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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할땐/노래듣고

나는 가수다, 잡담...

- 나는 워낙에 MBC에 대한 애착이 큰 사람인지라... 지난 몇년간 계속된 일밤의 몰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심지어 그 몰락을 이끈 일련의 작품들, 그러니까 <대망>을 필두로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간 수많은 코너들도 꼼꼼이 챙겨본 바가 있다. 그러므로 일밤이 <나는 가수다>처럼 독한 컨셉의 코너를 기획한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게 없다. 사실 주말 예능 프로그램은 드라마와 달라서 '계획에 따라' 챙겨보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어지간히 독한 기획이 아니고서는 <남자의 자격>과 <1박 2일>이라는 무지막지한 프로그램에 한번 빼앗긴 시청자층을 되찾아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뭐 개인적으로는 <오빠밴드> 이후의 코너들은 그럭저럭 평작은 할 수 있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대망>과 소녀시대가 일밤을 발랄하게 말아먹던 그 타이밍에 하필 <1박 2일>은 시청률 40%를 찍으며 한창 전성기를 달리는 중이었고 <남자의 자격> 역시 막 시작하는 참이었다. 그러니까 어느 프로그램이나 잘 안될 시기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일밤은 정말 운이 안좋았던 것 뿐이다. 그 불운이 마침내 오늘날 <나는 가수다>와 같은 독한 코너를 창조해내고야 말았다.

- 대한민국 정상급 가수 7명이 출연해서 매주 무대 평가를 통한 서바이벌을 벌인다는... 이 코너의 참 단순하고도 독한 컨셉은 사전 홍보에 성공하는 기획의 정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한줄의 컨셉과 출연 가수들의 명단을 공개하는 순간 인터넷은 <나는 가수다>에 대한 잡담들로 장악되고 말았다. 그리고 파일럿의 성격이 짙었던 첫 방송이 끝나자, 화제는 한층 더 무성해지고 있다. 어제 첫 방송을 보고서야 깨달았던 간단한 사실은, 일견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것 같았던 이 7인의 무대가 공중파에서 공개되는 자리가 생각보다 적었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게 <유희열의 스케치북>일테고, 이외에는 폐지된 <라라라>나 곧 폐지될 <김정은의 초콜릿> 밖에 없다. 뭐 출연 가수 중에도 백지영이나 김범수같은 사람은 음악캠프 뮤직뱅크 등등에서 종종 본 것도 같지만... 심지어 박정현 같은 가수의 무대조차 그토록 드물었다는 사실을, 대체 나는 왜 모르고 살았던 걸까. 그러니 이 7인의 명단을 봤을 때 나는 그토록 심드렁했으며, 또 그렇고 그런 예능프로그램이 하나 더 생기는 것 뿐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런 세상에, 사실은 이 7인조차 이미 "TV에 자주 나오는" 대중가수의 카테고리에서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 사실 나도 딱 한사람 이름에 흥분하긴 했다. 이소라. 이 사람 아니었으면 그렇게 기대도 안했을텐데.

- 여기에는 중요한 괴리가 있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7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 섭외력에 감탄했다. 그리고 이 코너의 컨셉을 듣는 순간 경악했다. 대체 왜 저 정도 되는 가수가 그런 컨셉에 찬성하고 텔레비전에 출연한대? 대중가수로서의 가치평가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신인 서바이벌 무대에나 적용될 굴욕적인 '탈락' 조건에 동의하고 TV에 나와서 쑈를 벌일 수 있는 이유는 결국, 그 정도로 이 사람들이 노래를 부를 무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밖엔, 설명할 수가 없다. 결국 이 사람들은 그동안 대중가수의 정점에 있지만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는... 이상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뭐, 그 원인삼아 지겨운 아이돌 산업의 폐혜 타령을 나도 늘어놓을 생각은 없지만 (그게 음악적인 "폐혜" 라는 말에 별로 동의하지도 않고) 어쨌거나 이 7인의 본래 포지션 -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소개되는 대중가수- 을 찾아주기 위해선 <나는 가수다> 와 같은 주말 프라임타임의 예능프로그램이 필요했던 셈이다. 일밤 입장에서도 이 정도로 독한 코너가 절실했던 참이고.

- 애초에 자기 노래를 부르는 가수 개개인을 투표로 평가해서 심지어 탈락시킨다는 이상한 방식에 찬성할만한 사람은 없어보인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다. <음악중심>이나 <스케치북>을 틀어놓고 관객 투표를 통해 한 사람을 탈락시킨다는 짓이나 다를게 없으니까. 고로 다음주 방송부터 집중해야 할 것은 이 가수들이 자기 노래가 아닌 "미션곡" 을 어떻게 소화해서 어떤 무대를 선보이느냐- 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이 방식은 이미 <슈퍼스타 K> 나 <위대한 탄생>을 통해서 그 경쟁력이 입증된 바가 있고, 그 전례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이 코너의 진행방식에 대해 우려하는 바와는 달리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 될 가능성이 크다. 말하자면 가수 고유의 음악세계에 순위를 매기는 방송이 아니라, 매주 진행되는 가수의 무대에 순위를 매기는 방송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무대 자체의 생동감을 즐길 수도 있겠고, 전혀 의외의 곡 선정을 통해서 이들의 편곡 능력과 곡 해석력을 다시 실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소라가 댄스곡을 부른다거나, 정엽이 락을 부른다거나... 하는 식이 될 수 있겠지. 이 정도면 상당히 즐길만한 "예능" 아닌가? 출연 가수들이야 좀 고생이 될테지만, 어쨌거나 주말 프라임타임에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될테고, 시청자 입장에선 개개인의 취향에 속한 음악세계를 폭력적으로 서열화한다는 혐의를 피해 의외로 PC하게 즐길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파일럿 성격의 첫 방송이 불러일으킨 오해와는 달리, 애초에 이건 가수에게 일방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그렇게 날로 먹는 코너가 아니라는 말이다. (본격 음악 프로그램이 아님은 물론이고)

- 그리고 애초에, 주말 프라임타임에 <스케치북>을 방송해도 <1박 2일>을 능가하는 시청률이 나오는 나라라면 이런 코너가 기획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방송에도 나오잖아? 이런 가수들을 불러놓으면 좋겠는데, 그냥 하는 건 재미없고, 서바이벌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 그나저나 어제 방송의 반응을 보고 나니... 가수들이 텔레비전에 너무 자주 나와서 노래의 가치가 떨어진다던 신해철의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구나, 싶었다. 뜬금없이 이소라랑 박정현이 호평을 받고 있단 말이지. 내 입장에선 그냥 맨날 듣던 노래 또 들었을 뿐이고 둘 다 컨디션도 별로인 것처럼 보였는데.

- 이소라 누님 너무 나이들어보여서 슬펐다. 흑. 와우는 적당히 하세요. 소개된대로 이상형이 타우렌 남캐시라면 제가 딱 닮은 사람 하나 알고 있긴 한데... 그 왜 고려대 다니는 창욱이라고...

- 이소라 말 나온 김에 전설의 라이브 영상... 이걸 본방으로 본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날밤 충격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내게 이소라는 도저히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가수로 남아있다. 좋아한다고도, 싫어한다고도... 많은 가수들이 노래를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한다곤 하지만 이소라만큼 그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이 사람은 그냥 자기 노래랑 떼어놓을 수가 없다. 그런데 심지어 그게 직업이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자기소모를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건지 신기하고 또 언제나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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