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인은 선서하세요.
- 네. …양심에 따라 숨기거나 보태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말하며, 만일 거짓말을 하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증인, 이현경.
- 원고측은 심문 시작 하세요.
- 알겠습니다. 간단한 사실관계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증인, 증인은 2006년 3월 17일 펴낸 논문에서 최면을 통해서 사람에게 본인이 원하는 꿈을 꾸게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주장한 바가 있지요?
- 최면만으로 불가능합니다. 최면치료와 함께 몇 가지 약물처방 및 심리 상담을 병행해서 원하는 때에 원하는 꿈을 꾸게끔 유도하는 방식에 관한 논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임상실험 결과를 함께 수록했으니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당시 실험 성공률도 90% 내외로 측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 논문의 요점은 사람들이 원하는 꿈을 꾸게끔 유도하는 게 아니었다, 이 말씀이신가요?
- 네. 정확히 ‘그 기술’을 개발했다고 주장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 알겠습니다. 증인의 이론은 같은 해 7월 1일 발간된 논문을 통해서 반박당한 바 있습니다. 알고 계시죠?
- 알고 있습니다. 같은 연구실에서 일하던… 동료가 제 방식을 이용하여 블라인드 테스트를 거친 결과를 수록한 논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검사님, 그건…
- 바로 그 논문에 수록된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에 의하면 증인이 개발한 방식의 성공률, 즉 피 실험자들이 사전에 작성했던 내용과 같은 꿈을 꾼 비율은 3% 내외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후 연장된 실험기간동안 비슷한 구도의 꿈을 꾼 사람까지 모두 더하더라도 성공률은 20% 미만입니다. 증인, 증인은 이 실험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죠?
- 제 생각에 대해선 이미 알고 계신 대로입니다. 그건 블라인드 테스트가 아니었습니다.
- 네. 증인은 사전 답변을 통해 당시 행해진 블라인드 테스트는 실험실 동료의 악감정에 근거해서 조작된 실험이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악감정의 원인은 당시 연구비 책정과 관련된 학계 내 알력다툼이라고 말씀하셨구요. 그렇다면 피고는 당시 블라인드 테스트의 대상이었던 피 실험자의 상당수가 실험진에 의해 매수된 상태였다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 그렇습니다. 사실 원하는 꿈을 꾸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점은 객관적으로 입증하기가 매우 어려운 부분입니다. 피 실험자가 수면 상태에 들어간 동안 뇌파를 측정해서 반복 비교해 볼 수는 있습니다. 이미 그 정도 자료는 제 논문에도 수록되어 있구요. 그렇지만 꿈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잠에서 깨어난 뒤에 피 실험자가 거짓말을 한다면 그걸 밝혀낼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실험의 내용 자체가 매우 신기한 것인 만큼 차마 거짓말을 하지 못한 사람은 있겠죠. 반박논문에 기록 되어 있는 3% 내외의 성공률이 그걸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 입증할 방법이 있나요?
- …지금은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거라곤, 저는 제가 애초에 펴 낸 논문에 수록된 성공률, 그러니까 적어도 90% 내외의 성공률은 제 양심을 걸고 자신할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 좋습니다. 증인은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2008년 봄부터 사람들에게 ‘꿈을 파는’ 사업, 즉 원하는 꿈을 꾸게 해 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맞습니까?
- 아닙니다. 제 실험결과는 완전히 부정당한 상태였고, 따라서 저는 제 이름을 걸고 일정한 금액을 받으며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2008년 봄에 저를 찾아온 사람은 제 주변인들로부터 소문을 전해 듣고 자진해서 방문한 사람이었습니다. 수고비로 받은 돈도 처음부터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치료가 끝난 후에 자진해서 건네준 돈이었고, 저는 어디까지나 치료의 대가가 아닌 수고비의 명목으로…
- 증인이 당시 수수한 돈은 현금 2천만원입니다. 수고비 명목으로 받은 돈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많지 않나요?
- 말씀드렸다시피 당시 돈을 받은 건 제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올해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제 환자들에게 돈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 아드님이 인터넷과 정보지를 통해 본인을 홍보하고, 치료의 대가로 일정한 금액을 암묵적으로 정해 놓았다는 사실도 모르셨다는 거죠?
- 그렇습니다. 어미로써 할 말은 아니지만, 제 아들을 증인으로 세운다면 그 점에 대해선 확실한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아드님의 증언에 따르면 본인은 작년 여름에 이 사업에 대해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리고, 그 진행방향과 재실험 여부에 대해서도 충분한 상의를 거쳤다고 하는데요?
- …제 아들이요?
- 네.
-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로…
- 증인.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면 위증죄가 적용됩니다. 알고 계시죠?
- 하지만 저는 정말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제 아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증인의 주장에 따르면 피고는 자신이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지난 2년간 총 21명의 환자에게 원하는 꿈을 꾸게끔 하는 시술을 행하고, 수고비 명목으로 2억원 상당의 현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환자들 중 상당수는 심각한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피고, 피고는 자신의 시술이 유발할 부작용에 대해선 고려하신 적이 없습니까?
- 제 시술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저를 찾아온 환자의 대다수가 이미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원하는 꿈을 꾸는 대가로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에 이르는 돈을 선뜻 지불하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욕구불만으로 반쯤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꿈을 통해 욕구가 해소될 길을 열어주고, 약물 처방과 상담을 통해서 치료를 해 보고자 노력했습니다만… 당시 제 신분은 정식 치료기관에 소속된 의사도 아니었고, 저를 찾아온 사람들도 원하는 꿈을 꾸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있질 않았습니다. 그러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원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본인의 책임은 없다는 건가요?
- 책임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금 그 사람들이 보이는 정신질환의 원인 전부를 제 시술로 떠넘기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접근입니다.
- 알겠습니다. 판사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2009년 12월 22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서부 경찰서 면회실>
- 그럼 시작해 볼까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현경씨, 김기준씨를 처음 만난 건 언제입니까?
- 올해 5월이었어요. 날짜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 아드님이 제출한 접수명부에 따르면 당시 날짜는 2009년 5월 5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기준씨를 처음 만났던 상황이나, 당시 김기준씨의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저는 점심을 먹고 서재에서 책을 읽던 중이었는데, 아들이 문을 두드리더니 환자가 찾아왔다고 말했어요. 김기준씨는 제 아들을 뒤따라서 서재로 들어왔는데, 그 눈빛이… 아직까지 기억이 날 정도로 초췌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는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보였다고나 할까요. 저는 그 사람을 소파에 앉히고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처음엔 자기를 제 아들 친구의 친구라고 소개했어요. 꿈 때문에 꽤 오랫동안 괴로웠는데, 소문을 듣고 제 아들 연락처를 알아서 찾아왔다고 했죠. 자기를 치료해 주기만 한다면 사례는 얼마든지 하겠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만, 전 분명히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연을 털어놓았는데… 기준씨는 원하는 꿈을 꾸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자기가 원하지 않는 꿈을 꾸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심리 상담을 통해서 반복되는 악몽을 치료하는 방법이야 있으니까, 저는 부드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걸 원한다면 여기가 아니라 병원으로 찾아가야 한다고. 그런데 기준씨는 꽤나 완강하게 말했어요. 자기가 꾸는 건 그냥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고. 일반적인 수준의 치료로는 어림도 없다는 거였죠. 그 말하는 태도가 퍽이나 간절해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는 치료를 해 준 다음에 병원을 찾아가는 방법을 권하는 것이 좀 더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준씨는…
- 예지몽을 꾼다고 한 겁니까.
- 예. 그것도 자꾸 나쁜 쪽으로만. 꿈을 자주 꾸는 것도 아니고 많아야 한 달에 너댓번인데, 그때마다 사람이 많이 죽거나 큰 사고가 나는 꿈을 꾼다는 거에요. 그게 어김없이 들어맞는 건 물론이고. 같이 들고 온 스크랩 자료 같은 걸 펼쳐가면서 자기가 잠들 때마다 얼마나 무섭고 괴로운지 설명하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병원 치료를 권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겠지만 일단은 상당히 난감했습니다.
- 난감했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 음… 우선 예지몽 같은 건 과학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정말 신이 있어서 이 사람한테 그런 능력을 내려줬다면, 제가 그걸 임의로 빼앗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제가 상담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준 씨가 꿈을 꾸는 것과 사고가 발생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는 걸 밝혀주는 일 정돈데, 본인이 이렇게나 확신을 하고 십수년을 괴로워하며 살아온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지죠. 치료기구나 약물도 없는 제 집에서 치료를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더구나 이게 과거의 일도 아니고 현재 진행형인 경우에는 정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조금 무책임하지만 용한 무당을 찾아가라고 해 주는 수밖에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그 당시 기준 씨의 태도가 상당히 간절했거든요. 제가 치료를 거부했다가는 어디 가서 목을 매달거나, 제 목에 칼을 들이밀더라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어요. 그래서 일단은 반복되는 악몽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치료를 해 주기로 하고, 그 날 바로 첫 번째 최면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 바로 시술을 해 줘야 할 만큼 상태가 심각했던 모양이군요.
- 예. 우선은 퇴행요법으로 과거의 꿈들을 다시 불러온 다음 그것을 부정시킬 생각이었는데, 잘 진행이 되질 않았어요. 그 사람은 한 번 꿨던 꿈은 다시 꿀 수 없다고 했어요. 이미 진행이 된 예언이니까 부정할 수 없다는 거죠. 그 말하는 방식이 정말로… 이 사람의 꿈이란 것은 정말 이 사람의 심리상태와는 전혀 상관없는 외부에서 던져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어요. 기억되는 방식도, 다시 떠올리는 방식도, 마치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서 읽는 것처럼 아예 격리된 사실로 관리되고 있었다는 거죠. 그러니 절대로 단시간에 해결될 문제 같아 보이진 않았습니다. 기준씨 자신이 스스로 괴로움을 겪었던 나날 만큼이나 길고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어요. 저는 일단 기준씨를 돌려보내면서, 소견서 정도는 써 줄 수 있으니 되도록 병원에 찾아가서 전문적인 상담을 받는 편이 좋겠다고 충고했죠. 그 무렵에는 이미, 이전에 저를 찾아왔던 환자들 중에도 상당수가 엇비슷한 부작용을 호소하고 있었거든요. 시술을 해 줄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 시술을 해 줄 수도 있었다, 는 것은 이후에 기준씨에게 적용한 치료방식을 이미 당시에도 떠올렸다는 말씀이시군요.
- 네. 뭐, 평범한 사고방식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에요. 한 가지 꿈을 꾸지 않게 하려면, 아예 모든 꿈자리를 정해진 꿈으로 뒤덮어 버리면 되는 거죠. 다만 이런 경우라면 환자의 정신상태에 어마어마한 과부하가 걸리게 되는 게 불 보듯 뻔 한 일이거든요. 더구나 그 성공률이 100%에 수렴한다고 자신하지도 못해요. 그건 제 방식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구요.
- 그 방식에 대해서 여쭤 봐도 될까요?
- 음… 사람은 하룻밤에도 엄청나게 많은 꿈을 꿔요. 알고 계시죠? 그 중 특별히 강렬했던 몇 가지만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뿐이죠. 그 많은 꿈들이 전통적인 해석대로 꿈을 꾸는 사람의 무의식에서 발현한 것이라면, 어떤 사람이 정말 간절하게 바라는 특정한 장면도 그 무의식 속에 들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고 보시면 돼요. 그러니까, 저는 그 사람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장면을 꿈속으로 불러들이는 재주는 없어요. 다만, 매일 밤 머릿속을 스치긴 하지만 기억하지는 못했던 생각들을 골라낸 다음에, 암시를 강하게 줘서 그걸 ‘꿈으로서’ 기억하게 만드는 게 제 작업이죠.
- 꿈을 만든다기 보다는 골라낼 수 있게 하는 거군요.
- 거칠게 표현한다면 그래요. 그래서 최면에 들어가기 이전에 충분한 상담을 거치는 게 중요한 거죠. 이 사람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잠재되어 있고, 어떤 부분에 자극을 주면 그게 꿈으로 깨어날 수 있겠다, 이런 설계도를 그려야 하니까요. 기준씨한테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냥 많은 사람이 죽는 꿈, 큰 사고가 나는 꿈, 그런 걸 더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것뿐이고. 결국 몇 차례 더 상담을 거치고 나서, 결론을 내렸죠. 굉장히 일상적인 꿈들, 그러니까 밥을 해 먹는다던가 친구랑 잡담을 나눈다던가 하는 꿈들을 반복적으로 심어준다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강박에서는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음모론에 심취해 있는 사람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방법 같은 거랑 비슷해요. 뭐, 장미십자단의 숨겨진 암호표라고 믿고 있던 게 알고 보니 동네 구멍가게에서 나온 찢어진 전표랑 별다를 것도 없더라, 같은 얘기 있잖아요? 최대한 엇비슷하고 일상적인 꿈을 반복 제공해서 거기에서 현실과의 접점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걸 일깨워 주는 거죠.
- 그렇게 치료를 시작한 게 여름부터였구요.
- 조금이나마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었어요. 집 앞 식당에서 제육볶음이나 된장찌개를 사 먹는 꿈만 한 달 정도 심어준 것 같아요. 외부에서 그런 암시가 반복되어 들어오면 정신적으로 피로할 만도 한데, 기준씨는 용케도 점점 상태가 좋아지는 것 같더라구요. 6월 중순부터는 꿈과 현실이 분리되어 있고, 때로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서 꿈의 암시를 벗어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있었죠.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확신이 너무 커져 버렸다는 거에요.
- 무슨 의미죠?
- 제 암시를 무시하기 시작한 거에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환자 머릿속에 물감이 충분해야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기준씨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아예 그런 게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6월 중순부터 조금씩 시술의 성공률이 떨어지더니, 그달 말부터는 아예 암시해 준 꿈을 꾸지 못했어요. 기준씨는 다시 불안해했죠. 그렇다고 특별한 꿈을 꾸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비어버린 꿈자리에 언제 다시 어마어마한 악몽이 닥칠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저는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기준씨가 정말 바라는 게 있어야만 내 시술도 성공할 수 있다. 항상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 내가 꿈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재료들이 부족하니까 그런 걸 이야기 해 달라. 기준씨는 한참 고민하더니 자기가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꿈을 꾸게 하는 건 어떠냐고 말했죠. 전 정말 좋았어요. 헤어진 가족이나 잊을 수 없는 연인에 관한 꿈을 유도하는 건, 뭐 비교해 볼 전례도 풍부할뿐더러 실패할 확률도 극히 낮았거든요. 기준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결국엔 그게 문제였어요.
- 문제였다… 는 건 어떤 말씀이신지?
- 뭐…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계시잖아요? 여기서부턴 얘기가 좀 길어지겠군요… 잠깐만 쉬었다 해요, 우리.
- 알겠습니다. 커피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2010년 2월 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지방법원, 2차 공판 현장>
- 증인은 김기준씨가 예지몽을 꾼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습니까?
- 음… 그건 꽤 어려운 질문인데요. 지금 어떻게 생각하냐는 건가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 어떻게 생각했냐는 건가요?
- 둘 다 말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 네… 처음에야, 저도 검사님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랑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더구나 저는 꿈을 연구해 온 학자였고, 남들이 아무리 신령스럽고 기이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이라도 과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처음 제 앞에 선 김기준씨는 그저 악몽을 자주 꾸는 강박증 환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떠냐고 물어보신다면… 조금 자신이 없네요.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고.
- 좋습니다. 증인은 김기준씨를 오랫동안 상담 치료하신 바가 있지요?
- 네.
- 그렇다면 김기준씨가 자신의 오랜 고민, 즉 자신의 꿈에 대한 고민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치료를 요청했는지 들은 바가 있습니까?
- 본인이 그 과정에 대해선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적어도 부모님이나 친한 친구들한테는 이미 다 털어놓은 상태인 것 같더군요. 김기준씨 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부모님께서 무당을 몇 번 찾아갔던 적이 있고, 내림굿이나 씻음굿도 몇 번 받은 적이 있답니다. 헌데 그 와중에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되셨고,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더군요. 이외에도 자신의 꿈과 관련된 사건들이 몇 가지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불운이 뒤따른다고 믿은 탓인지 타인에게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을 상당히 꺼림칙해 했습니다.
- 하지만 저희 측 수사결과에 따르면 김기준씨의 부모님은 김기준씨가 어릴 때 이혼한 후 각자 미국 및 일본으로 이민을 떠나서 현재 무사히 살아 계시는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증인은 김기준씨를 치료할 당시에는 이런 이야기들을 전혀 몰랐습니까?
- 확인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몰랐습니다.
- 김기준씨가 증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걸 입증해 줄 자료가 있나요?
-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 알겠습니다. 방금 확인해 줄 사람이 없다고 하셨는데, 사건 기록에 따르면 기준씨에 대한 치료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작년 8월 무렵에, 기준씨의 친구라고 스스로를 밝힌 강준경씨가 증인을 찾아온 바 있습니다. 맞습니까?
- 맞습니다.
- 준경씨는 기준씨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습니까?
- 어렸을 적부터 친구라고 이야기했습니다만, 가족사나 살아온 이야기에 대해선 제가 알고 있는 것 이외의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준경씨는 기준씨가 꿈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게다가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절 찾아온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 이외의 다른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없었습니다.
- 준경씨도 속아왔다는 말씀이신데, 확인할 수 있습니까?
- …죽은 사람한테 어떻게 확인을 합니까?
- 증인. 흥분하지 마세요. 증인이 만났다고 주장하는 강준경씨라는 사람 하나를 제외하면, 김기준씨가 평소 친분을 맺어왔던 그 어떤 사람도 기준씨가 그렇게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들과, 당시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그리고 대학에서 친분을 맺었던 선, 후배, 교수, 조교들까지도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조금 내성적이고 때로 우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정신 상태를 의심할 만큼의 행동은 보인 적이 없다는 것이 이 분들의 공통된 증언입니다. 증인은 스스로의 죄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 기준씨를 정신이상자로 몰고 있는 건 아닙니까?
- 이 말씀은 조금 무례하시군요. 저는 보고, 들은 대로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 알겠습니다. 증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증인의 가정사에 대해서 짤막하게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 제 남편에 대해서 말씀하고 싶으신 건가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제 남편은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 관계가 없다고요? 경찰 진술서에 따르면 증인은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그 전날 밤에 남편의 유령을 봤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닙니까?
- 유령이 아니라 시체였습니다. 땅에 묻은 지 삼 년이나 지난 시체였어요. 비가 철철 내리는 밤에 흙탕물을 흘려가며 제 방 창문으로 기어 올라왔습니다. 그게 꿈이나 상상이 아니었다는 건 제 양심을 걸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새벽 한 시 십삼분이었습니다. 전 가위에 눌려서 꼼짝도 할 수 없었고, 그 끔찍한 것이 침대로 기어 올라오고 나서야…
- 증인. 증인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 제 아들이 봤습니다! 그 망할 자식이 꿈에서 본 모든 광경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난 뒤에야, 제 비명을 듣고 아들이 방문을 열었다구요! 물론 제 아들은 그런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하겠지만, 제가 어미로서, 어미로서… 그리고 심리학자로서 증언할 수 있습니다.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싶을 거에요. 어머니가 시체에게, 그것도 전 남편 시체에게 강간당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심리적 외상이에요! 시간을 두고 질문하면 분명히 결론이 나올 겁니다!
- 좋습니다. 진정하세요. 증인은 2006년, 이른바 꿈에 관한 첫 논문 발표가 있었을 무렵 같은 연구실 동료였던 남편과 이혼했습니다. 남편은 이혼 후에 증인의 연구결과를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했고요. 증인은 첫 진술이나 지난 공판에서 그 ‘동료’ 가 자신의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왜 밝히지 않았습니까? 숨겨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 그 사람이 제 남편이었다고 밝히는 순간, 그 논문을 둘러싼 모든 더러운 음모들이 한낱 제 남편의 악감정 정도로 격하되어 버리는 게 싫었습니다. 게다가 제 남편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보통 사람이었을 뿐이에요. 저 같은 아내를 감당할 수 없었던… 이혼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반박논문이 제 남편 이름으로 발표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닙니다. 이건 다른 기회에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 그렇군요.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 …무슨 말씀이세요?
- 증인은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로, 같은 연구실 동료들에게도 결혼 사실을 숨겨가며 20년간 결혼생활을 지속했습니다. 번듯한 아드님도 있고요. 저는 그 의도가 궁금합니다. 아마도 연구실 생활에 사적인 제제가 가해지는 게 싫으셨던 게 아닌가 싶은데요.
- 이건 유도심문인가요?
- 그렇군요. 그렇다면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증인이 말씀하신 대로, 반박논문을 발표한 사람과 증인과의 혼인관계가 밝혀질 경우, 이 논쟁은 학문적인 차원이 아니라 부부관계의 하나로 일축되어 버릴 수도 있었겠죠. 증인은 오히려 논문의 논쟁적인 부분을 부각시키고 학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켜내기 위해서 부부관계를 숨겼던 건 아닙니까? 증인이 그 논문의 ‘논쟁적인’ 지위를 그런 방법으로 지켜낸 덕택에 2008년부터 2년간 불법의료행위를 통해 상당한 액수의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시는 건가요?
- …절 모욕하시는 건가요?
- 아닙니다. 객관적인 사실이 그렇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 그렇다면 제 대답도 필요 없으시겠군요? 잘나신 ‘객관적인 사실들’ 이 이미 다 가르쳐주고 있으니까? 제가 남편도 버리고, 사람들을 미쳐버리게 만들 사술(邪術)을 개발해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챙긴 다음에 급기야 본인도 미쳐버린 상태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건가요? 제 남편은 죽었어요! 전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구요!
- 죽은 남편의 시체가 자신의 방으로 찾아와 자신을 강간했다, 는 진술은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래서 제가 말했잖아요, 그건 제 남편이랑 아무 관계가 없다고! 그건 제 남편이 아니라 제 남편의 시체였을 뿐이고, 저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움직였을 뿐이에요.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입니다. 정말로…
- 알겠습니다. 판사님, 증인의 감정상태가 격해져서 더는 심문을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휴정을 신청하는 바입니다.
<2010년 2월 9일 오후 2시, 서울 서부 경찰서 면회실>
- 이현경씨. 저한테는 진실만을 이야기해 주셔야 합니다.
- …다 사실이에요. 제 남편에 관한 것도 사실이고.
- 얼마 전에 아드님을 만나 뵙긴 했습니다만… 어째서 어머니 몰래 사업을 해 왔느냐는 질문에는 끝끝내 대답을 하지 않더군요. 대충 짐작이 가긴 합니다만, 이렇게 나오신다면 제 입장도 상당히 곤란해집니다. 이미 검찰측에서는 본인들에게 유리한 증거들을 많이 확보해 둔 상태입니다. 김기준씨가 정신이상자가 아니었다는 측근들의 증언이나, 김기준씨의 부모님이 사실 생존해 있는 상태란 사실은 박사님께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외부적인 부분만 해도 이런데… 더 깊이 들어가자면 정말 할 말이 없어지는군요. 꿈을 그리려면 물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죠? 변론을 하려면 진실이 필요합니다.
- 강준경씨 말씀이신가요? 미안하지만 그 이상은 들은 바가 없어요. 죽은 사람한테 확인을 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 다시한번 확인하겠습니다. 강준경씨가 팔월 중순 무렵에 박사님을 찾아왔다고 하셨죠?
- 네. 광복절 직전이었어요.
- 그 때는 이미 김기준씨에 대한 치료가 상당부분 진행 중인 상태였고.
- 네. 짝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오는 꿈을 계속해서 심어줬는데, 저한테는 그 꿈들이 현실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어요. 실제로 기준씨 강박증세도 상당히 많이 호전된 상태였고. 다만 다른 환자들처럼 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죠. 처음엔 그냥 찾아오는 꿈이었다가, 다음에는 하룻밤 자고 가는 꿈, 그 다음에는 손만 잡고 자는 꿈, 그 다음에는 섹스하는 꿈, 그 다음에는 이런 체위, 저런 체위, 뭐 요구사항은 많았지만 구체적으로 심어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기준씨는 이미 제 암시를 상당히 오랫동안 받아온 터라 자체적으로 그 틀을 벗어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저는 큰 밑그림을 그려줄 뿐이었고, 구체적인 실행은 기준씨 스스로 했다고나 할까요. 이 정도면 다른 환자들보다 많이 양호한 편이었죠.
- 그런데 강준경씨가 일을 이상하게 만들었군요.
- 간신히 제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일이 다시 틀어지는 기분이었어요. 제가 심어준 꿈들이 여태껏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는데, 게다가 그 대상이 남자였다니… 그나마 준경씨는 차분한 편이었죠. 그런 일을 두 달이 다 되도록 겪었는데 그렇게 덤덤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거에요. 결국엔 그런 덤덤함이 독이 된 것 같긴 하지만.
- 준경씨는 기준씨랑 오래된 친구 사이라고 했죠?
- 그러니까 그 정도로 덤덤할 수 있었겠죠. 예지몽 같은 걸 꾼다는 것도 꽤 오래 전부터 알아왔다고 했어요. 정확히, 제가 그런 꿈을 심어주기 시작한 날부터 자신이 이유 없이 기준씨를 찾아가고, 이상한 행동을 하고, 심지어 거리라는 물리적 제약이 있는데도 무엇에 홀린 것처럼 기준씨를 찾아가면서도 계속 그 친구가 애초에 이상한 사람이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있었나봐요. 말로는 무당도 찾아가고, 심리치료도 받아봤다는데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해서…
- 본격적으로 관계를 시작한 건 언제였답니까?
- 기준씨한테 섹스에 대한 암시를 주기 시작한 게 팔월이 시작되면서 부터에요. 준경씨가 기준씨랑 첫 관계를 마치고 어마어마한 고민에 빠진 것도 그 무렵이고. 처음엔 한새벽에 잠에서 깨자마자 너무 놀라서 집으로 도망쳤다는데, 기막히게도 그 날 밤이 돼서야 기준씨 집에 핸드폰을 두고 왔다는 걸 알았다는 거죠. 어쩔 수 없이 찾아간 시간이 또 하필이면 자정 무렵이었고, 자기도 모르게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고… 팔월 첫째 주가 끝나면서 기준씨가 하도 간절히 매달리는 통에 일주일쯤 되는 긴 시나리오를 심어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아예 그 집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는 것 같아요. 여기까지 듣고 나니까 나도 황당할 수밖에요. 전부 내가 준 암시 때문이라니, 이게 내 탓인가 싶다가도 말이 되는 일인가 싶기도 하고.
- 방금 핸드폰을 두고 와서 다시 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두 사람이 만났을 때마다 항상 그럴듯한 핑계거리가 있었다는 뜻인가요?
- 예… 뭐, 적어도 뜬금없이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 는 식으로 만나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아요. 막차가 끊겼다던가, 자취방 열쇠를 잃어버렸는데 밤이 늦어서 주인집 아주머니를 부를 수가 없다던가, 말씀드린 것처럼 무슨 물건을 두고 왔다던가, 꼭 만날 일이 있었다던가. 애초에 기준씨가 그렇게 황당한 상황을 원하지 않았어요. 꼭 이뤄질법한 ‘현실적인’ 사건들만 심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거든요.
- 두 사람이 아주 친했다면, 친했다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렵에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연인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은…
- 글쎄요. 있었다고 말씀을 드려야겠지만, 그 때 준경씨는 여자 친구도 있는 상태였어요.
- …알겠습니다. 아무튼 준경씨는 자꾸 이상한 일이 반복되자 기준씨에게 확인을 했다는 거죠. 혹시 뭐 알고 있는 건 없냐고. 그러니까 기준씨는 자기가 매일 밤 꿈마다 준경씨를 본다는 걸 털어놓았다는 거고.
- 털어놓았다기보다는 자랑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이것이 운명이다’ 정도 되는 선언이었다고나 할까? 뭐 준경씨는 곧 죽어도 그따위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던 거고, 그러니까 알음알음 저를 찾아와서는, 특정한 꿈을 사람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방법은 없느냐, 라고 물었던 거에요. 뭐 결국 두 사람 다 목적은 동일했죠.
- 그런데 잘 되진 않았다는 거고.
- 준경씨가 기준씨를 어떻게 설득했느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은 없어요. 다만 며칠 뒤에 두 사람이 같이 절 찾아왔더라구요. 기준씨랑 저는 눈빛만 주고받았고, 이전에 우리가 만났던 적이 있다거나, 제가 그런 꿈을 기준씨한테 심어줬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어요. 다만 저는 정말로 제가 심었던 모든 꿈을 지워버릴 각오였고, 제 표정에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분명히 드러날 텐데도 기준씨는 태연하게 시술을 받더군요. 최면이 중간쯤 진행됐을 때 전 이미 알았어요. 이 사람은 이미 제 통제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말이죠.
- 기준씨가 원하는 꿈을 자유자재로 꿀 수 있게 되었다, 는 건가요?
- 적어도 제가 그려준 밑그림에 한해서는, 어떤 장면이든 마음대로 그릴 능력이 있었던 거죠. 두 사람은 이후에도 서너 번쯤 절 찾아왔고,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소용이 없었어요. 기준씨는 자신의 꿈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환자가 원하는 것만을 이뤄줄 수 있는 사람일 뿐이에요. 10월 중순에 마지막으로 절 찾아와서는, 시술이 끝나고 나서 당장이라도 꺼져버릴 것처럼 웃던 준경씨 얼굴이 아직도 기억나요. 제가 치료가 잘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보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지갑을 열어서 여자 친구 사진을 보여주더군요. 지금은 헤어졌지만, 자기 마음속에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슬픈 일이죠.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 그게 마지막이었나요?
- 네.
<2010년 6월 17일 오후 3시. 서울 지방법원. 3차 공판>
-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김기준씨를 살해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꿈을 통해서 현실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농락할 수 있는 능력이 개방된 상태였으니까요.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들어봐도 될까요?
- 제가 그려준 암시의 밑그림이 문제였습니다. 그 밑그림을 바탕으로 그 사람은 어떤 일이든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었어요. 이 재판이 진행되는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죽기 직전에 어떤 꿈이든 꿔서,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는 모든 증거들을 말살시켜 버린 게 분명합니다.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있다거나, 주변인들이 이상한 증언을 한다는 게 그 증거죠.
- 그렇다면 왜 가장 위험할 수 있는, 증인의 기억은 조작하지 않았을까요?
- 저는 말하자면,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개방해 준 사람이었으니까요. 저의 기억이나 능력의 어떤 부분이든 조작하고 나면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패러독스가 발생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 자체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어요. 세상의 어느 구석에서든 논리의 균열이 생기고 나면, 그건 온 세상으로 전염돼서…
- 알겠습니다. 하지만 살해된 김기준씨는 정작 자신이 가장 불쾌해하던 꿈 하나만은 마지막까지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증인의 증언에 따르자면 말이죠.
- 스스로 그 그림을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 무슨 말인지 들어봐도 될까요?
- 물론 강준경씨가 자살한 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온다는 사실이나, 퉁퉁 불어서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뿐더러 슬슬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썩어가는 시체와 매일 밤 격렬한 섹스를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유쾌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겠죠. 하지만 그 밑그림이 되는 사실 자체는 김기준씨가 강렬히 소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연인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게 그림을 그리고 잠들어 꿈을 꾼 후 현실을 기다려 봐야, 그 꿈이 현실로 현현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겁니다. 이 세상이 그에게 내려준 능력으로는 고작해야 죽은 시체를 일어나게 만드는 게 최선이었던 거죠.
- 김기준씨는 살해되기 이틀 전, 증인을 찾아왔습니다. 맞습니까?
- 맞습니다.
- 증인은 그 날 밤 죽은 남편의 시체에게 강간당하는 악몽을 꿨고요.
- 꿈이 아니었습니다.
- 알겠습니다. 김기준씨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 자신은 증인에 관한 꿈을 꿀 것이며, 그 내용은 죽은 남편의 시체가 찾아오는 것이 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까?
- 그렇습니다.
- 부탁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 자신의 꿈을 가다듬어서, 정말 살아있는 강준경씨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건 제 능력 밖에 있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 증인은 자신을 ‘강간했다’ 라고 주장한 남편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증인과 증인의 아드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남편분의 시신이나, 그 시신이 흘렸다는 흙탕물, 시신이 깨부셨다는 창문의 유리조각을 발견한 바가 없습니다. 게다가 아드님은 이전 증언을 번복해서 말씀하신 거고요.
- 저는 아들의 얼굴까지 본 후로 기절했습니다. 제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은 잘게 토막내어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에 버리고, 방은 제가 일어나기 전에 깨끗이 정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깨진 유리창은 그대로 뒀습니다. 이 부분은 김기준씨가 꿈으로 조작한 것 같습니다.
- 증인의 아드님은 이 모든 사건이 아버지, 그러니까 증인의 남편 되시는 분이 증인에게 한을 품고 죽어서, 그 원혼이 장난을 쳤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 제 아들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오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나이대의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품기 쉬운 오해일 뿐이죠.
- 증인은 그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기준씨에게 연락을 취해서,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핑계로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 다음 흉기로 수차례 찔러서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신을 상대로 수차례 최면을 시도했습니다. 맞습니까?
- 맞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죽어서도 꿈을 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죽고 나서 꿈을 꾸는 꿈을 꾸었을 수도 있죠. 어디까지 예비해 두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제는 끝입니다. 현실은 잘 보존될 테고, 제가 저지른 일들은 제가 다 책임지는 걸로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증인, 증인의 증언들이 법정 증거로 채택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나요?
- 짐작하고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해도 좋습니다.
- 얼마 전에 제 아들과 변호사에게 부탁해서 김기준씨의 무덤을 파헤쳐보도록 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시신이 한 구인지, 두 구인지, 그리고 그 시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신다면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아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끝입니까?
- 끝입니다.
- 알겠습니다. 판사님, 심문을 마치겠습니다.
(2010.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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