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말 동안 한 다스가 조금 안되는 친구들을 만났다. 일주일만에 만나는 이들도 있었고 일년만에 만나는 이들도 있었다. 내가 그들의 소식을 업데이트하지 못한 동안 누군가는 연애를 시작했고 누군가는 연애를 끝냈다. 누군가는 외국에서 돌아왔고 누군가는 외국으로 떠나려는 참이었다. 누군가는 이사를 끝마쳤고 누군가는 이사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꽤나 아팠고 누군가는 퍽이나 건강했다. 두세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술을 마시고 커피를 마시고 유자차를 마시며 이 사람을 앞에 두었다가 다시 저 사람을 앞에 두게 되면, 이리저리 달려가거나 멈춰있는 그들의 서로 다른 세상이 차곡차곡 갱신되어 올해의 발치에 놓였다. 적어도 발치에는 놓여 있으니, 스타트라인은 누구에게나 평범했다. 다만 저기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못다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거나, 뭐 종국에는 그럭저럭 이쁘장한 침묵으로 엇비슷해서, 나는 말을 많이 아꼈을 뿐이다. 슬슬 겨울이 끝나려는 모양이다. 참 많은 것들이 피어나고 있다.
2.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바다의 기별>을 다 읽어버렸다. 김훈씨의 문장은 날이 갈수록 완고해지고 있다. 이전에 때때로 이 사람이 재밌었던 적이 있다면, 그 단호한 "척" 하는 문장 틈바구니에 글로서 끝끝내 화해하지 못한 많은 것들에 대한 구애 같은 것들이 읽혔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스스로의 표현을 빌자면 "말하여질수 없는 것들을 끝끝내 말하는 것" 정도가 되겠지. 너무 거대한 단호함은 때때로 단호함보다 더 커다란 흔들림의 표현이기도 하다. <바다의 기별>을 통해 읽혀진 김훈씨는 이제 그런 걸 꽤나 많이 잃어버린 것 같다. 이 사람이 "걷는다" 고 말했을 때의 "걸음" 이 더 이상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단호하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김훈은 별로 재미가 없다.
3.
어머니를 서울까지 모셔다 놓고 연극 <우리 사이> 를 함께 보았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얽어가며 사람들은 말이 막힐 때마다 담배 피는 시늉을 했다. 담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민의 상징이자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원천적인 마음의 이데아였다. 이 마음을 꺼내서 보여줄 수 없는 바에야 담뱃불이라도 붙이자는 심정으로, 임신한 여자도, 그 여자의 남편도, 그 남편의 친구도, 그 친구의 아버지도, 계속 담배를 입에 물고 불 붙이는 시늉을 했다. 허나 담배를 피는 시늉이란 꼭 입담배 정도로 허전한 짓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시늉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소극장의 환기상태를 고려한 연극적 장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극이 다 끝나기 직전, 마지막 담배에는 진짜로 불이 붙었다. 배우의 얼굴을 스쳐 바닥으로 떨어지는 조명빛을 거슬러 모락모락 천장으로 올라오는 담배연기. 주말에 유난히 담배를 많이 피워 댄 걸 보면, 나는 제법 많은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4.
낮은 거의 봄날처럼 따뜻했다. 집 뒤쪽 베란다에 나가서 기지개를 펴자니 봄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 꽃피는 봄이 오면, 사랑하는 님이 떠나가네. 아 그리워라. 님의 향기가. 뭐야 이건?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지고 피고,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이건 또 뭐야? 봄봄봄, 봄봄, 봄봄봄봄, 보보봄, 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가, 왜 내겐 봄이 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정말 이유가 뭘까. 어허라.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물고 당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어쩐지 우울해진 나는 동요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봄봄봄봄 봄이 왔어요. 우리들 마음속에도, 봄봄봄봄 봄이 왔어요. 봄이 왔어요!
기분이 별로 좋아지진 않았다.
5.
귀영하는 길에 탄 지하철은 10분 정도 연착했고, 평소와는 다른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두 정거장 전에 누군가 선로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어폰이 시끄러워서 제대로 듣질 못했다. 5년 전에 쓴 소설에도 지하철에서 자살하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그 사람의 죽음을 공중파 9시 뉴스에서 짤막하게 다루도록 처리했더랬다. 하지만 현실이었다면 그 사람의 죽음은 공익근무요원의 더듬거리는 역내 방송 정도로 처리되었을 것이다. 10분 연착한 지하철 안에는 "용산사태 범국민 추모대회" 홍보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때는 어제 오후 4시였다. 사람들이 모이고 촛불을 들었을 것이다. 코앞에는 방패를 든 사람들도 모이고 물대포도 준비되었겠지. 사이코패스라는 모 씨는 참 많은 사람을 죽이고 파묻었다. 현장검증에서 유족들은 죽은 이들을 살려내라고 울부짖었다. 그런 뉴스가 시들해지려는 즈음에 제주도에서 실종된 여교사는 변사체로 발견되었단다. 어쨌든 바지런히 돌아가는 세상의 청사진에 자꾸 죽음의 얼굴이 오버랩돼서 난 요즘 뉴스를 보는 게 별로 즐겁지 않다. 창궐하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건, 때때로 죽음이 삶 만큼이나 평등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6.
내가 몇 살 더 어렸을 때, 나는 영화처럼 돌아가는 세상을 상상했다. 비극은 비극으로, 희극은 희극으로, 서로의 플롯을 건드리지 않은 채 올곧게 끝맺음하는 그런 세상. 그런 세상에서 누군가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했다면 태연은 더 이상 예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별로 그렇지 않다. 음악캠프가 끝나고 몇 시간만 지나면 같은 채널에서 뉴스데스크를 방영한다. 공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버젓이 공존하고 있다는 게 정말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 수도 있는 걸까. 적어도 나에겐 그렇지 않은 것 같다.
7.
일요일 새벽 두시에 보는 공포영화보다 무서운 건 내일이 월요일이란 사실이다.
살다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