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통 "혹시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건에 대비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 "혹시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 "혹시나 일어날 수도 있다" 는 생각을 강하게 가진 사람과 "혹시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은 "역시나 일어나지 않는다" 는 생각을 가진 사람 정도로 나뉘는데, 전자와 후자가 평등한 상태에서 만났다면 말싸움을 좀 오래 하는 정도겠지만 명령권을 강하게 가진 상사와 부하로 만나게 될 때에는 둘 모두에게 상상 이상의 피곤함을 유발하게 된다. 나는 뭐 섬세함이나 꼼꼼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오늘 13시간 20분간의 노동을 선사한 어떤 사건에 대해서 그 인상 정도를 간략하게 기록해두고자 할 뿐이다. 게다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뭐 조금 다른 사안에서 내가 저런 입장을 취했던 기억이 나기도 하고. (조금 정확히는 그런 입장을 취하면서도 지금 뭐하는 짓인지 후회했던 것 같기도)
2.
작금의 대한민국은 점점 종잡을 수 없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서두, 분명 처음 이 정부가 출범했을 때 내가 가진 생각만큼 엄청난 곳으로 거침없이 향하고 있지는 않다. 요즈음의 조중동이 몰지각한 야당 및 "일부" 방송과 "일부" 인터넷 여론을 입에 담는 것과 거의 같은 비율로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여당 및 정부 당직자들을 탓하고 있는 것만 봐도 어느 정도 감은 잡힌다. 나야 작년 봄에 지구를 떠나 있던 몸이니 그 때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긴 하지만, 분명 그 봄과 여름 이후로 혹독한 가을과 겨울을 맞이하며 이 정부는 특유의 염려스러운 추진력을 잃은 채 문자 그대로의 삽질만을 반복하고 있다.
그래 뭐, 신문 방송만 마주하자면 세상이 단시간에 엄청나게 나빠지고 있는 것도 같다. 허나 아직 지난 1년이 우리 사회에 남겨놓은 상흔은 97년 이후의 10년이 남겨놓은 상흔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세계의 미래에 근본적인 악영향을 끼칠 만한 법과 제도를 창출하는 데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저, 이 정부가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건 본질적인 문제와 영- 상관없는 해프닝, 그것도 속이 너무나 빤히 들여다보이는, 순수하고 투명한 수작들 뿐이다. 내각문제, 영어몰입교육 문제, 대운하 문제, 소고기 문제(보다 기가 막혔던 이후의 조치들), 강만수 경제팀, YTN/KBS 사장교체, 교과서 개정, 85개 법안 강행처리 시도, 그리고 가장 최근의 미네르바 긴급구속 사건에 이르기까지. 대체 시끄럽기는 그렇게나 시끄러웠으면서... 도무지 한 게 뭐지? 언론을 장악하지도 못했고, "좌빨" 들을 대한민국의 역사 너머로 없애 버리지도 못했고, 대북 정책에서 성공한 것도 아니고, 경제를 살린 것도 아니고, 외교적 성과를 이룬 것도 없고... 우리는 그저 지난 10년의 연장선상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증거를 하나 더 들자면, 왕년에, 김대중님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김영삼부터 박정희 이전까지의 대통령들은 그냥 바보, 혹은 악당이 되었다. 헌데, 이명박님이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노무현 및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직까지 영향력있는 사람으로 영향력 있는 발언을 하며 (심지어 스타가 되어서) 살고 있다. 정권 교체가 되긴 된 건가, 싶을 정도로 이 정부는 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이러한 사태 분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이란, 요컨대 희망같은 거다. 많은 이들이 그의 당선이 대한민국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리라 예측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추세라면, 어쩌면, 2008-2012는 대한민국 역사에 잠시 스쳐갔던 해프닝 정도로 남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많이 피곤하겠지만, 꾹 참고, 눈 똑바로 뜨고, 귀 똑바로 세우고 살기만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필요한 거라곤 오늘날 이 사회에 들끓는 이 욕구불만의 에너지가 모두 싸늘하게 식어서 냉소가 되어버리기 전에 잘 갈무리 해 두는 것 뿐이다.
뭐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자신은 없다.
3.
사실은 뭐가 되든 좋으니까 제발 해 보라는 게 좀 더 솔직한 심정이다-_-; 조금만 더 음흉하면 차라리 마음이 놓일 수도 있겠다, 싶은데, 이 정부는 왜 이리도 투명할까. 혹시 자신이 없으니까 일부러 발목잡힐 일을 만든 다음에 나중에 투덜댈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러면서도 아무 쓰잘데기 없는 일에 정력과 인력을 낭비하고 지지율을 깎아먹는다. 꼭.
미네르바 구속만 해도 그렇다. 천만번 양보해서 그 사람이 정말 국가적 경제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 사이비 교주라도 된다고 치자. 왜 타이밍이 이 지경인 건데?; 지금 그 사람 잡아넣는 게 경제문제를 "국가적 위기사태" 로 간주한다며 벙커까지 파고 내려간 정부가 새해 벽두부터 시급하게 보여 줄 제스쳐는 아니잖아?;
4.
내일은 더 춥다고 한다. 아 정말, 가혹한 계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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