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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들/소설

Farewell, my love

  늦게 일어난 탓에 기분이 나빴다. 그래, 그게 문제였던 거다. 기분이 나빴던 탓에 모든 일이 이따위로 이상하게 풀린 거다. 그러니까 사람은 일찍 일어나고 봐야 한다. 자연스럽게 눈이 떠질 때 침대를 툭툭 털고 일어섰더니, 태양은 이미 중천에 떠 있고,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하거나 혹은 잡스러운 웬갖 것들이 나만 홀라당 빼놓고 바쁜 하루를 시작해 버렸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먼저 집을 비운 아내가 아침 여덟 시에 보낸 문자나 점심시간에 찍혀 있는 부재중 통화 기록 같은 것에 진심으로 반응하고 대처하기가 싫어지는 법이니까. 대체로 그런 연락의 목적이란 건 밥은 밥통에 있고 반찬은 냉장고에 있으며 국은 가스레인지 위에 놓여 있으니까 부디 알아서 처먹도록 하세요. 정도로 뻔한 내용인 법이잖아? 한동안 나 볼 생각 하지 마, 라던가 애는 친정에 맡겨둘게, 같은 문자가 와 있을 줄 알았다면, 설령 어떻게 끌고 왔는지도 모를 내 자동차 트렁크에 누군지도 모를 사람 두 명이 널브러져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두 사람 모두 호흡이 정지한 상태였다는 게 확인 되었더라도 일을 이따위로 방치하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아내한테 전화 한 통 정도는 할 정신이 있었겠지. 3년 남짓한 결혼생활 동안 아무리 개차반직전인 남편이었다지만 적어도 나는 아직 법적으로 그녀의 남편이었고, 이런 상황에 놓인 남편은 보통 아내에게 나한테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이야? 정도 되는 말을 전할 자격은 갖고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도대체 내가 왜 늦게 일어났더라?

 
어디선가 내 중얼거림을 듣고 있던 아내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그걸 몰라서 물어?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난다. 범인은 술이다. 술을 쫌 많이 마셨다. 그것도 아마 모르는 사람이랑 마셨던 것 같다. 술자리가 시작될 때부터 그랬다는 말은 아니고, 아마도 3차나 4차쯤 되는 시기에 함께 있었던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처음 보는 남자 하나, 여자 하나를 양 옆에 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만 흔들었고. 그 때 나랑 같이 있던 그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난감한 표정? 뜬금없이 달라붙은 이 혹을 어떻게 떼어내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 아니다. 때마침 그 사람들 역시 독한 취기와 그보다 독한 사연들에 휘감긴 채로 세상의 고민은 자기들이 다 짊어진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퍽이나 눈치가 빠른 편이라서, 아무리 만취한 상태였다 하더라도 나를 귀찮아하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에게는 무례한 짓을 저지르거나 함부로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다. 그것은 내 아내의 무수한 제보에도 불구하고 장모님이 아직까지 나에 대한 신뢰를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그 정체 모를 남녀와 술을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그리고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네들이 진정으로 고민하고 있던 사안이 무엇이었는지도 솔직히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술 때문에 끊긴 필름이란 것이 대체로 그렇듯, 발작적으로 편집된 점프 컷 같은 영상들만 드문드문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음성과 영상의 불일치가 돋보이는 이 불확실한 기억들을 인내심 있게 조사하다 보면, 기어코 단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장면 하나가 퍼뜩 떠오른다. 그 장면에서, 나는 양 팔을 벌려 두 남녀를 내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기고는, 옆집 부부싸움 내용을 몰래 엿들은 아주머니처럼 속삭이고 있다.

 
“…사실 그게 우리 마누라에요.”

 
뭐가 우리 마누라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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