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그저께까지도 뭘 쓸까, 고민이 많았는데 문득 삘받는 게 있어서 다행.
덕택에 취침 시간은 늦었지만 모처럼 만족스러운 놈이 나온 듯...
- 생각해보니 처음으로 도전해 보는 본격 연애 소설(?)이네요.
“오빠. 할 말 있어.”
두 걸음 바깥에서 그녀가 말한다. 만난 지 한 시간 만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말을 했다는 사실보다는 내가 씌워주고 있던 우산 테두리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더 놀란다.
분명히 우리는 만나자마자 팔짱을 낀 채로 함께 걸었을 것이다. 습관처럼. 그것은 지하철에 탔을 때 안쪽 좌석을 그녀에게 양보하는 것처럼, 운전 중에 급브레이크를 밟게 되면 오른손으로 그녀의 상반신을 받쳐주는 것처럼, 어쩌면 장마철에 비가 오는 것처럼, 6월 중순이면 북태평양고기압이 발달하여 오호츠크해고기압과 뚜렷한 전선을 형성하고 한반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이곳저곳에 집중호우를 뿌려서 차가 막히고 저지대는 침수하여 아홉시 뉴스가 끝날 무렵에는 비옷 입은 미녀 캐스터가 반드시 등장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조용히 내리는 빗속에 우산 없이 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장마철 뉴스가 끝날 무렵에야 비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평범한 시청자만큼, 딱 그만큼, 놀란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어서 우산 속으로 들어와서 다시 팔짱을 끼고 걷자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녀는 할 말이 있다고 했으니까. 한 달 만에 만난 남자친구와 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다가, 별안간 우산 밖으로 뛰쳐나가 내리는 빗속에서 젖어버리기를 택한 스물여덟 먹은 여자가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비 내리는 저녁, 올림픽 공원은 연인들이 주고 받을만한 좋은 말이나 나쁜 말, 어느 쪽에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로맨틱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나는 두 걸음 밖에 선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한없이 불안해진다. 앞머리를 타고 뺨으로 흘러든 빗물이 야릇한 곡선으로 휘어 입술에 머금어진다. 얼굴 가득 낮은 곳으로 물길이 퍼지며, 화장이 번진다. 길게 세운 속눈썹 끝에는 물방울들이 맺힌다. 그녀에게서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 그녀가 울고 있는 건지, 단지 비를 맞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연다.
“우리 헤어져.”
나는 그녀가 내뱉은 말, 지금 나를 둘러싼 풍경, 내 우산을 때리는 소음들, 그녀에게로 떨어져서 그녀에게서 흘러내리는 온갖 물방울들, 희미하게 번지는 가로등 불빛과 잔잔하게 진동하는 호수의 표면까지도 어디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순식간에 미래를 보고 돌아온 사람처럼 허탈해지고 만다. 세상의 모든 국면이 우리 둘 사이를 휘감아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길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래, 우리는 결국 햇살 눈이 부신 날에 이별하는 사람들은 못 되겠구나. 작은 표정까지 숨겨버린 그녀는 이런 결말에 만족할까?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내가 할 수 있는 말들을 정리해 본다. “내가 잘할게.” “…헤어져.”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내 MP3플레이어에는 마침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도 들어있다. 쓴웃음을 지으며 뒤돌아선 나는 노래를 들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집으로 돌아가다가 지하철에서 엉엉 울 것이다.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날 위로해주어야 하니 이왕이면 경로석에 앉는 편이 좋겠다. 할머니는 반드시 이 노래를 불러야 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연분홍 치마도 산제비도 성황당도 본 적 없는 서울 촌놈인 나는 그저 피고 지는 무수한 색의 꽃만 머릿속에 그리면서 한없이 황홀하고 먹먹한 기분에 빠져들 것이다. 아아아. 내 인생에 또 한 번의 봄날도 이렇게 서럽게 가버렸구나, 하고. 이별은 성스럽고 우아하게 포장되어, 별 무리 없는 마무리 공정에 들어간다.
하지만 난 그러기가 싫다.
“왜?”
그녀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더니, 짤막하게 말한다.
“오빤 너무 변했어.”
변해? 변하다니? 내가 무슨 변신 로봇이냐? 살이 찐 것도 아니고, 빠진 것도 아니고,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수술을 해서 안경을 벗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앉은뱅이가 되거나 성불구자가 된 것도 아닌데, 직장을 그만두지도 않았고 이사를 간 것도 아니고 심지어 월급조차도 오를 기미를 안 보이는데 도대체 뭐가 변했다는 거야? 군대 갔다가 미국으로 유학 가버리는 바람에 꼬박 5년 만에 만난 친구가 어제 나한테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넌 어째 사는 게 그대로냐.”
“오빤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찌찌뽕이다, 이년아. 생일날 바쁘다고 해서 일주일 전부터 일주일 후까지 30분 단위로 쪼개서 시간을 읊어줘도 결국 못 나오겠다고 한 게 누군데? 택배로 부쳐준 생일선물은 불쏘시개로 써먹었냐? 밥 먹자고 하면 밥만 후닥닥 먹고 가버리고, 데이트 하자고 그러면 성화 봉송 주자처럼 여기저기 휙 들렀다가 총총 가버리고, 문자 보내면 다섯 번 안에 씹어버리고 밤중에 전화 걸면 잔뜩 졸린 목소리로 짜증이나 내다가 지 술 마신 날에나 전화해서 울고불고 지랄 떤 건 어디 도플갱어라도 되냐? 게다가 그 때 전화 대신 받아 준 남자는 누구야?
“그래도, 오빤 참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좋은 사람한테 하는 말버릇이 고작 그런 거였냐? 니가 나한테 내뱉었던 욕들만 쌓아두고 보면 이건 뭐 인간 말종이 따로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담배도 못 끊는 의지박약, 세상에 나만 있는 줄 아는 이기주의자, 도통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사회 부적응자, 자기 말고는 만나줄 여자도 없는 지독한 마초, 계획성 없이 기분 따라 사방에 돈 뿌려대는 어린애인 데다가 꼴에 입만 살아서 사방팔방 오지랖 닿는 데마다 악플이나 달고 다니는 찌질이라면서?
“우리, 헤어져서도 좋은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어.”
누구 좋으라고? 좋은 친구로 남으면, 한 달 쯤 있다가 다른 남자 팔짱 끼고 나타나서 우리의 앞길을 축복해 줬으면 내 마음도 참 편안하고 좋겠다고 신나게 떠벌이려고 그러냐? 그런 주제에 내가 다른 여자 끼고 나타나면 앞에서는 썩은 미소 날리면서 잘 어울리네, 운운 거리다가 그날 밤쯤에는 술 잔뜩 먹고 전화로 포악질이나 해 대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아주 그냥 HD화질이 따로 없어.
“…그래 줄 수 있어?”
떨어지는 물방울들 사이로, 그녀가 꺼져버릴 듯이 미소 짓는다. 나는 오른손에 든 우산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낸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보도블럭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에 정신을 집중한다. 혼란한 감정들이 가벼운 국거리처럼 마음속에 담긴 채, 거품을 타고 끓어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파, 마늘, 콩나물, 황태,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간 콩나물국 한 냄비가 잘 끓었을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기어코 개운해진 감정으로 한숨을 섞어 이야기한다.
“…미안해.”
남태평양고기압과 오호츠크해고기압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그렇게 비를 맞으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녀는 먼저 발걸음을 돌려, 오호츠크해고기압을 따라 북쪽으로 떠나갔다. 나는 그녀가 꽤 멀어진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들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역시 발걸음을 돌려 따라 남태평양고기압을 따라 남쪽으로 떠나갔다. 다음 날 아침 일기예보에서 짧은 옷으로 갈아입은 미녀 캐스터는 장마전선이 북상하여 올해 장마가 끝났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전화도 걸지 않았다. 세상은 더워졌다. 나는 그녀를 잊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짧고 습하고 더웠던 그 해 여름은 영원할 것만 같이 길었다. 내리쬐는 태양을 등에 지고 번쩍번쩍 빛나는 강남과 강북의 온갖 건물들을 헤치고 다니던 나는 이따금 횡단보도에 서서 깜빡이는 보행자 신호를 멍하니 바라보며 땀을 닦았다. 땀을 많이 흘리는 날이면 걷는 걸음마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머무는 곳마다 현기증이 아찔하니 달팽이관을 엄습했다. 나는 종종 히말라야 언덕을 넘어 티벳으로 오르는 수도승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잔뜩 부신 시선을 개미떼처럼 타고 번지는 번잡한 어둠 때문에 내가 길거리에 서서 비틀대고 있을 때면, 사람들은 순하고 부지런한 야크와 셰르파처럼 나를 스쳐 검은 길에 그려진 하얀 사닥다리를 타고 험한 언덕을 오갔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는 그들처럼 순하고 부지런해지는 대신 삼계탕과 보신탕을 찾아먹고 건강원을 찾았다. 검은 색으로 끓어오르는 것들로 가득한 건강원에는 알싸하고 아찔한 비린내가 풍겨났다. 허파 가득히 비린내를 펌프질해 올리며, 그녀를 떠나보내고 내가 잃어버린 기운이란 결국 이런 비린내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등 뒤로 에어컨 바람을 쬐며 비린내 나는 붕어즙을 쪽쪽 빨고 있던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 소리가 들려서 앞을 보았지만 보이는 건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정수리였다. 사람의 말을 하는 정수리는 몇 초 만에 허공으로 치솟더니, 촐랑대며 다른 곳으로 날아가 다시 급강하하며 사람의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뵙겠습니다. 누구누구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내 입에서 풍겨나던 붕어 비린내와 거침없고 자신 있게 사람의 말을 쏘아대던 그녀의 목소리가 거칠게 엉겨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런 걸 보통 첫인상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에 대한 반 이상의 평가를 차지한다는 첫인상.
나에게 그녀는 비린내 나는 명랑한 정수리로 각인되었다. 그러니 내가 고작 두 달 뒤에 그 비린내 나는 명랑한 정수리와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는 것은 꽤나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를테면 여름이 지나갔다는 점이라던가, 보다 정확히는 검게 끓어오른 붕어즙이나 염소의 비린내로는 채울 수 없던 내 몸 안의 무언가가, 비를 뿌리던 고기압을 따라 나를 떠나간 그 무언가가 돌아오는 가을과 함께 말끔히 채워졌다는 확신이라던가.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가없이 높고 깊어서 싸늘한 바람이 도시 속을 파고들어 우리 사이를 메웠다. 나는 추웠고, 그녀는 따뜻했다.
그녀를 그렇게 만났다.
바쁜 추석을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함께 회사 수련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팀장이 알고 있는 형님이 소유하고 있는 서해의 외딴 섬으로, 모두 여덟 명이 함께 하는 조촐한 휴가였다. 팀장 입장에서는 추석까지 반납하고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힘써준 팀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였겠지만, 팀장을 제외한 일곱 명 가운데 그 취지에 백 프로 공감하는 사람은 아예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나와 그녀는, 한 달 전부터 기상청 홈페이지를 뒤지며 이 휴가가 실패할 수 없는 이유를 끈질기게 팀장에게 제시했지만, 팀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섬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보게 된다면 다들 생각이 달라질 거라는 설명이었다. 나는 아무리 환상적인 섬이라 할지라도 제 X호 태풍이란 이름이 붙은 공기덩어리 앞에서는 연옥보다 나을 게 없다는 취지로 자유휴가를 제안하다가, 도끼처럼 날을 세운 팀장의 눈빛 앞에 얌전히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팀장은 앉은 자리에 낙하산 끈이 보인다는 소문이 돌 만큼 그 태생이 명백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서울 한복판에 쓰나미가 닥쳐도 회사 옥상에 올라가 싹싹 빌면 어디선가 헬기가 나타나 썩은 동아줄이라도 내려줄, 그런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반면에 그녀는 여전히 얼굴보다 정수리를 보일 일이 많은 신입사원에 불과했다. 나는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불안해하고 불쾌해하는 그녀를 다독이며 조근조근 말하곤 했다.
“어쩔 수 없잖아. 뭐, 섬을 통째로 빌렸다는데… 팀장 성의를 봐서라도 한 번만 따라주자.”
그녀는 내 팔을 붙잡고 칭얼거리듯 속삭였다.
“우리 그냥 빠지면 안돼요?… 솔직히 오빠랑 여행 가는 건 좋은데, 다 같이 가니까…”
그녀는 정말로 뭔가 못마땅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단순히 불편한 일에 끌려가게 된 모습이 아니라, 마치 일생일대의 계획에 차질이라도 생긴 사람처럼 굴었다는 뜻이다. 나는 이상한 예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했다. 게다가 나와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 관계에 대해 전혀 모른다. 심지어 장마의 끝물에 내가 심심한 이별 하나를 해치웠다는 걸 모르고 있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녀에겐 여러모로 불편한 여행일 것이다… 아마도.
나는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 앞에서 계속 미안해하면서도, 별로 내가 미안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미안할 일이 아닌 지점에서 너무 미안해하는 것이 연인관계에 별로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들이 제멋대로 엉켜들어서, 배를 타러 선착장으로 달려가는 버스 안에서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는 머릿속이 퍽이나 복잡했다. 새벽부터 서둘러 출발한 탓에 도착지에 거의 닿았지만 아직 시간은 일렀다. 좁게 열린 창문 밖으로 바다 비린내가 습하게 스며들었다.
섬 주인은 선착장까지 나와 있었다. 그는 버스에서 선글라스를 쓴 채 앞장서서 내리는 팀장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건장한 체격에 거칠게 기른 수염이 인상적인 그는, 꼭 중세시대의 방랑검사나 미래에서 지구를 지키기 위해 찾아온 액션 영웅을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팀장의 소개를 받아 우리 일곱 명 하나하나에게 성실하고 단단하게 악수를 청했다. 환한 미소와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이 너무나 미디어적이라서, 나는 흡사 사람이 아니라 화질 좋은 TV를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팀장이 섬 주인의 안내를 받아 먼저 배에 올랐다. 우리 여덟 명이 모두 올라타고 나자, 섬 주인은 마지막으로 배에 올라 선장에게 손짓을 했다. 나는 출렁거리는 수면을 보며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먹구름이 일렁거리는 먼 바다엔 불길한 기운이 가득했다. 나는 내 앞에 선 그녀의 어깨를 꼭 붙들고 배에 오른 섬 주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섬 주인은 구름에 가린 빛을 등지고 서서 말했다.
“환영합니다.”
아 네. 앞으로 여러분이 겪게 될 모험은 지구상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거칠고 사나울 것입니다. 하지만 끝없는 용기와 인내로 눈앞에 닥치는 난관들을 이겨내고 나면… 운운하는 말이 뒤이어져야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작은 배가 파도를 헤치고 먼 바다를 건너가는 일이 한없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점점 더 불안해져서 그녀의 어깨를 세게 붙들곤 했다. 그녀는 오른손을 몰래 뻗어 내 손을 감싸 주었다. 괜찮아요. 나는 대서양을 건너가는 콜럼부스의 기분으로 내 손에 전해지는 그녀의 온기를 깊숙이 흡입했다.
수평선 건너로 검은 점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환상이 현실을 압도하는 아찔한 기분에 휩싸였다. 검은 점은 점점 커져 바위가 되고 섬이 되었다. 그 위에 나무가 자라고 별장이 지어져 선착장을 일궈내더니 이윽고 하얀 파도가 시야 가득 포말을 뿌리며 허공으로 한껏 치솟았다. 머리 위를 뒤덮은 반구 가득히 검은 구름이 두텁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팀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섬 주인은 좌우를 둘러보더니 선장에게 가볍게 손짓을 한 뒤, 우리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현실의 심장에 단도를 꽂는 웃음이었다. 문득 머리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물방울이 누군가의 핏방울처럼 느껴져서,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팀장이 문득 중얼거렸다.
“날씨가 안 좋군.”
그걸 이제 알았냐, 이 개자식아.
섬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어떤 환상은 지독히 괴로운 것일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그러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거의 그대로 맞으며 절벽을 올라 퍽이나 고지식하게 지어진 별장까지 짐을 날랐다. 은은한 갈색으로 환히 빛나는 거실 한가운데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벽난로가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장작을 태우고 있었다. 3층까지 현기증이 나도록 뻗은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오르니,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유리 바깥으로 먹먹한 어둠과 흐르고 떨어지며 솟아오르는 파도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시계를 보니 고작 오후 12시였다. 앞으로 2박 3일. 변덕스런 괴물처럼 사방에 득시글거리는 바람, 비, 파도 및 팀장과 아무것도 모르는 5명의 동료들, 그리고 그녀와 함께할 생각을 하니 절로 저절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2층에 있는 제법 큰 방 두 개를 남자 다섯과 여자 셋이 각각 쓰기로 하고 거실에 모였다. 누군가 커피를 타 왔다. 우리는 따끈한 장작불에 몸을 녹이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담담하게 논의했다. 뾰족한 대책이 나올 리 없었다. 팀장은 금방이라도 바깥으로 나가서 동아줄을 내려달라고 빌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벽난로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TV를 켜고 태풍 속보를 다룬 뉴스를 멍하니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
아니, 사흘을 보냈다.
손바닥만한 바위섬을 휘감은 폭풍은 사흘이 지나도록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섬 주인은 별장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자그마한 별채를 지은 채 살고 있었는데, 그는 폭풍이 몰아치는 사흘 동안 간간히 우리가 머무는 별장을 찾아 이 곳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퍽이나 기괴한 이야기들을 위로랍시고 들려줬다. 보통은 누가 죽거나, 미치거나, 누군가를 살해하는 걸로 끝을 맺은 뒤 껄껄대며 농담의 길로 버려지는 그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어디서 들은 듯하면서도 이상하게 한 번 삼키고 나면 좀처럼 배설할 수가 없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퍽이나 싫어할 찝찝한 종류의 것들이었다. 나는 홀로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를 피러 별장 밖으로 나가 어둠과 몇 걸음쯤 가깝게 조우할 때면,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심장을 한 손으로 두들기곤 했다.
사흘 째 되는 밤, 섬 주인은 유난히 어두운 얼굴로 17년산 위스키 한 병을 든 채 우리를 찾아왔다. 여덟 개의 빈 컵에 술을 조금씩 따른 그는 한숨을 섞어가며 결정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웬만하면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쩐지 오늘은 이상한 기분이 드니, 아무래도 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 이야기란 건 이러했다.
“내가 이 섬을 사들인 게 작년이에요. 경매로 나왔는데, 집이 두 채에다가 선착장까지 딸려있는 섬 치고는 퍽이나 싸더라구요. 입찰을 하면서도 아, 이게 뭔가 사연이 있는 섬이겠거니, 싶었죠. 알고 보니까 원래 섬 주인은 이 안에서 죽었고… 아들이 상속을 했는데 재수 없는 섬이라고, 헐값에 팔아 넘길려고 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내가 따져 물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냐고. 그랬더니 아들이 해 준 얘기가 있는데… 아버지가 원래는 사업을 크게 하셨다는데, 늘그막에 이 섬을 사서 공사까지 한 다음에 그럴싸하게 별장을 짓고 관광객들 받아다가 숙박업을 했던 모양이에요. 뭐, 몇 년 동안은 아무 사고가 없었답디다. 날이 안 좋아서 못 보셨겠지만 조기 내려가면 백사장도 그럴싸하고, 이 섬이 며칠 놀고 가기엔 참 좋거든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주민이 하나도 없어요. 그 아버지란 양반이 다 쫓아낸 거죠. 무슨 힘을 어떻게 썼는지는 몰라도… 그러다가, 그때도 딱 이맘때 쯤이에요. 늦은 태풍이 불어서 섬에 놀러온 사람들이 꼼짝없이 갇혔던 때가 있어요. 전화고 뭐고 다 끊어져서 꼬박 닷새 만에 경찰에서 통신망을 복구했는데, 이상하게 아무도 전화를 안 받더랍니다. 파도가 잠잠해지길 기다려서 섬에 들어와 봤더니, 글쎄, 집이고 선착장이고 다 멀쩡한데 사람들만 모조리 죽어 있더란 거에요. 그것도 누가 죽인 것처럼.”
내 옆자리에 있던 그녀가 내 무릎을 꽉 잡았다. 창밖으로 거짓말처럼 벼락이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가 별장을 잡어 삼킬 듯 뒤흔들었다.
“경찰 입장에선 미칠 지경이죠. 칼에 찔리고, 도망가고, 얻어맞고, 도끼에 맞고, 차에 치이고… 그런 흔적들은 많은데 자살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죄다 어떤 미친놈한테 쫓기다가 죽은 것처럼 보였거든요. 결국 며칠 동안 수사를 벌였지만 밝혀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답니다. 다만, 바로 이 벽난로 앞에서 자상刺傷 수십 개를 입은 시체 주머니에 있던 메모가 있었는데,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더랍니다.
열 명의 검둥이 아이들이 밥을 먹으러 나갔다.
한명이 숨통이 막혀 아홉 명이 되었다.
아홉 명의 검둥이 아이들이 밤늦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한명이 늦잠을 자 여덟명이 되었다.
여덟 명의 아이들이 데번을 여행했다.
한명이 남아 하여 일곱 명이 되었다.
일곱 명의 검둥이 아이들이 나무를 하러 갔다.
한명이 두 동강나 여섯 명이 되었다.
여섯명의 검둥이 아이들이 벌집을 가지고 장난쳤다.
한명이 벌에 쏘여 다섯 명이 되었다.
다섯 명의 검둥이 아이들이 소송을 걸었다.
한명이 재판소에 가 네 명이 되었다.
네명의 검둥이 아이들이 바다로 나갔다.
빨간 청어가 한명을 삼켜 세명이 되었다.
세명의 검둥이 아이들이 동물원에 갔다.
큰 곰이 잡아 두 명이 되었다.
두 명의 검둥이 아이들이 양지 쪽에 앉아 있었다.
한명이 타죽어 한명이 되었다.
한명의 검둥이 아이 혼자 남았다.
그가 목을 맸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꽈과광! 천둥이 쳐서 모두가 깜짝 놀랐… 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이 아저씨 바보 아냐? 표절할 게 없어서 그렇게 유명한 얘기를 표절하냐? 우리는 한결 같이 바람 빠진 헬륨 풍선 같은 얼굴을 한 채 섬 주인을 바라보았다. 섬 주인은 우리의 표정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요. 모두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시죠? 경찰들도 그랬습니다. 결국 이 섬에 들어온 사람들의 신원을 샅샅이 뒤져 봤는데, 관광객 중에 한 명이 한 때 이 섬에 살았던 주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가스 렌지에 얼굴을 처박은 채 타죽어 있었죠. 그런데 사인死因을 조사해 봤더니 질식사로 나왔대요. 목을 매단 거죠. 이후 부검이 이어졌지만 자살로 판정된 사람은 그 사람밖엔 없었습니다. 필적 조사 결과 그 메모도 이 사람이 쓴 걸로 판정났구요. 그럼 도대체, 목을 매달아서 죽은 그 사람을 가스렌지에 처박아서 불태운 사람은 누구였던 걸까요?”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는 별로 기억이 나질 않는데, 그건 우리가 앞선 박자에서 너무 빨리 김이 새버린 탓이었고, 그보다 먼저 들어온 섬 주인의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 때에 절대적인 신뢰성이 지나치게 떨어진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대신 우리는 아껴온 술과 고기를 풀어서 어쨌든 지나간 2박 3일의 가을 휴가를 기리며 공식적인 쫑파티를 열었다. 새벽이 늦도록, 쏟아지는 비와 내리치는 벼락과 솟구치는 파도를 벗 삼아 기괴한 이야기들 사이에서 춤추며 술을 진탕 마신 우리는 아무 데에나 쓰러져서 잠들었다. 이 여행이 시작된 이후 유일하게 즐겁다고 할 수 있는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한 여자의 비명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누구보다 먼저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은 다름 아닌 나였는데, 나는 벼락처럼 일어나 소리가 들려온 부엌으로 달려가서 그녀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떤다기 보다는 차라리 진동하며, 다채로운 높낮이로 소리를 지르다가 결국 내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녀의 정신 상태를 살피기에 앞서 그녀가 본 것을 역시 봐 버렸으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등 뒤로, 우리보다 늦게 사태를 파악한 사람들이 줄지어 앞으로 걸어오다가 차례로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직원들은 비명을 질렀고 남자 직원들은 괴성을 질렀다. 마지막으로 뛰어나온 팀장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거의 정지한 듯한 속도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더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형님?”
무릎 꿇은 팀장 앞에 놓인 것은 가스 렌지에 까맣게 그을린 머리를 처박은 채 쓰러져 있는 섬 주인의 시체였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이후 반나절 동안 내가 떠올린 단어는 오직 하나 뿐이었다. ‘경찰’ 나는 112에 전화를 걸었고, 놀라는 경찰들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비는 그쳤지만 아직 파도가 너무 거세서 배가 접근할 수 없다는 설명도 들었기 때문에, 그만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일단 놀란 사람들을 진정시키되, 최대한 현장을 보존하라는 모순된 조언을 했다. 그것은 그러니까, 부엌에 숯덩이가 된 얼굴을 드민 시체 한 구를 그대로 둔 채로 경찰이 올 때까지 어떻게 진정해 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럴 수 없다는 이야기를 반복한 뒤 핸드폰을 닫아버렸지만, 정작 팀장이 굳은 얼굴로 한 마디를 내뱉자 결국엔 경찰들이 한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
그것은 ‘범인은 반드시 범행현장에 다시 나타난다’ 거나 ‘범인은 멀리 가지 못했다’ 혹은 ‘범인은 털이 없는 남자다’ 라는 명제만큼이나 무의미한 발언이었지만, 아무튼 우리가 모두를 경계한 채 파도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각인시키는 말이었다. 여덟 명의 직원들은 모두 도살장에 끌려온 순진한 짐승 같은 얼굴을 한 채 서로의 표정과 손놀림, 그리고 섬 주인의 시체를 살폈다. 나는 하루 종일, 그녀의 양 어깨를 꼭 붙잡고 있었다. 손에 와 닿는 그녀 몸의 온기가 유난히 싸늘했다. 흡사 식어버린 뼈를 붙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미안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녀가 언제까지 괜찮을 수 있을지, 나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밤이 되었지만, 모두가 잠들기를 거부했다. 모두가 짧거나 긴 회사생활을 통해 나름대로 정을 쌓은 누군가의 어깨 뒤에 서서 둘 혹은 셋씩 무리지은 채 다른 이들을 경계의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숨 막히는 긴장의 밤이었다. 짙게 깔린 어둠 속에는 귀에 익은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낮은 창밖으로 하얀 파도가 흔들거리고, 나는 뭍이 아니라 배 위에 올라탄 것처럼 현기증을 느꼈다. 이윽고 나는, 그녀의 손을 붙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라갔다. 모두의 서먹한 시선을 받으며 나선형 계단의 꼭대기까지 올라온 나는 커다란 창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내 옆에 머뭇거리며 앉았다. 먼 어둠 속으로 조용히 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안에서 누군가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빤 너무 변했어, 라고. 그녀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나는 서사적인 환청을 들으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그녀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뒤쪽에서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입을 막힌 채 손가락만 앞으로 뻗어 창밖으로 보이는 모래사장을 가리켰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고, 그 모래사장에 꼭 사람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축 늘어진 채 파도를 따라 이리저리 너덜거리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곧이어 3층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결국 누군가 울음을 터트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한없이 비참해졌지만 고작 그런 기분조차, 더 느낄 사이가 없었다.
그 날 아침 울음을 터트린 여직원은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지 않았다. 잠들지 않기 위해 새벽녘에 마신 커피에 약을 탔을 거라고, 누군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중얼거린 직원은 다음 날 아침 목이 날아간 시체로 별채로 가는 길가에서 발견되었다. 두 걸음쯤 떨어진 곳에 피 묻은 도끼가 나뒹굴고 있었다. 우리는 한없이 섬뜩해졌다. 시체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루가 또 지나도 기어코 살아남은 사람에게 어떤 최후가 기다리고 있는지,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온 몸으로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사람이 죽었다. 우리에겐 누군가를 의심하고 있을 여유조차 없어졌다. 먹고 마시기를 거부하며 벽난로 앞에 앉아 뜬 눈으로 밤을 샜지만, 어둠이 짙어지고 조용히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바람이 불어 파도가 높게 치솟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또 한 사람이 죽었다. 다섯 사람이 남았을 때, 서로를 피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두 사람이 별채로 도망가기로 했다. 이틀이 지나고, 팀장은 침울하고 피곤한 얼굴로 그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질 않았다. 나는 벽난로를 등지고 선 팀장의 얼굴에 무한한 증오가 피어오르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이제 세 명이 남았다. 나와, 그녀와, 팀장. 전화를 끊은 팀장은 우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그만하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내 팔을 붙잡는 그녀의 힘이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짓을 저지를지 대충은 짐작했지만, 이건 너무 심해.”
그녀가 내 팔을 놓았다. 나는 내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온갖 두려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대신 교활한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만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할 말을 잊고 있는 동안, 그녀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럴까요?”
그녀의 오른손이 허공으로 뻗어 나간 것과, 팀장이 내 몸을 붙들고 한 쪽으로 내동댕이친 것과, 그녀의 오른 손 끝에서 하얗고 날카롭고 반짝거리는 것이 파도처럼 치솟아 내 가슴이 있던 허공을 가른 것, 나는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어떤 의미도 생산해 낼 수가 없었다. 팀장은 넘어진 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자신의 뒤편에 세웠다. 그리고 벽력같이 소리쳤다.
“어차피 목표는 하나였잖아! 왜 다른 사람들도 죽인 거지?”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럼 애초에 이런 데로 오질 말던가!”
그녀는 왼손도 허공으로 뻗어 비수 같은 것을 쥐더니 팀장에게 달려들었다. 팀장은 나를 힐끔 뒤돌아보고 소리 지르더니 “도망가!” 허리띠를 풀어 그녀에게 내리쳤다. 똬리를 푸는 뱀처럼 허리에서 스르륵 미끄러져 나온 허리띠는 허공에서 춤을 추며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나는 조금, 아니 완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두 사람 뒤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싸우고 있었다? 내가 보아 온 싸움이란 것의 범주에 그녀와 팀장의 격투를 포함시킬 수 있는지, 잘은 모르겠다. 그러니까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표창 같은 것을 상대방에게 날린다거나, 그것을 허리띠를 휘둘러 막아낸 뒤에 주머니에서 콩알탄 같은 것을 꺼내 던진다거나, 그게 폭발한다거나, 그 자욱한 연기 위로 몸을 날린 뒤에 허공을 계단처럼 밟아가며 합合을 겨룬다거나… 하는 싸움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건 뭐랄까, 상영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케이블에서 틀어주는 무협 영화를 중간부터 보는 기분으로 어정쩡하게 뒷걸음질 쳤다. 손닿는 곳에 리모컨이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거실 가득 어마어마하게 피어오른 연기 속에, 두 사람은 이제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며 치열하고 또 격렬하게 싸웠다. 갑자기 연기 속에서 튀어나온 표창 하나가 내 눈에 보인 것은 어쩌면 기적에 가까웠다. 팀장은 허리띠를 던져 표창을 막아내더니 내 앞으로 화려하게 떨어져 두 바퀴쯤 굴렀다. 팀장의 얼굴에는 군데군데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팀장은 나를 올려다보고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동시에 허리를 꺾어 거실 방향으로 양 손을 뻗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거실 바닥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폭파됐다…
…는 말 밖에 할 수 없어서 정말 유감이다. 팀장은 내 허리를 감아쥐더니 그대로 짐짝처럼 어깨 위에 올리고, 거의 전력 질주하는 경주마의 속도로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헛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흔들리는 시야로는 별장이 비현실적인 속도로 멀어지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멀어진 별장이 주저하고 고민하는 듯 들썩이다가 결국 폭삭 주저앉는 것이 똑똑히 들어왔다. 음, 그러니까, 팀장은 뭔가 장풍 같은 걸 써서 별장을 무너트린 모양이었다.
…근데 그럴 수 있는 건가?
“질문이 많겠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 많질 않다.”
선착장까지 달려온 팀장은 나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음, 한 가지만 대답해 줘요. 저 지금 꿈꾸고 있는 건가요?”
“꿈이라면 차라리 좋겠지.”
한숨 섞어 대답한 팀장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눈빛, 어디선가 많이 본 것이었다. 섬으로 건너올 때 처음 만났던 섬주인의 미디어적인 반짝임이 그 안에 있었다. 나는 비위 가득히 차오르는 부담스러움을 간신히 이겨내고 팀장이 무언가 말을 더 하기를 기다렸다. 한결 잠잠히 잦아든 파도소리가 창세기를 연상시키는 박자로 주변을 메우자, 팀장은 먼발치 수평선 너머로 시선을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넌 인류의 희망이다.”
…아 네.
“난 미래에서 왔지. 너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2042년이 되면 미국에서 개발한 군사체계 프로그램이 자아를 찾고 각성한다. 그리고 전 세계를 향해 핵전쟁을 일으키지. 인류는 기계에 의해 지배당하기 시작하고, 살아남은 소수의 인간들이 기계에 대항하는 전쟁을 이끌고 있어. 바로 네 아들이 그 지도자다. 기계들은 시간여행을 통해 그의 존재 자체를 시간에서 지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지.”
“…저, 이 얘기 어쩐지 귀에 익은데요?”
“그래, 그것도 기계들이 음모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이미 몇 차례 실패를 겪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음모가 마치 농담처럼 들리게끔 하기 위해 똑같은 이야기로 영화를 찍은 거야. 나도 미래에서 처음 내 임무를 들었을 때에는 이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 건지, 반신반의했지만, 이제 모든 게 확실해졌지. 이 섬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통해서.”
팀장은 결연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넌 살아남아야 한다. 걱정 하지 마라. 내가 널 지킨다.”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아, 예, 감사합니다. 저기, 근데, 원래대로라면 막 총을 쏘거나 폭탄을 던지면서 싸워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난 무공을 익힌 특수요원이다. 기계들이 제일 약한 부분이지.”
“하지만 그다지 약한 거 같지 않던데…”
“저 시리즈는 인간의 무공을 흉내 낼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어. 무수히 많은 동료들이 저 놈에게 죽어갔지. 최신형 인간 살상 로봇 T-800이다. 웃지 마! 웃는 순간 지는 거야. 거짓에 대항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순간 먼 곳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팀장은 말을 끊고는 허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니, 날아올랐다. 그리고 허리춤으로 손을 뻗다가, 손끝이 허전하자 정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봐, 허리띠 어디갔지? 아까 던졌잖아? 나더러 어쩌라구? 순식간에 미래에서 날아온 무공전사가 되었다지만, 팀장은 여전히 어딘가 허술했다. 팀장은 곧 허공에 뜬 채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마구 두들겨 맞았고, 돌덩이의 속도로 추락해서 선착장에 머리를 박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핏물이 높이 솟았다.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하나, 잠깐 고민해 보았다.
고민을 계속 할 필요는 없었다. 가까운 곳에 그녀가 보였다. 찢어진 옷 구석구석에 파르스름한 스파크를 튕기며, 팀장 근처에 사뿐히 착륙한 그녀는 팀장의 시체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녀의 얼굴 반쪽이 벗겨진 채 앙상한 철제 해골이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방금 들은 그 바보 같은 거짓말이 진짜라는 거야? 그녀는 검은 색 눈동자와, 붉은 색 렌즈로 나를 노려보며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손을 뻗어 비수로 내 목을 겨누며 킬킬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사부님의 원수를 드디어 갚겠군.”
…이건 또 뭐냐.
“아, 저, 미안하지만 말야. 나, 누구한테 원수질 일은 한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물론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겠지. 뭐, 깊게 알 필요도 없어. 넌 그냥 얌전히 죽기만 하면 되니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너 같으면 없겠냐?
“너, 기계잖아. 기계가 무슨 사부가 있어?”
그녀는 붉은 렌즈와 검은 눈으로 자신의 몸을 훑어보더니 킬킬거렸다. 그 웃음소리에도 기괴한 기계음이 반쯤 섞여 있었다.
“몸의 절반 이상이 기계니까, 뭐, 기계라고 해 두지. 하지만 사부님한테 무공을 배울 때에는 분명히 사람이었다고. 기계 놈들이랑 싸우다가 다친 걸 기계로 떼운 것뿐이야.”
“그- 러니까, 사이보그 같은 거야?”
“딩동뎅.”
“그럼 미래에서 온 거네?”
“그것도 맞고.”
“기계가 시켜서 온 게 아니면, 그 사부라는 건 사람이잖아? 기다려 봐. 내 아들이 인류의 희망이라면서? 날 지금 죽이면 인류의 희망도 죽는 건데?”
그녀는 별 소릴 다 듣겠다는 듯 대꾸했다.
“애를 니가 낳냐?”
…뭐랄까. 변명의 여지가 없는 한 마디였다.
하긴 터미네이터에서도 카일 리스가 지키러 온 건 존 코너의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어. 아버지는 자기였으니까. 카일 리스는 죽었지, 하긴. 자기 아들이 그렇게 된다는 것도 모르고. 그러니까 아버지는 중요한 게 아냐. 가만 있자, 그럼 나는 이렇게 죽고, 내가 모르는 내 아들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건가? 그게 누구지?
나는 기압골 아래 올림픽 공원에서 헤어진 그녀를 퍼뜩 떠올렸다.
“이제 그만 죽어!”
그녀 - 라는 말이 어색하지나 않을지 모르겠지만 - 어쨌든 그녀의 오른 손에 쥐어진 비수가 바람의 속도로 내 목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돌진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보통 죽기 직전엔 살아 생전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친다는데, 나는 그냥 이대로 죽기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만을 했다. 먼 곳에서 풍기는 팀장의 피비린내가 아찔했다. 파도소리가 문득 거칠게 귓가를 긁어댔다. 경쾌한 폭음이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철컥, 총알 장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살아있었다.
“오빠는 저리 비켜.”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는 엉거주춤 뒷걸음질쳤다.
나의 옛 애인이 새 애인에게 총을 갈기는 현장이 눈앞에 있었다.
지난 장마철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옛 애인은, 양 손에 거의 자기 키 만한 총을 들고, 온 몸엔 쫙 달라붙는 전신수영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으며, 젖은 머리를 묶어 올렸고, 표정이 왕창 굳어 있었다. 반면 새 애인은, 반쪽 얼굴로 울상을 지은 채, 떨어진 한쪽 팔을 바라보며, 바닥에 쓰러진 채로 나의 옛 애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옛 애인은 새 애인에게로 다가가 머리 가까이 총구를 겨눴다. 새 애인이 말했다.
“사부님, 왜…”
옛 애인은 대답 대신 총을 갈겼다. 스파크를 일으키는 기계 조각과 붉은 핏줄기가 동시에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바닥에 지푸라기처럼 쓰러진 새 애인을 발로 툭툭 쳐 본 후에야 옛 애인은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손봐주라고 했지, 누가 죽이라고 했냐?”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났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조금 먼 길을 돌아온 연애사 정도로 취급하면 좋을 것 같다. 누구나 결혼하기 전에는 조금씩 시끌벅적한 소동 같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녀가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나 바빴으며, 조금은 울적할 때도 있었고, 그걸 이해해 주지 못하는 날 떠나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나는 그녀가 배경으로 딛고 선 팀장 및 회사 임직원들의 시체 앞에서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이를 좀 더 먹고 기어코 인류의 폐허 앞에 서게 된 그녀가 다시금 자신의 남편을 불구대천의 원수덩어리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와는 다른 시간대에서 늙어간 또다른 그녀는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먼 과거로 자객을 보내는 일을 자행했다. 그리고 곧 후회한 나머지 과거의 자신과 접촉하여 나를 구하라는 부탁까지 하는 수고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 그녀는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그녀는 시공간을 넘어서서 그 점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이제는 내가 그걸 증명할 차례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가 너무나 뻔한데다가 어디서 본 듯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고, 나를 쉽게 믿지 못할 수도 있다. 마치 내가 그 섬 주인을 믿지 못했던 것처럼.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누누이 강조하곤 한다.
사랑 얘기란 게 원래 다 거기서 거기인 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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