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맹렬히 쓰다가 잠들고 났더니 어쩐지 힘이 나질 않네요. 뭐 이렇게 길어!
- 뭐 안올려도 상관없긴 한데 "소설" 이 너무 비어보여서... 쩝
- 소개하자면? 상당히 뻔한 구도와 컨셉의 SF + 변태적 취향의 연애소설 뽕짝입니다.
- 자세한 변명은 다 쓰고 나서. 뭐 부담없이 쓴 글이니 노는 마음으로 읽으면 됩니다. (언젠 아니었나)
[Transformer Ver.1.0]
1.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의 주인공은 강지운이란 공대생이다.
그에 대한 인상을 짧게 정리하자면,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 있는, 세상 어디에나 널려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확실하게 말해두건대 그는 이 이야기의 진정 재미난 본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이 이야기는 변태적이고, 초현실적이고, 추상적이며, 한편으로는 철학적이기도 하지만, 강지운은 일상의 어느 부분에서도 이 모든 면과 상당부분 거리를 둔 채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용했고, 침착했고, 계획적이었으며, 남들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가십거리를 생산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그가 남들과 유별나게 다른 면을 갖고 있다면 딱 하나, 퍽이나 유능한 프로그래머라는 점 뿐이었다. 그는 컴공과에 재학 중이다. 그렇다면 그의 이런 면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 볼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에겐 아버지가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보다 몇 배는 천재적인 과학자이자, 발명가였다. 아무래도 이쪽이 좀 더 재밌을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강지운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전에 우선 강지운의 아버지부터 소개하는 편이 좋겠다.
앞서 말했듯 강지운의 아버지는 천재적인 과학자이자, 발명가였다. 그는 특히 프로그래밍에 능했다. 컴퓨터는커녕 계산기 구경도 하기 힘들었던 동네에 태어난 그가 종국에는 OS이론에 능통한 걸출한 전문 프로그래머로 자라났으니,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케이스였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그를 ‘국운을 빛낸’ 영웅으로 추켜 세우며 가슴에 순금 훈장이라도 하나쯤 얹어 주었을까? 아니. 애석하게도 그가 천재 프로그래머라는 건 오직 몇몇 사람만이 비밀스럽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전쟁 통에 부모님을 일찍 여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행운이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돈이 없어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이후에는 그 시대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치열한 생존경쟁에 뛰어들어 하염없이 먼지가 날리는 길바닥에 운명을 걸어야 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시쳇말로 ‘안 해본 일이 없는’ 그에게 도대체 무슨 시간이 주어져서 컴퓨터를 공부했으며, 심지어는 위대한 학자로 자라날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그 시절의 많은 일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어쨌든 우리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들은 그가 마흔 살이 되던 해를 살펴보면 거의 알 수 있다. 그 해에, 불혹을 맞이한 그는 서울에 살고 있었고 컴퓨터 학원 강사와 주산학원 강사라는 두 직장은 물론 심지어 결혼하는 데에도 성공해서 우리의 주인공인 강지운을 낳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집 지하에 열 평 남짓한 실험실을 갖추어 놓고 학원과 길거리에서 온갖 잡동사니들을 끌어와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재료는 망가진 컴퓨터, 버려진 자전거, 폐차 직전의 자동차 부속들, 깨진 유리 조각, 셀 수 없이 많은 기어들과 전구, 계산기, 태양광 감지기와 축전지, 그리고 피복전선 등등이었다. 감각이 둔감한 사람이라면 그 모든 것이 그저 고철더미에 불과하다고 여기겠지만, 기계에 대해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그 고철더미에 신경질적으로 뒤틀린 형태의 정교한 회로가 모세혈관처럼 덕지덕지 자라나가는 것을 발견했을 일이다. 배배 꼬인 모세혈관의 끝자락에 입출력단자가 완성되자, 우리의 천재 공학자는 어디선가 새 컴퓨터를 들고 와 지하실의 한가운데에 설치하고 입력단자를 연결시켰다. 컴퓨터가 덜덜거리며 작동했고, 안절부절못하며 지하실을 서성되던 그는 이윽고 모니터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 희열에 가득 찬 얼굴로 만세를 불렀다. Transformer 알파 버전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것은 단순히 기적적으로 작동하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했다. 강지운의 아버지가 정확히 무엇을 노렸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 기계가 어떤 효과를 발휘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선 조금 더 가까운 과거를 살펴야 할 것 같다.
이야기는 강지운이 12살 되던 해에 또 다시 집중되어 있다. 아, 물론 12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직장을 잃었고, 많이 괴팍해졌으며,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고 지하실에 처박혀 있을 때가 많았다. 아침이면 혼자 잠자리에서 일어난 어머니는 습관처럼 지하실 문을 열었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찬 바닥이나 책상에 엎어져 새우 자세로 자고 있던지 독사 같은 눈으로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땅 위로 올라오는 날이면 그 독기는 종종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어린 지운은 아버지가 뭘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보다는 어머니를 너무나 못살게 구는 아버지를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라면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어머니가 기뻐할 일만 할 거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12살 되던 해 가을의 토요일 밤, 지운은 기묘한 꿈을 하나 꾸었다.
꿈속에서 지운은 알 수 없는 공간에 있었다. 눈을 떴지만 사방은 뿌연 안개 같은 것이 가득 매우고 있었다. 자신이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안개는 하얀 빛이었는데, 아주 멀리서 붉은 빛이 가끔씩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불빛을 향해 가려던 지운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의 입에는 수건이 물려 있었고 양 손과 발은 노끈으로 질끈 묶인 상태였다. 겁에 질린 지운은 발버둥쳤다.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지운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안개를 뚫고 나타난 작은 개미떼 같은 것들이 자신의 발끝을 타고 올라 온 몸을 뒤덮어 버리는 장면이었다. 견딜 수 없이 간지럽고 따가웠다. 소리를 지르며 정신없이 몸을 뒤흔들던 그는 어느 순간 몸이 자유로워진 것을 느꼈으며 그와 동시에 앞으로 쓰러졌다. 안개와 개미떼가 몸에서 뿜어져 나와 차가운 공기 사이로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쓰린 무릎과 팔꿈치를 부비며 자리에서 일어난 지운이 제일 처음 본 것은 거울이었다. 거울 속에는 아버지의 얼굴이 있었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독기 어린 눈동자가.
지운은 더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무의식은 이후의 일들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훗날 [Tranformer ver.1.0] 사용을 앞두고 제일 먼저 자신의 꿈을 분석하고자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지운의 아버지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많은 것을 기록하거나 누군가에게 말하기 전에 - 그러니까 지운이 꿈을 꾸었던 그 해 겨울에 지하실에서 자취를 감췄다. 지운은 그렇게 믿었다. 아버지는 늘 지하실에만 있었는데, 어느 날 문을 열어봤을 때 그 곳에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는 그보다 두 달 먼저 사라졌다. 부모님이 모두 사라진 이후 지운은 지하실 문과 현관을 활짝 연 채로 텅 빈 집에 혼자 앉아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이틀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자꾸만 꿈이 떠올랐다. 구체적인 사실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느껴지는 것은 그냥 막연한 죄책감 뿐. 그냥 무언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 같았다. 어린 지운은 지하실과 현관문을 열고 그 안팎에서 풍겨 나오는 지독한 한기를 맡으며 꿈의 기억과, 그 책임을 잊어보려 노력했을 것이다.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은 지하실 문을 닫고 무거운 자물쇠를 매단 후 열쇠를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버린 일이었다. 지운은 12살이었고, 어리면서도 어리지 않았다. 적어도 그 아이는 지킬박사가 하이드씨를 왜 쫓아낼 수 없었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언제나 단 한 순간이다. 악을 받아들이려는 단 한 순간의 유혹을 그 뿌리부터 말끔히 제거할 수만 있다면, 지킬은 불가피하게라도 자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운이 지하실을 영구 폐쇄하고 벽에 시멘트를 발라버린 후 그 아래의 고철더미를 영원히 가루로 만들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 나이에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래서라고 믿었다.
뭐, 서두는 이쯤이면 충분할 것 같다. 이젠 본론을 꺼내도 좋겠다.
2.
지운의 부모님이 실종되자, 유일한 피붙이였던 외할머니가 지운을 맡아 키우게 되었다. 지운의 외할머니는 어느덧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적어도 어린 나이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지운을 따스하게 감쌀 수는 있는 분이었다. 지운이 외할머니를 따라 경북의 외딴 시골로 내려간 지 2년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사망처리가 완료됐고, 지운은 몇백만원 남짓한 부모님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물론, 어렸을 적 살던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외할머니는 중학교에 갓 진학한 지운에게 모든 재산권을 일임하고 일절 간섭하는 바가 없었다. 아마도 그네는 스스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 동안 지운에게 어떤 삶의 지혜도 제대로 물려줄 수 없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잠시나마 짐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더라도, 오히려 그 짧은 도움이 홀로 남을 수 밖에 없을 지운에겐 더 큰 독이 될 일이었다.
예측은 정확했다. 지운이 외할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년뿐이었다. 지운의 성격에 어딘가 특별한 것이 남았다면 아마도 그 이후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까지 4, 5년간의 그림자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지운은 과묵하고 침착하며 치밀해야 했으며, 때때로 쾌활하고 덤벙대며 방종을 즐겨야 했다. 두 얼굴 사이의 이상한 괴리감은 기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지운은 여느 사춘기 소년들처럼 그 사이에서 마냥 괴로워하고 있을 만큼 여유 있지 않았다. 텅 빈 집에 들어와 홀로 밥을 짓고 저녁을 차릴 때면 지운은 늘 지하실과 기계장치의 환영을 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니었다. 지하실과 기계장치였다. 지운은 어렴풋하게나마, 제 삶의 종착점 혹은 시작점이 그 곳 어딘가가 될 거란 걸 느끼고 있었다. 그는 돌아가야만 했고, 그래서 고3을 마치며 옛 집 근처에 있던 화진대학교 공대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첫 학기 개강 직전, 옷가지를 싸 들고 옛 집에 도착해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지하실 문을 부수고 그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었다. 떠나 있던 세월만큼 먼지가 수북이 쌓였다는 걸 제하자면 지하실은 지운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어둡고, 차갑고, 기괴했으며, 뿌옇고, 독기서린 기계더미 앞에서 지운은 한참을 서 있었다. 다행인지, 잊어버린 기억은 그저 가라앉은 채로 다시는 부상하지 않았다. 지운에게 아버지가 만들고 떠난 기계장치는 그저 뭣에 쓰는 물건인지를 알 수 없는 박물관의 유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운은 그 유물의 연구에 착수했다.
이상한 일에 매달려 시간을 허비했지만, 장학금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학교 성적은 좋게 나오는 편이었다. 하지만 대인관계는 별로 좋은 편이 못됐다. 지운은 늘 붉게 충혈된 눈을 크게 뜬 채 잽싼 여우처럼 학교 곳곳에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안개처럼 사라지는 학생일 뿐이었다. 학기 초 놀자판 분위기에 휩쓸려 지운의 주변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여름방학을 지나고 나자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지운을 그나마 또렷이 기억하는 몇 명은 OS프로그래밍과 서버구축에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지운이 수시로 그들에게 나타나 목적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진 뒤 만족할 만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대화를 나누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몇 명도 유령 같은 지운의 목적을 궁금해 하거나 나아가 함께하자고 말하지는 않았다. 따로 약속을 하거나 암묵적인 동의가 있지도 않았을 텐데, 그렇게 두 학기가 지나가는 동안 만난 이들이 모두 그에게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막상 지운 본인이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깜짝 놀란 것도 그다지 무리는 아니었다.
“재밌네. 그런데 선배,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질문을 받은 것은 3월 말의 어느 날 저녁, 대담하게 질문을 던진 그녀의 이름은 유수린이었다. 재수해서 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됐던지라 지운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운은 신입생 중에 자신의 고민을 풀어줄 사람을 찾던 중이었다. 두 학기 동안 학교 내에서 질문 공세를 던지고 다닌 지운이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누구와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소통장애를 동반한 좌절과 무력감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기계와 프로그램이 자신의 능력은 물론 아직 이 세계 어떤 이의 능력으로도 해석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던 것이다.
지운은 수린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 안에서 희미하게 가능성 같은 것이 읽히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응? 아… 아, 그, 내가 요새 어떤 프로그램 하나를 연구하는 중인데, 그게 일종의 OS같아서 말야. 기… 기계를 움직이는 건데, 기계가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 일단 알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에… 뭐, 정확히 말하기는 좀 어렵네.”
수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려운 일인가 보네. 그런 일은 왜 하는데. 알바야? 서버지원?”
“이렇게 어려운 알바면 당장 때려치웠지.”
“하긴… 기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건지 OS를 역추적해서 알아내야 한다, 이 말이지 그러니까? 재밌겠는데? 말하자면, 음, 일종의 시험문제 같은 거야?”
“문제… 뭐, 그런 걸 수도 있고.”
문답은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수린은 지운의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하기보다는 그 목적에 대한 궁금증을 더 크게 키워가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질문에 지운은 최대한 성의껏 대답하면서도 최대한 애매하게 그 실체를 가리느라 진땀을 뺐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 날 저녁의 문답이 지운의 연구에 크게 보탬이 되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지운은 꼬박 1년 만에 드디어 희망의 빛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연구에 매달린 후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었다.
지운 자신의 독단과는 달리 세상에는 분명히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작은 대학에서만 머무를 게 아니라,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면 아예 이 기계더미의 비밀을 단번에 밝혀 줄 사람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운은 아예 프로그램 사본과 기계더미의 설계도 및 사진을 인터넷에 유포하거나 위키를 제작하는 것이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아버지는 괴물을 만들었고, 세상에는 괴물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한없이 많다. 그 사람들은 모니터 앞에 괴물이 펼쳐지는 순간 미친개처럼 달려들어 방대한 양의 데이터베이스를 완성해 버릴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후의 연구는 훨씬 수월할 것이고 어쩌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해결의 열쇠가 나올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사냥을 쉽게 하기 위해 사냥개를 푸는 일과도 같다.
하지만 프로그램 사본을 만들고 설계도 초안을 배포용으로 작성하다 잠이 든 지운은 다음날 새벽 모든 계획을 철회했다. 한층 가벼워진 현실의 무게를 뚫고 12살 때의 꿈이 부상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무서운 죄의 기억이었다. 지운은 해가 뜰 때까지 지하실 컴퓨터 앞에 앉아 멍청히 기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으면, 두 눈을 뽑아버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가 죽어버렸으면. 이 기계도 없고 세상도 없는 어느 곳에서 외롭게 방랑하다가 죽었으면… 열 평 지하실을 가득 채운 기계더미는 그 육중한 자태 그대로 지운의 기억을 억누르고 있었다. 아무와도 공유할 수 없다. 비록 남들이 도움을 줄 수 있더라도, 아버지의 유산은 지운 자신이 오롯이 떠안고 가야 할 십자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맘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3.
유수린은 여학생이다. 그 드물다는 공대의 여대생이다. 그녀는 항상 동기, 선배, 타과 학생을 위시한 수많은 남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다녔다. 보통은 부담스러울만한 그런 상황 앞에서도 수린은 대단히 당당했다. 특히 지운을 대하는 태도가 그랬다. 어두웠던 기억을 떠올린 이후 지운은 의도적으로 수린을 피했지만 그녀는 이런 지운의 태도를 일종의 도전 정도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처음보다 더 적극적이고 집요하게 지운의 연구성과와 연구목적을 캐물었다. 학교를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것이 특기였던 지운도 수린 앞에선 선무당이라도 만난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기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미 반쯤은 그녀와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관계가 이어지자 지운은 자신도 모르게 학교에 갈 때마다 그날그날의 연구 성과나 보고할 ‘꺼리’ 들을 챙기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수린의 의견을 경청했다.
하지만 골치 아픈 이야기는 아무리 재밌더라도 일단은 제쳐두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들 사이에 연구 이야기보다 사적인 잡담들 - 그러니까 연예인이라던가, 최근 개봉한 영화라던가, 읽을 만한 책이나 들을 만한 음악 따위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 - 의 농도가 짙어진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학교 공부는 학교에서 다 끝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허겁지겁 밥만 챙겨먹고 연구에 몰두하기 바빴던 지운은 어느 새 TV와 영화관, 라디오와 공연장 앞에 있는 시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지하실과 기계더미의 어두운 그림자는 물론이고, 잔인한 죄책감도 그다지 자주 기억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 간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수린이 친하게 지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같은 과 동기들과 선배들, 학교당국, 세상사는 이야기 같은 것으로 흘렀는데, 처세술이 좋을 뿐 그다지 사회적인 인간이 아니었던 지운은 이런 화제에 있어선 별로 할 말이 없었지만 남 말을 잠자코 듣는 것만은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 별 문제는 없어보였다. 수린은 쾌활하고 명랑하면서도 호기심 많은 여대생이었으며 지운은 과묵하고 잘 웃지만 비밀이 많은 대학생일 뿐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수린은 지운보다 먼저 시험이 끝난 참이었는데,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지운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매점에서 캔커피 두 잔을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던 와중에, 수린이 갑자기 말했다.
“선배, 친구 없지?”
지운은 눈을 깜빡였다. 수린이 다시 말했다.
“선배 동기들 중에 선배에 대해서 좋게 말하는 사람이 없더라구. 아니, 좋은 말도 안 한다고 해야 되나? 그냥 학점 잘 나오는 걸 보니 머리는 좋은 것 같은데 항상 이상한 일에만 매달려 있다고… 그러고 나오는 말이야 똑같지. ‘잘 모르겠어.’ 선배, 사람 만나는 거 싫어해?”
뭐라고 말해야 하나. 지운은 한 번도 자신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변명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도 별로 없었다. 누구나 필요한 사람은 만나고 불필요한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것 아닌가. 의무감 때문에 나가야만 하는 자리를 일부러 피할 만큼 노련하지 않은 그도 아니었다. 다만 ‘살갑게 굴지 않는다’ 는 것 뿐.
“그냥… 맘에 맞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야.”
“맘에 맞지 않는 사람은 그냥 안 만나는 거야? 맘이 그렇게 돼? 무섭네.”
“뭐, 그렇게 되나? 하지만 어차피 다들 그러고 사는 거잖아. 나 싫다는 사람 억지로 만날 필요도 없고, 내가 만나기 싫은 사람 억지로 만날 필요도 없고… 현실적으로 문제가 될 경우에야 말이 다르겠지만.”
“그럼 나는 어떤데?”
지운은 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 조금은 무서웠다 -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는 어떠냐고? 물론 같이 영화도 봐 주고, 이야기도 해 주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전달해 주고, 다른 무엇보다 연구 성과에 대해서 코멘트를 해 주고 있으니 사람이니 고마운 사람이지. 그런데 나는 너를 왜 만나는 거지? 어차피 세상일은 몰라도 상관없어. 연구도 혼자 하면 그만이고. 네가 코멘트를 해 준다고 해서 특별히 연구에 진전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더구나 그건 다른 사람이랑 나눌 수 있는 짐도 아냐. 결국엔 내가 혼자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그런데…
지운의 눈앞에 꿈속의 영상이 확 스치고 지나갔다.
어머니?
“너도 내가 싫으면 안 만나도 돼. 괜찮으니까.”
지운은 수린의 얼굴이 확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자기 앞에 놓인 캔을 들고 자리를 일어선 그는 딴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부해야겠다. 가볼게.” 큰 걸음으로 매점을 빠져나와 도서관으로 돌아가며,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 버린 건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다시 떠오른 잔인한 기억을 억누르려고 온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을 뿐이다. 열람실 문을 열고 빽빽하게 놓인 좌석들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서울에 돌아와 다시 지하실에 들어갔던 날을 떠올렸다. 견딜 수 없는 한기가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열람실 밖으로 나와, 벽에 기댄 채로 한참동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지운이 수린을 다시 만난 것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예의 밝은 미소로 지운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기 옆에 서 있던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줬다. 지운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남자였다. 이름이 신정혁이라고 했다. 지운과 수린보다는 한 살 아래였다.
4.
지운은 다음 학기 휴학계를 제출했다. 연구가 끝날 때까지, 할 수 있는 한 계속 쉴 예정이었다. 학교에 나갈 이유가 없었다. 여태껏 그가 학교에 나갔던 이유는 학과공부가 연구에 적게나마 도움을 주었기 때문인데, 3학기를 마친 지금 학과공부는 오히려 그에게 방해만 될 뿐이었다. 지운은 군대에서 억지로 끌고 가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은 거의 무한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한한 시간을 지하실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수린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만날 수도 없었다. 지운은 항상 그녀를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수린을 떠올릴 때가 가끔 있었다. 습관처럼 시간이 되었을 때 TV앞에 앉는 자신을 발견하거나, 라디오를 켜 놓지 않고는 잠들지 못할 때였다. 지독한 불면의 시간 앞에서 그는 관계의 무상함을 되뇌어서 약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사실 자신이 별로 잃은 게 없다는 사실을 되새겨 힘을 얻고자 했다. 그 첫 걸음으로 지운은 일단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해 찬장 윗 칸에 넣어두고 열쇠로 잠근 다음 열쇠를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이로서 또 하나의 하이드가 사라졌다. 지운은 만족했다.
이제 연구에는 예전처럼 의문점이 많이 발견되지도 않았고 누군가의 코멘트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프로그램을 이루는 상당수의 함수와 알고리듬이 해석단계 혹은 해석 직전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으며 그 ‘목적’ 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 실험적으로 가동해 볼 수도 있었다. 다만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지운이 조금만 더 무계획적인 인간이었더라면 당장 스위치를 당기는 것만으로 모든 의문점을 해소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무거운 기억과, 그 자신의 치밀함이 지운을 억제했다. 그는 참고 또 참았다. 프로그램을 알아갈수록, 함부로 실험해서는 안 되는 물건이라는 점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버지의 기계는 세계 자체를 거대한 OS로 상정하고 그 구조에 침투해 들어가는 일종의 바이러스, 혹은 해킹 툴과 같은 물건이었으며, 지운이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는 기계의 일차적인 목적은 파일의 rename 이었다. 그렇지만 단지 그 목적에 한정시켜 제작한 괴물은 분명 아니었다. 기계의 목적은 일단 '이름 바꾸기‘ 에 한정되어 있지만 지하실 기계를 구동하는 모듈은 단지 프로그램을 이루는 하나의 축에 불과했다. 틀림없이, 아버지의 목적은 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될 수 있었다. 예컨대 가장 단순한 생각은 세상을 해킹하여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운은 그런 기계를 만드는 데에 얼마나 엄청난 계산이 필요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과연 목표를 이루고 사라진 걸까. 그럼 지금 그는 세상의 신이 된 걸까? 최종목표는 역시 아버지를 추적하는 것이 될 테지만, 지운은 일단 기계의 목적을 좀 더 정확히 알아내고,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에 자신의 목표점을 두었다. 문제는 'rename' 의 용도를 좀 더 정확히 밝혀내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거대한 발명품의 일부로서 조작되는 실험작이고 초기작이니만큼, 입력되는 데이터에도 한도가 있을 것이고 출력물에도 한도가 있을 것이다.
지운이 입/출력물의 성격을 연구하고 있을 때, 누군가 집의 현관을 두들겼다. 지하실에 있던 지운은 한참동안이나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수린이 집 앞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를 기다렸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굉장히 흥분한 표정이었을 뿐.
“왜… 왠일이야?”
눈썹을 곤두세운 수린은 입을 열었다가 긴 한숨과 함께 아무 말 없이 닫았다. 한꺼번에 많은 말이 쏟아져 나오려는 모양이었다.
“일단, 좀 들어가도 돼?”
“지금? 야,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지금은…”
“핸드폰이 두 달째 불통인 사람하고 어떻게 연락을 하라는 거야! 내가 바본줄 알아? 선배, 아니 강지운! 넌… 하아, 얘기 좀 해.”
“얘기라니… 무슨 얘길 하자는 거야, 갑자기?”
“갑자기? 갑자기라고? 두 달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다가 살았는지, 살았다가 죽었는지! 그걸 좀 얘기하자는 거잖아요, 강지운 선배님? 잔소리 말고 들어가. 넌 할 얘기 없는지 몰라도 난 정말 많거든. 그 날, 그 얘기… 그렇게 끝내는 게 아니었잖아. 응?”
수린은 지운을 밀치고 집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가 신발을 벗어 던졌다. 지운은 난감한 표정으로 수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관을 지나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지하실이다. 수린은 ‘지하실’ 에 정확히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지운이 1년 넘게 매달렸던 ‘그 무언가’ 가 바로 거기 있다는 것만은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걸 보여줘도 괜찮을까? 지운은 현관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수린의 눈빛을 멍청히 바라보며 그 안에 아직도 3월에 읽었던 그 가능성이 있는 건지 생각해 보았다.
다만 그 결과가 무엇이었든 간에 수린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어떤 생각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수린은 유령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지운에게 날선 기시감을 느꼈다. 처음 만났을 때, 그 눈빛. 몇 달 동안 함께하면서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던 느낌. 그것은 아무리 지워주려고 그렇게 노력해도 끝내 없애버릴 수 없었던, 괴물 같이 거대한 환영이었다.
지운은 수린에게 큰 걸음으로 걸어가 손목을 꽉 붙잡았다.
“보여줄게.”
지운의 눈이 머릿속으로 한가득 파고들었다. 수린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뭘? 뭘 보여준다는 거야?”
“내가 너한테 끝까지 숨겼던 거. 내가 1년 동안, 아니… 평생 동안 매달려왔던 거. 너한테는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아. 이제 보여줄게. 단… 하나만 약속해. 이건 무서운 거야. 설명을 듣자마자 도망치고 싶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러지 마. 나한테는 제발 그러지 마. 이 괴물은 내 평생의 짐이야. 내가 해결해야 하고 내가 풀어내야 할 수수께끼이기도 하고. 그래서, 난 한 번도 약해진 적이 없어.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네가 자꾸 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뭘…”
“날 약해지게 했으면, 그만큼의 책임을 져 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할 수 있겠어? 모든 걸 본 다음에, 나랑 같이 연구에 매달리고, 같이 해결해서, 같이 기뻐할 수 있겠어?”
긴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지운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말한다면, 어디까지 말하면 좋은 걸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실종부터? 아니면, 단지 알아낸 것 까지만? 모든 걸 다 말한다면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중간부터 이야기한다면 이야기가 제대로 이어지질 않는다. 하지만 모든 걸 말한다면 무엇보다 그 잔인한 꿈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할 수도 있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좋을까.
“좋아.”
대답 한 마디에 머릿속 생각의 끈이 엉켜버리는 걸 느끼면서도 지운은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썼다. 기뻐하기엔 아직 이르다. 기뻐했다간 모든 다짐이 무너지고 만다. 간신히 견뎌냈던 기억들이 돌이킬 수 없는 무게로 증강되었을 때 얼마나 더 극심한 고통을 느낄지 지운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건 무서운 일이다. 나누어서 반이 된 슬픔의 무게에 익숙해질 무렵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짐을 떠넘기고 떠나버리는 게 사람이니까. 지운은 입술을 악물고 수린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따라와.”
지하실까지 가는 길이 너무 짧았다. 다시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게 이토록 아쉬울 수가 없었다. 지운은 열려있는 지하실 문을 한 손으로 가리키며 수린의 손목을 놓았다. “저기야.” 수린은 잠시 지운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걸어 지하실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실 계단 중간쯤에 이르자, 전구가 환하게 켜진 지하실 가득 쌓여 있는 고철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수린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가, 복잡하게 연결되어있는 전선들과 지하실 한가운데에 켜져 있는 제어 컴퓨터를 발견한 순간 지운을 돌아봤다. 지운은 빠른 걸음으로 수린을 앞질러 지하실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지운은 컴퓨터 앞에 앉으며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내가 항상 말했던 ‘기계’. 그리고 저 컴퓨터 안에 설치돼 있는 게 OS구. 네 덕분에 대부분 의문은 풀렸고, 연락이 없었던 두 달 동안은 막바지 연구 중이었어. 이미 작동은 시킬 수 있고 결과도 대강은 예상이 가는데, 아무래도 겁이 나서 실험은 하지 못하는 중이었지. 기다려봐. 사실 너한테 말하고 싶은 게 하나 있긴 했는데, 이 모듈 작동에서 변수가…”
“겨우 이거야?”
지운은 고개를 들었다. 지하실 중턱에 멈춰 선 수린의 얼굴은 불빛 밖에 있었다. 표정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지운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겨우… 라니?”
“겨우 이것 때문에 평생을 고민한 거야? 이딴 고철더미를 연구한답시고 친구도, 사람도 다 버리고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던 거야? 이런 게 네가 평생을 안고 갈 짐이었어?”
짧은 침묵이 흘렀다. 지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일까? 함께 하겠다는 걸까? 아니면 그럴 수 없다는 걸까? ‘겨우’ 이 정도라고 했으니, 쉽게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뜻일까? 세상 어디엔가 비슷한 기계가 또 있는 걸까? 그럼 난 쓸데도 없는 고민을…
“당장 이 고철더미들 부숴버리고 지하실도 없애버려.”
수린의 차가운 한마디가 지운의 이마팍에 꽂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건 우리 아버지가 만든 거야. 우리 아버지가 이것 때문에 사라졌어. 우리 어머니도 이것 때문에 없어졌고, 거기에 난, 내 꿈은…”
“이 병신아, 그러니까 부숴버리라는 거 아냐!”
지운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린은 난간을 기댄 채 주위를 둘러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많은 말이 쏟아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차분히,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얘기하자. 아까 한 약속 기억하지?”
“약속? 넌, 정말… 나더러 너랑 같이 이걸 연구해서 너랑 같이 기뻐하라고? 이 고철더미가 가진 성능을 알아내서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데? 이딴 걸 알아내는 게 왜 네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거야? 좋아. 난, 너나 너의 부모님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해. 네가 말하질 않았으니까. 하지만 거기에 얼마나 엄청난 비밀이 있던 간에, 이 고철덩이의 비밀을 결국 밝혀낸다고 해서 나아질 건 아무 것도 없어. 내 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너는 이 지하실이 아니라 저 밖에서 살아야 된다고!”
“그래서, 그러니까… 약속은 못 지키겠다는 거지?”
“강지운!”
지운의 목이 울컥했다.
“하나도 이해 못 할 거면서 왜 약속했는데?”
“누가 누굴 이해 못한다는 거야… 강지운. 너 지금 정상이 아냐. 나랑 같이 나가자. 응? 이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야. 내가 하는 말을 믿어.”
“누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야! 난 언제나 정상이었고 지금도 정신 말짱해. 그래서 아까 우리가 바깥에서 한 약속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고. 1분 전에 한 약속을 이렇게 금방 까먹어버리는 네가 비정상 아냐? 너, 넌… 안 돼. 넌 아무 데도 못 가. 나랑 같이 있어야 돼. 너밖에 없어. 네가 날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해하게 만들겠어. 처음부터 다 얘기해 줄게. 우리 가족이 여기 살던 그 때부터, 아버지가 이걸 만들던 그 때부터, 내 꿈도… 기억할 수 있는 건 다 해 줄 테니까, 제발, 제발 여기 있어. 부탁이야.”
수린은 고개를 저었다. 지운의 몸이 더 세차게 떨렸다.
“내가 필요하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이 고철더미들을 당장 부숴버리고 지하실을 없애. 그게 힘들면 그냥 이사를 가. 이 엿같은 것들을 다시는 떠올리지 마. 떠올릴 수도 없는 곳으로 떠나 버려. 그럴 수 있겠어?”
지운이 꽥 소리쳤다.
“거지같은 소리 집어 치워!”
“강지운, 너…!”
“꺼져! 꺼져버리라고! 너한테 속은 게 잘못이야. 뭔가 다 이해해 줄 것처럼 웃었다고 해서 이런 걸 다 얘기해 버리다니,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그래,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친 사람 왜 만나고 그러냐? 재밌어 보여? 내가 이런 기계랑 씨름하는 게 그냥 장난치는 것처럼 보여! …됐어. 어차피 혼자 할 일이야. 처음부터 혼자 할 일이었어. 귀찮게 굴어서 미안하다, 유수린. 앞으로 영원히 보지 말자.”
지운은 제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판을 두들기며 그는, 무언가 넘볼 수 없는 작업에 매달리는 사람을 힘껏 연기하고 있었다. 그런 지운을 바라보며, 수린은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하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지운은 기다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발자국 소리도 없었는데, 계단 중턱에 있었던 수린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지운은 자판을 적시는 눈물을 남의 것처럼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연구에도 더 미친 듯이 매달리려고 애썼다. 자정이 넘을 무렵이 되어서야 조금은 안정이 된 것 같았다. 지운은 맥이 다 풀려 버린 다리를 끌고 지하실 계단을 올라가다가, 그만 거실에 켜져 있는 TV소리를 듣고 말았다. 지운은 계단 중턱에 주저앉았고, 목이 쉬도록 울다가 쓰러져 잠들었다.
다음날 새벽, 지하실에서 깨어난 지운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