앞에 내려놓더니, 신발을 벗어놓고 집안으로 들어가며 당당하게 말했다. 샹그릴라에서 왔습니다.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들 중에 샹그 뭐라고 하는 게 있긴 한지 머릿속을 검색하는 중일 것이다. 모든 게 오해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남자는 이 기묘한 상황을 대체 어찌해야 하는 건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신이 그 오르골을 노리다가 쉐리던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왜 그 오르골을 노리시는 겁니까? 어머니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여자는 이를 악물고는 부엌의 전등을 향해 한 걸음 걸어가면서 다시 말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수단을 사용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저는 전권을 위임받고 이 나라에 파견된 겁니다. 제 경고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짧은 침묵이 흐르고, 그제야 어머니는 부엌 전등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사과와 과도를 쟁반에 담은 채로. 빛을 받은 어머니의 얼굴이 조금 찌푸린 무표정으로 하얗게 드러나고, 쟁반 위에선 과도의 맑은 칼날이 형광등 빛을 받아 폭발할 듯이 빛나고 있었다.
- 무신 말잉교?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두 알 것만 같았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바보라도 뭔가 잘못된다는 걸 알아차려야 정상이니까. 여자는 어머니의 얼굴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잔뜩 힘이 빠진 발걸음으로 남자에게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오르골을 내 놔.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여자의 목소리에서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남자는 더듬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오르골을 들고 나와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힘 빠진 손으로 오르골을 받은 여자는 신발을 다시 신으면서, 턱 끝으로 현관에 내려놓은 가방을 가리켰다. 거실에 자리를 잡고 사과를 깎고 있던 어머니는,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 가능교?
여자는 대답하지 않은 채 현관문을 열었다. 와, 늦었는데 밥이라도 한 술… 어머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니, 어머니는 혼자 뭐라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가방을 열어 본 남자는 그 안에 백 달러짜리 뭉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확인했고, 차마 그걸 어머니 앞에서 확인할 용기가 없었던 탓에 가방을 들고 자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 밖에서 어머니가 소리 질렀다. 니 또 밥도 안 묵고 게임이나 쳐 할라고 그러재! 남자는 이를 악물고 가방에서 돈뭉치를 꺼내면서 마주 소리쳤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지폐는 팔십 장. 팔천달러가 분명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남자는 과연 일이 잘 풀리긴 한 건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문득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데 불났는갑다. 뭔 소리 들리지 않나?
남자는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것이 소방차 사이렌과는 미묘하게 다른 소리라는 걸 눈치 챘으며, 가능한 최고의 속도로 현관으로 튀어나와 문을 잠근 후에 베란다로 뛰어갔다. 검게 물들어가는 저녁을 짙은 색으로 밝히며, 경찰차 여섯 대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집 앞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 오빠. 괜찮은 거야? 다친 데는 없는 거지?
남자는 담배연기와 함께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네가 신고했다면서? 그럼, 그딴 소리만 하고 연락이 끊겼는데 내가 안심이 되니? 미안해. 오늘은 내가 하루 종일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 같아. 진짜, 웬일이니… 돈은 잘 찾은 거고? 응. 원래 가방으로 되찾았어. 쉐리… 하여튼 그 사람한테는 진짜 미안하다고 했더니, 다친 사람 없이 잘 풀렸으니까 괜찮다고 그러더라. 그런데 그 오르골은 뭐래? 비싼 거야? 나도 몰라. 물어봤더니 알 것 없다고 그러던데. 그래도 뭐 들은 말이라도 있을 거 아냐. 정 궁금하면 한 달 쯤 지나서 하늘을 유심히 보라고 그러더라. 내가 뭔 짓을 했는지 알게 될 거라고. 뭐야, 그게 전부야? 나도 궁금해서 인터넷 뒤져봤더니, 한 달 뒤에 우리나라 전역에 일식이 있을 거라고 그러더라? 나 혹시, 일식을 부르는 오르골이라던가, 뭐 그런 거라도 손에 넣었던 건가? 신기하기는 한데, 별로 돈 될 물건은 아니겠네. 그렇지? 쓸모도 없고. 경찰에서도 계속 수사할 거라니까, 뭔가 정보가 나오면 알려 주겠지. 그렇구나… 다행이다. 그런데 은경아, 우리…
- 오빠. 잊지 마. 우리 헤어진 거야.
여자는 앞질러 못박았다. 하긴, 그 정도 상황판단만으로 경찰을 부를 정도로 눈치가 빠른 사람인데, 이 정도 쯤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 그래서 남자는, 그렇구나. 알았어. 미안해. 다시 만날 순 있는 걸까? 라는 말 대신,
- 일식 시작되면… 같이 구경할래?
라고 말했다.
(201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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