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짐했던 소설입니다. A... Antifreeze (부동액) 이랍디다
- 다음주부터 시작하려고 했는데... 지산땜에 미리 썼죠. 뭐 여기에는 미리 쓴 김에 올립니다.
- 모 그룹의 동명 노래에서 모티브 따온 거 맞습니다. 중간중간에 낯익은 문장들도 보일걸요.
- 그러고보니 거의 1년 반만에 쓰는 소설이에요. 우와악. 엉망이다 진짜;;
- 소소한 이야기를 도저히 못 쓰는 이런 버릇은 역시 에픽 판타지를 쓰던 습관이 남아서 그런걸까요;;
- 각종 딴지 미리반사 특허획득. 특히 마지막은 고칠거에요. 오늘은 피곤해서 이만...
얼어붙은 땅을 깨고 삼촌을 묻었다. 문득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후하게 계산해 봐야 18년을 조금 더 산 남자아이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사람이 세상의 마지막 인간이 될 지도 모를 위기에 처해 있다면 그렇게 경우 없는 소리도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지구를 떠나야 할 적절한 기회를 너무 많이 놓쳐버렸는지도 모른다. 선과 악의 경계를 조금만 비틀어 본다면 지금 이 세상에는 자비로우신 신께서 안타깝게 내밀고 있는 구원의 손길들이 산적해 있으니까. 예컨대 눈사태, 눈보라, 살얼음이 교묘하게 낀 호수, 새벽녘에 아무도 모르게 꺼져버리는 모닥불, 절정에 달한 추위 속에 찾아오는 졸음, 보다 빈번한 굶주림과 같은 것들. 솔직히, 나는 더 살아남아야 할 정당한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지금 내게서 열 걸음쯤 떨어져 있는 곳에 그 이유 비스무래한 것이 있기는 하다. 사람이다. 그것도 여자다. 애석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나는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며 고향도 모르고 국적도 모른다. 삼촌과 내가 장작거리를 찾아 길거리를 헤매다가 처음으로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막 쌓아올린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봉분 앞에서 자리를 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춤을 좋아한다. 정신이 나간 걸로 봐서는 정신이 나가버리기 전에는 아주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좋아했던 게 틀림없다. 삼촌과 나는 두 시간이 넘도록 좋은 말로 그녀를 어르고 달랜 끝에 결국 그다지 좋지 않은 방법으로 춤을 정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두 팔을 꽉 잡힌 채 봉분 사이 차가운 흙바닥에 누운 그녀는, 텅 비어버린 눈동자로 삼촌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춤춰요. 춤.”
그게 약 3년 전의 일이다.
그 날은 삼촌의 라디오에 마지막으로 잡히던 방송이 끊기고, 도시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자동차가 허겁지겁 이곳을 떠나던 날이다. 바로 전 날 까지만 해도 삼촌은 그 자동차를 타고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차 주인은 젊었을 적에 같이 공부하던 무슨무슨 형님이라고 했다. 전 날 밤, 삼촌의 라디오로 전해지는 일기예보에 눈물을 흘리며 환호성을 지르던 그 사람을, 우리는 몇 년이 더 지나서야 굳게 잠긴 차창 너머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삼촌은 차 문을 두어 번 두들겨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고, 여전히 춤을 좋아했던 그녀는 차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까르륵 웃어댔다. 마침 날이 좋지 않았다. 삼촌은 내 눈을 가리고 손을 잡은 채 터벅거리며 멈춰버린 차를 지나쳤다.
삼촌은 말로 표현되지 않은 충격을 계량하고 배려할 만큼 섬세한 사람이 못됐다. 그러니 삼촌이 내 눈을 가린 건, 아마도 내가 죽은 사람을 볼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날 저녁, 늘 그렇듯 타닥거리는 모닥불을 무릎 너머로 보고 있던 나는 또 그 질문을 해버렸다.
“삼촌, 더 살아야 돼요?”
삼촌은 고개를 들어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왠지 모르게 시무룩해졌다. 삼촌이 이어서 말했다.
“근데 말이다, 죽기는 싫지 않냐?”
“…그건 그래요.”
먼발치 어둠 속에서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빛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모닥불을 뒤지던 삼촌이 피식거리며, 짧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 밤 이후로 다시는 그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 것 같다. 삼촌의 무덤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째서 다시 그 질문을 떠올렸는지 생각해 봤다. 아주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내가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라곤 오직 한 명 뿐이었지만, 열 걸음 밖에서 춤을 추고 있는 그녀는 어쩐지 내가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한 사람을 묻으면서 깨달은 것과 두 사람을 묻으면서 깨달은 것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질적인 차이가 존재할까. 막 한 사람을 더 묻은 지금, 그녀의 춤은 더 거칠고… 더 즐거워 보였다.
‘거대한 겨울’ 이라는, 기표적으로나 기의적으로나 끔찍하게 멋이 없는 조어가 들이닥쳤을 때, 나는 여덟 살이었고 삼촌은 서른 한 살이었다. 새해를 열흘쯤 앞 둔 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예의 ‘기상이변’을 다룬 TV뉴스를 심드렁하게 보고 있었다. 초인종이 울리고 어머니가 문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소파에서 내려와 어머니 다리 뒤에 숨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머니는 적잖이 당황하셨던 것 같다. 약간의 승강이 끝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에 성공한 삼촌은 다짜고짜 이야기했다.
“형수님, 죄송하지만 본론부터 말할게요. 도망가야 됩니다. 지금 당장 남쪽으로 가야 돼요. 여기 그냥 있다가는 한 달 이내로 다 죽습니다.”
당연히, 십 년이 넘도록 얼굴은커녕 전화통화 한 번 못한 사람이 갑자기 찾아와서 저런 소리를 한다면 누구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어머니는 나를 꼭 붙잡으며 아버지를 소리 높여 불렀다. 베란다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고 계시던 아버지가 속옷 바람으로 달려왔다. 삼촌은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형님, 지금 자세히 이야기를 드리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요. 간신히 구해낸 겁니다. 한 가족만 탈 수 있다는데 근방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밖에 생각나는 데가 없었어요. 지금 알 만한 사람들은 다 대피했습니다. TV에서 괜찮다고 그러죠? 거짓말이에요. 대통령이고 국회고 군대고 다 도망갔어요. 일주일 안에 수도랑 전기가 끊길 겁니다. 서두르셔야…”
아버지는 이성적인 분이셨고 그래서 삼촌의 말을 적절히 끊을 줄 아셨다.
“너, 어디서 나타난 거냐?”
삼촌은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답답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드린다니까요. 형수님하고 빨리 준비해서… 얘는 뭡니까, 설마 제 조캅니까?”
삼촌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묻자 아버지의 표정은 놀라운 속도로 일그러졌다. 나는 어머니를 더 세게 붙잡았다.
“집안에 조카가 생기는지 동생이 생기는지도 모르고 있었냐? 너 어머님 돌아가신 건 알고나 있냐?”
“어머니가요? 뭐,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아니, 연락을 안 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가 어디 연락처도 안 드리고 잠적했습니까? 언제든지 전화만 주시면 당장 달려오겠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도 전화 한 통 없으시니… 아아니,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잘 알겠으니까 일단은 산 사람부터 살려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애가 있으면 더 좋아요. 우선순위가 올라간다니까요. 당장 입을 옷이랑, 두꺼운 이불 같은 것 좀 챙기십쇼. 통장이나 귀금속, 뭐 이런 건 필요 없습니다. 당분간 돈이란 건 아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시… 어? 형님? 저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진지하다니까요! 형님!”
나와 삼촌의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억지로 떨려난 뒤에도 밤이 새도록 문을 두들겨 댔던 걸 보면, 그 날 삼촌은 정말로 진지했던 것 같다. 물론 우리 가족의 안위에 있어서 그랬다는 말은 아니다. 아버지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지만, 그 날 삼촌의 발악에는 일말의 진심도 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한 가족’ 만 탈 수 있다는 말이나, ‘애가 있으면 우선순위가 올라 간다’ 는 말이 그러했다. 가족도 없고 애도 없었던 삼촌의 ‘피난민 우선순위’ 가 어떤 수준이었을지 짐작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내가 삼촌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설득될 가망성이 없는 형님 부부를 끝까지 목 놓아 부르짖다가 바보같이 얼어 죽는 편을 택했을까, 비교적 설득할 필요가 적은 아이 한 명만 잘 데려다가 잽싸게 도망가는 편을 택했을까. 글쎄, 아무래도 나는 형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면 삼촌은 그럭저럭 현명한 선택을 한 셈이었다. 며칠 후 나는 삼촌에게 유괴 당했지만, 나는 아홉 살이 된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그건 내 상황판단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내가 상황판단을 하기엔 너무 벅찬 속도로 세상이 무너져간 탓이 크다.
남쪽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삼촌은 나를 가만히 앉혀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머리가 어느 정도 굵은 어른이라면 꿈에서도 받아들이지 못할 괴상한 이야기들을, 나는 그냥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듣듯이 차분히 흡수했다. 하지만 사실 아직도 그 이야기의 진위여부에 있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삼촌보다 이 이야기를 진지하고 자세히 해 준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그나마도 더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상당히 많은 부분을 까먹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파악하고 있는 거라곤, 약 10년 전에 거대한 혜성이 지구 근방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 때문에 자전축이 비뚤어졌으며, 어마어마한 지각변동과 시시콜콜 따지기 귀찮은 기후변화가 뒤따라서, 결과적으로 전 세계적인 빙하기가 도래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가 전부이다. 하지만 뭐, 사실 결과만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
삼촌이 십 년이 넘도록 집과 연락을 끊고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세계적인 위기’ 에 대해 연구하는 모 단체에 가입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제가 있다면 이 단체가 외계인을 숭배하는 종교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삼촌은 이 기차가 지금 외계인이 지구를 구하기 위해 제작중인 ‘방주’를 향해서 가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너희 아버님도 진작에 빛을 보았더라면…” 나는 삼촌의 이 말이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란 것을, 그 어린 나이에도 너무나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예언된 심판의 날이 닥쳐온 건 사실이니까 삼촌과 동료들의 믿음 자체를 광신이라고 문제 삼거나 비난할 순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때때로 정당한 믿음 역시 그 누구도 구원의 길로 이끌지 못할 만큼 나약할 수 있다는 걸 배운 걸로 족하다.
분명히 해 두지만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한참동안 어디론가 쉬지 않고 달려간 기차 안에서, 내가 기억하는 풍경이라곤 지쳐있거나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차창 바깥으로 눈이 멀도록 쏟아지던 하얗고 투명한 것들의 잔상들뿐이다. 허탈한 표정으로 질려가는 세상과 그 세상에 다시 질식해 가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창문에 입김을 불어 이런저런 글씨를 쓰며 놀았다. 삼촌은 이따금씩 어디선가 만화책 따위를 들고 왔는데, 내가 침대칸 2층 침대의 아래쪽에 엎드려 그걸 이리저리 뒤적거릴 때면 삼촌은 내 바로 위로 올라가 기타를 치곤했다. 그다지 기억하고 싶을 정도로 낭만적인 장면은 아니다. 삼촌의 기타소리가 울려 퍼질 때면 온갖 소음으로 요란하던 차 안에 스산한 침묵이 음습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구원을 앞두고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답지 않게 삼촌은 조용하고 어두운 노래를 좋아했다. 아마 그건 어떤 신앙으로도 바꿀 수 없는 천형(天刑)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노래란 게 보통 그렇듯이.
기차가 멈췄을 때, 나는 잠들어 있었다. 삼촌은 나를 허겁지겁 흔들어 깨웠고 나는 삼촌의 흥분한 얼굴보다는 온몸을 휘감고 있는 냉기 때문에 더욱 놀랐다. 옷을 갈아입고, 삼촌의 손에 붙들린 채 눈을 부벼가며 기차를 내렸을 때까지도 놀라움은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추위가 아닌, 그 후로 수년에 걸쳐 전인류의 목숨을 앗아갈 추위 - 말하자면 생의 의지를 통째로 갉아먹는 추위였다.
당황한 나는 삼촌과 함께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올려보았는데, 기차의 앞부분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단순히 내가 느낀 놀라움 이상의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응시하는 방향을 똑같이 보고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내 눈에 들어온 거라곤 눈밭에 반사된 달빛으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어둠, 그 어둠 속의 골짜기, 그리고 그 골짜기 위의 끊어진 다리, 고무조각처럼 휘어져서 바람 속에 너덜거리는 앙상한 철교가 전부였던 것이다.
절망의 시작은, 뭐 굳이 기록하자면 그러하다. 하지만 삼촌에게는 그 시작의 끝을 확인하는 일이 더 잔인한 작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삼촌은 기차에서 내린 사람 수백 명과 함께 골짜기를 건너 철길을 걸어서 따라가는 작업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지독한 추위와 눈보라에 질린 많은 사람들이 포기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추위를 헤치고 끝도 없는 철길을 따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가다가 포기했다. 삼촌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죽기 시작했다. 나는 삼촌의 손을 잡고, 등에 업히고, 바퀴달린 가방에 매달려서 그 모든 죽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삼촌에게 수도 없이 속삭였을 것이다. “더 살아야 돼요?” 나는 온 세상이 매일 존재 자체로 하는 말을 가차 없이 인간의 언어로 바꿔서 들려주는 꼬마였다.
그럴 때마다, 삼촌은 이를 악 물고 나를 토닥이며 억지로 사람의 말을 내뱉었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더 가면 방주가 있을 거다. 지금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알았지?”
가슴팍에서 올라오는 삼촌의 목소리가 안타깝도록 질겨서, 나는 더 칭얼거릴 수도 없었다.
서사적인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마침내 철길의 끝에 다다랐다.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람은 열댓 명 남짓. 제일 앞에 선 삼촌이 내 손을 잡은 채로 무릎을 꿇었고, 나는 얼굴을 때리는 바닷바람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등 뒤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들의 오른편을 지나 앞으로 곧게 뻗은 철길은, 깎아지른 절벽과, 그 너머로 출렁대는 파도를 마주보며 단정하게 끊겨 있었다.
삼촌의 희망도 그날, 그 바닷가에서 끊어졌다. 삼촌은 다시는 방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열다섯이 될 때까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지막 남은 달력을 불쏘시개로 던져버릴 때까지 우리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별로 나아진 거라곤 없었다. 발버둥의 시작은 그래도 성대했다. 삼촌을 비롯한 생존자들은 그래도 아직,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건조식량, 방한복, 텐트, 땔감을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연장들과 만약을 위한 여러 종류의 유류(油類)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갖추고도 사람들은 죽었다. 누군가는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서 바다로 추락했고, 누군가는 눈보라 속을 헤매다가 캠프로 돌아오는 길을 끝내 찾지 못한 채 산중에서 동사했다. 게다가 아껴 먹어도 언젠가는 모자라게 될 식량을 매일 확인하며,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은 한없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구조 ‘받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혹시라도 우리 이외에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그들을 구조 ‘해야’ 할 처지에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매일같이 기적 같은 구원의 손길을 기다렸지만 발견되는 거라곤 사람들의 흔적, 혹은 시체에 불과했다. 이따금 마을에 도착하기라도 하면, 우리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식량들을 챙기면서도 한없이 우울해졌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걸까.
이윽고 도착하게 된 제법 큰 도시에서 삼촌이 아직 쌩쌩한 라디오와 TV를 발견했을 때에야 우리는 세상의 소식을 다시 접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거기서 들려온 소식들이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하다는 점이었지만. 파국적인 지진과 해일, 화산폭발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뉴스에서 그보다 더 자주 소개되는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국경을 단체로 넘어오는 피난민들을 지뢰와 폭탄과 기관총으로 응징하고 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국제단체에서 마련한 구호물자 강탈을 위해 공공연하게 군대가 동원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적인 테러가 잇따르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우리는 이 도시를 떠나지 않는 편이,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 이외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편이 현명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폐허가 되어버린 이 도시 - 우리가 이름붙이기로는 바벨(Babel)시 - 가 나와 열댓명 남짓한 생존자들의 실질적인 삶의 터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3년 전까지는.
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건 이미 이야기했다. 바벨의 마지막 라디오가 수명을 다 했고, 바벨에 남아있던 마지막 자동차가 바벨을 떠났으며, 결정적으로 춤을 좋아하는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바벨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방인이었다. 그 날 아침 마지막 자동차가 발작적으로 길을 떠나지만 않았어도, 아마 삼촌은 그녀를 무덤가에서 춤만 추다가 죽도록 내버려뒀을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떠난 탓에 삼촌은 그녀를 좋은 말로 달랬고, 힘으로 제압했으며, 어느 정도 얌전해진 다음에는 마른 곳에 앉힌 뒤에 몇 미터 쯤 떨어져서 차분히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어디서 왔어요?”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손을 뻗어 산 너머를 가리켰다. 해가 뜨는 방향이었다.
“동쪽? 산 넘어서?”
“해, 해는 원래 동쪽에서 떠요.”
삼촌이 표정을 굳히자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해맑게 미소 지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해 말고. 아가씨가 어디 살고 있었냐구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가락으로 땅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요. 땅속에서… 근데 하늘이 무너졌어요. 폭삭!”
“땅 속? 대피소 같은 데에서 살았던 거에요?”
“대피소? 아-니에요! 나는 춤 좋아해요. 춤 많이 추는 나라에서 왔어요. 아저씨는요?”
삼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기색을 보이자 삼촌은 손가락을 뻗어 뒤쪽에 있는 봉분 두 개를 가리켰다. 삼촌은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이건 누구 무덤이에요? 아가씨 부모님?”
그녀는 앞을 향해 선 채로 허리만 꺾어서 뒤를 훽 돌아보았다. 한참동안 그 자세로 서 있다가, 양 손을 허리에 짚고 다시 삼촌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온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그건, 웃음과 울음의 중간지점쯤에 있는 표정이었다. 삼촌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갑자기,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부모님.”
“아… 네?”
“멋대로 짐작하세요. 질문은 사양할게요.”
그녀는 다시 뒤로 돌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와 삼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날 따라, 이상하게 날씨가 좋았다. 산등성이와 길바닥에 하얗게 뿌려진 많은 조각들이 햇빛을 안개처럼 뿌옇게 반사시켰다. 준비된 무대 위에 올라선 무용수처럼, 그녀는 아래와 위에서 온갖 조명을 받으며 아름답게, 아니, 아름답다기보다는 참 열심히 몸을 뻗었다. 이 허공에서 저 허공으로 내리꽂히는 손짓과 발짓이 공기를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열기를 느꼈다. 그건 그러니까, 봄의 느낌이었다.
삼촌도, 나도, 그녀에게 따라오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 뒤에서 적당히 거리를 둔 채로 도시까지 우리를 쫓아왔다. 나는 옆에 선 삼촌에게 몇 번이나 눈치를 줬지만 삼촌은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그 날 밤 우리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얼마 있다 비가 내렸다. 7년 만에 처음으로 보는 비였다. 삼촌은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감격스런 표정으로 유리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마도 사람들이 떠나기 이전에는 상가나 사무실로 사용했을만한 건물 1층에서 살고 있었는데, 7년간 나름대로 낯이 익은 거리위로 빗방울이 흐르는 풍경은 어쩐지 소름 돋도록 낯설게 보였다. 그 거리 위에서 몇안되는 사람들이 살다가, 흩어져 갔다. 몇 사람은 죽었고, 몇 사람은 태어났다가 죽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떠나갔다. 낮은 곳을 찾아 갈래져 흐르는 빗방울은 어쩐지 그런 사람들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삼촌도 쉽게 좋은 말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정작 우리가 경악한 것은 따로 있었는데 - 어느 샌가 거리로 뛰어나가 어김없이 춤을 추고 있는 그녀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가 쏟아지는 거리로 뛰어나가 그녀의 양 팔을 붙잡았다. 텅 빈 눈동자 안에 너무 많은 표정을 담은 그녀는, 삼촌과 내 손에 결박당한 채 버둥거리면서도 신음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비가… 비가 와요. 춤, 춤, 춤춰요. 네? 비가 온다니까요? 아저씨?” 발버둥이 워낙 거셌던 탓에 결국 우리는 뼛속까지 젖은 채 건물 안으로 돌아와야 했다. 삼촌이 불씨와 장작을 꺼내와 불을 지피는 동안, 나는 그녀를 꽉 붙잡고 있었다.
“미쳤어요? 바깥 날씨 어떤지 몰라요?”
“춥잖아요. 추우면 춤을 춰야죠. 춤을 추면 더워져요. 너무 추워요. 추우면 죽어요…”
“이봐요. 추우면 불을 쬐야 되는 거에요. 잔소리 말고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알았죠?”
내 설명이 설명처럼 들린 건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녀는 버둥거리던 팔다리를 멈추었다. 나는 오들오들 떨며 천천히 그녀에게서 벗어나 불 가까이 다가갔다. 삼촌은 묵묵히 나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여자, 가만히 두면 큰 일 나겠는데요. 삼촌, 어쩌죠?”
“그러게 말이다.”
그 때 삼촌의 대답이 건성이었다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다.
무서운 기세로 퍼붓던 비는 이틀 만에 그쳤다. 대신 더 무서운 기세로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건물 안에 꼼짝없이 갇힌 채로 한참을 보내야 했다.
기어코 장작거리가 떨어져 갔다. 하지만 눈보라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마지막 남은 달력까지 불태워야 했다. 마지막까지 장작신세를 면한 건 삼촌의 기타뿐이었는데, 삼촌은 이제 좀처럼 기타를 치지 않았지만 항상 손에 닿는 곳에 두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그 기타마저 결정적인 위기에 처한 것은 눈보라가 치던 마지막 날 밤이었다. 잠들어 있던 나는 온 몸을 뱀처럼 휘감아 오는 한기에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눈앞이 캄캄했고, 달빛에 발작적으로 하얗게 빛나는 것들만 얼굴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바람소리가 귓가에 휘감겼다. 나는 고개를 돌려 유리창 쪽을 바라보았다. 거리 쪽으로 난 창들이 차례대로 산산조각 나 있었고, 그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삼촌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자꾸 감겨왔다. 자다 깨서 졸린 건지, 추위 때문에 졸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삼촌은 내가 깨어난 걸 발견하고 내 쪽으로 걸어와서,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무언가 중얼거렸다. 바람소리에 가려서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삼촌은 손을 뻗어 기타를 잡고는, 불쏘시개로 꺼진 모닥불을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그때 하얀 손 하나가 불쑥 눈앞으로 들어왔다.
“커피 드세요~!”
어처구니없이 명랑한 목소리였다. 나는 졸린 눈을 들어 그녀의 그림자와 그녀의 양 손에 들린 커피잔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한밤중에 커피를 어디서 구해왔냐고, 게다가 사태가 이지경인데 한가롭게 커피나 마시게 생겼냐고 따져 물을 정신이 없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커피 잔을 받았다. 커피 위에는 살얼음이 껴 있었다.
“아저씨! 기타 칠 줄 알아요?”
삼촌은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아마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진작 말을 하지~! 음악도 없이 춤추는 거, 안쓰럽지도 않았어요? 못된 아저씨네! 자, 어차피 다들 잠도 깨고 했으니까, 한바탕 질러보자구요. 뭐 어때요? 인생 한 번 살지, 두 번 살아요? 내일 할 일도 없잖아요? 아무거나, 신나는 걸로, 시작!”
다시 졸음이 쏟아진 탓에 그 다음의 기억은 희미하다. 단지, 삼촌은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전에 없이 밝고 명랑했으며, 그 반주에 맞춰서,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하얗고 차가운 것들과 함께, 그녀가 열광적으로 춤을 췄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여기저기 반사돼서 껌뻑이는 달빛과 무겁게 내려앉는 내 눈꺼풀의 박자가 황홀하게 엇갈렸다. 음악과 그림자가 바람소리와 눈보라에 실려 기억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나는 즐거웠다. 아마 그렇게 죽게 됐어도 별로 아쉬울 건 없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나는 따뜻한 기운에 눈을 떴다.
삼촌은 깨진 창문 앞에서 눈보라가 그친 창밖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밤새 춤을 춘 그녀는 나를 꼭 끌어안은 채 꺼져버린 모닥불 위에 나와 함께 누워 있었다. 따뜻한 체온이 심장까지 스며들었다. 나는 이 느낌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이상한 열기, 그러니까 그것은 봄의 느낌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바벨을 떠나기로 했다. 삼촌은 꼭 필요한 먹거리들과 몇 가지 필요한 연장들, 그리고 천막을 챙겨 조촐한 짐을 만들고 앞장섰다. 나는 한 손에 기타를 들고 얼마 남지 않은 기름과 장작들을 가방 속에 때려 넣었다. 그녀는 여전히 조금 멀리서, 언뜻 보면 따라오지 않는 듯 보였지만, 항상 시선에 닿는 거리에 있었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걷지 않았다. 이따금 삼촌이 걸음을 멈추면, 나는 장작을 꺼내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삼촌은 나에게서 기타를 받아서 연주를 시작했다. 음악이 절정에 이르면 그녀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쪼그려 앉아 무릎 위에 턱을 괴고, 현란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발등과 삼촌의 왼손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많은 밤들이 그렇게 편안하게 스쳐갔다.
구름이 끼면, 눈보다 비가 오는 날이 많아졌다. 아침부터 비나 눈이 내리면 우리는 길가에 천막을 치고 불을 피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음악과 춤은 많아지고 움직임은 잦아들었다. 꼬박 3년 가까운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하루 종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날이면, 삼촌은 이 극적인 변화를 짧은 말로 평가하곤 했다.
“봄이 오는구나.”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리 곁에 여전히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바벨을 떠난 마지막 자동차를 발견한 날이 처음으로 우리 셋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본 날이었다. 삼촌은 그 날 유난히 발걸음을 서둘러 멀리 갔다가, 그 날 밤을 지낸 뒤에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틀 만에 우리는 같은 시체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삼촌은 망치를 꺼내 차창을 부수고, 문을 열어 시체를 꺼내더니 길가로 끌어내 불태웠다. 근처 산에서 긁어모은 나무 부스러기들을 타는 시체 위에 뿌린 삼촌은 자신의 짐에서 천막을 꺼내더니 그것도 불 위에 던졌다. 깜짝 놀란 내가 불로 달려들자 삼촌은 손을 내밀어 나를 저지했다. 삼촌은 짧게 설명했다.
“수의다. 수의.”
우리는 그 날 불타는 시체를 앞에 두고 밤을 보냈다. 나는 남은 장작을 죄다 시체 위에 부어버렸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삼촌은 기타를 치지 않았다. 대신 전에 없이 우울한 표정으로 타들어가는 불을 바라보다가, 나에게 물었다.
“너, 운전은 할 줄 아냐?”
나는 고개를 들어 삼촌을 바라봤다.
“아뇨.”
“타이어는 갈 줄 알아?”
“못해요.”
“기름은 넣을 수 있어?”
“가르쳐 주면요.”
“낚시는 해 봤지?”
“몇 번 정도?”
“먹어도 되는 풀은 구분할 수 있겠냐?”
“자신 없어요.”
“깨끗한 물은 구할 수 있겠어?”
“해 본 적 없어요.”
“장작은 구할 수 있어?”
“혼자선 힘들죠.”
“기름 없이 불 피우는 건?”
“힘들어요.”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삼촌이 다시 물었다.
“기타는 칠 줄 알아?”
“…글쎄요.”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삼촌이 피식거리는 게 불 너머까지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삼촌은 일어나지 않았다.
산기슭을 내려가 자동차에 시동을 걸어봤다. 차는 금방이라도 앞으로 달려 나갈 것처럼 힘차게 덜컹거렸다. 트렁크를 열어 보니 한동안은 걱정을 놓아도 될 만큼 식량과 땔감이 실려 있었지만, 그 ‘한동안’ 이란 게 얼마나 갈 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쩐지 짜증이 났다. 삼촌이 그렇게 아무 미련 없이 버리고 갔던 차를 찾아 굳이 하룻길을 거슬러 여기까지 돌아온 이유는 명백해 보였다. 그러니까 그 명백한 이유 때문에 짜증이 났다는 뜻이다. 나는 운전석에 앉은 채 페달을 이것저것 밟아보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끌고 가다가는 내 명이 오히려 짧아질지도 몰라.
차에서 내려온 나는 운전석 문을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멀리서 날 바라보던 그녀가 깜짝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제 우리는 정말 둘만 남았다. 꼬박 3년이 지나도록 다른 사람이라곤 만나질 못했으니 정말 이 세상에 인간이라곤 저 미친 여자 한 사람밖에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이 차를 운전하는 편이 아무래도 가능성이 있겠지.
갑자기 무력감이 걷잡을 수 없는 해일처럼 닥쳐왔다. 나는 버럭 소리 질렀다.
“이봐요! 얘기 좀 해요!”
그녀는 먼발치서 놀란 표정을 지은 채 두 손을 몸 뒤에 숨기고 느린 발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걸음이란 게, 정말 눈덩이가 하늘 꼭대기에서 땅바닥으로 자유 낙하하는 속도보다 느려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화란 걸 나눌 수 있을 만한 거리가 되자, 그녀는 먼저, 그러니까 놀랍게도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니?”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 저, 그러니까, 아 씨, 몰라, 이봐요. 이제 어떡하죠?”
“뭘 말야?”
“그… 어떡하냐구요. 근방에 사람이라곤 없고, 이젠 삼촌도 없으니 먹을 거나 땔감이나 뭐 하나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날이 좋아지고는 있지만 이대론 얼마 못 가요. 그, 그러니까 이제 믿을 사람이라곤 다…그쪽밖에 없어서 그러는데요, 혹시 운전할 줄 알아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춤 출 줄은 알아.”
“그놈의 춤! 춤은 그만 춰도 돼요. 삼촌이 죽었으니까 이제 기타 칠 사람도 없다구요.”
“너 기타 못 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울화통이 치밀었다.
“그래요, 못해요! 그동안 즐거웠죠? 나, 나 할 줄 아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어요. 삼촌 없었으면 10년은커녕 하루도 못 버티고 죽어버렸을걸요? 삼촌이 기껏 남겨준 이런 차도 운전을 못해서 그냥 버리게 생겼다구요! 아, 진짜, 미치겠네. 왜, 왜, 나만 살아남은 건데요? 나보다 훨씬 쓸모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제는 못살아요. 이제 다 죽는다구요. 댁한테도 정말 미안하지만, 이제 쫓아오지 말아요. 난 아무 것도 못해줘요. 아무 것도… 왜 이렇게 된 거죠? 무슨 의미라도 있는 거에요? 정말 나밖엔… 나밖엔 아무도 없어요?”
울어보는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팔뚝으로 눈가를 훔쳤다. 이윽고 뒤돌아서 어디든 도망가려는 찰나, 양쪽 겨드랑이에서 불쑥 그녀의 팔이 솟아나와 날 붙잡았다.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어쩔 수 없는 거야.”
“뭐가…요?”
“전부 다. 처음부터 어쩔 수 없는 거였어. 삼촌도 언젠가는 죽을 거였고, 언젠가는 니 차도 가져야 했고, 언젠가는 아무도 없는 곳에 버려지기도 해야 되고…”
나는 숨을 멈췄다. 그녀는 나를 꼭 붙잡은 채 빙글 돌아 내 앞으로 왔다. 손을 들어 내 고개를 들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처음 보는 눈동자가 거기 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려 활짝, 미소 지었다.
“어디로 가고 싶은데?”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졌다.
“어… 그, 그러니까…”
“어디든 가자. 같이 갈게.”
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 유달리 맑았다. 하얗게 빛나는 것들이 여기저기에 차분히 쌓인 채 녹고 있었다. 그러니까 곧 봄이 올 것이다. 봄이 오지 않더라도, 적어도 이 지긋지긋한 겨울은 끝날 것처럼 보인다.
나는 바벨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낯익은 거리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