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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들/소설

Eclipse

  남자는 집에 돌아와 가방을 열어보고 나서야 어젯밤 어머니가 챙겨주었던 팔백육십육만오천삼백이십일원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표 네장에, 현금은 칠십칠만원이었다. 주머니에서 어머니가 적어준 메모를 뒤늦게 찾아내고, 거기 꼼꼼하게 적힌 수표 및 현금 액수, 계좌번호와 은행 이름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사태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간신히 파악할 수 있었다. 썅년같으니. 부르튼 입술을 부르르 떨며 욕설을 내뱉었지만 사실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남자가 집을 방문한 것은 꼭 석달만이었다. 어머니는 나뭇잎에 물이 오를 때 집을 나가 낙엽이 떨어질 때에야 돌아와서는 대뜸 따뜻한 저녁밥을 요구하는 아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태도로 심부름을 맡겼다. 이번 달 곗돈을 무통장 입금시켜 달라는 간단한 부탁이었다. 남자는 나름 두툼한 현금과 수표뭉치를 받아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엄마는 내가 이 돈 갖고 날라버리면 어쩔 낀데? 아들이 자신의 말투를 흉내 내며 던진 농담에 어머니는 웃지도 않고, 아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심한 태도로 과도를 놀려 사과를 깎으며 대답했다. 죽여버릴끼다. 사과즙이 묻어 형광등 아래 찐뜩하게 빛나던 칼날과, 언젠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EBS 따위에서 봤던 소금평원의 갈라진 등짝처럼 짜게 굳어버린 어머니의 표정을 보며, 남자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집을 찾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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