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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빼빼로

하루에 두 세통씩 빼빼로를 먹었던 시절이 있다. 아마도 3~4년 전일 것이다. 밀물처럼 몰려왔던 막역한 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나는 학교 앞 황량한 시장판 가짜 반지하 자취방에 홀로 떨어져 자취를 시작했다. 외롭지 않으려 시작한 자취생활이 정작 더 심각한 외로움을 초래했다는 건 암만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수업은 매일 아침 열시 반에 시작했고, 나는 종종 신새벽까지 마우스 휠을 굴리다 아홉시 반이나 열시 쯤 잠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학교로 향했다. 꼬박꼬박 아침을 거른 지 일 년 가까이 되었지만 나는 도무지 아침마다 속이 쓰려서, 학교로 향하는 골목길의 첫 번째 슈퍼에 들러 걸어가는 와중에 속을 채울 과자와 목을 달랠 딸기우유, 혹은 초코우유 한 팩을 사곤 했다. 육백오십원짜리 빼빼로 한 통을 사서 겉 종이곽을 뜯으면 속 포장지 두 개가 나온다. 가지런히 뜯어서 웃점퍼 주머니에 잘 세워 넣으면, 이쑤시개를 집는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침착하고 또한 우아한 포즈로 하나씩 잘 꺼내 먹을 수가 있었다. 서관 301호, 132호, 교양관 2백 몇 호 혹은 3백 몇 호 같은 곳으로 걸음을 서두르며 꺼내먹던 그 빼빼로는, 이를테면 객지에 홀로 떨어진 내 삶의 상징같은 것이었다.

아침에 한 통을 먹고 나면 대략 집에 돌아갈 때 쯤 한 통을 더 먹는다. 이건 한 2~3년쯤 되었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나서도 도통 집에 돌아가기가 싫었고, 그렇다고 누군가를 붙잡아다가 그닥 유익하지도 즐겁지도 보람차지도 않은 산책을 즐기고 싶지도 않았다. 정경관 문턱과 민주광장 언저리와 중앙광장으로 통하는 길, 그러니까 정신을 반쯤 놓고 있어도 별 무리없이 휘적거릴 수 있는 산책로를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이윽고 시간이 적당히 배고플 무렵에 다다를 때면 아침에 그랬듯이 빼빼로 한 곽과 우유를 사다가 야금야금 먹으며 지나가는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그건 이를테면 부를 수 있는 이들이 부를 수 없는 시간과 관계의 틈에서 적절한 쿨-타임에 얽혀있을 때 걷잡을 수 없이 붕 떠버리는 시간을 잠자코 죽여버리기 위한 별볼일 없는 선택이었다. 빼빼로는 길고 텁텁하고 달고 허무했다. 길어야 네 번 씹으면 입안으로 사라지는 시간들이 아쉬워서 나는 다섯 번, 여섯 번씩 빼빼로를 씹어보다가 결국엔 두 개, 세 개씩 모아 두 입에 삼켜버리고 자리를 털어버리곤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걸 한 입에 먹을 순 없다는 게 그 시절의 이상한 위안같은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리지날 빼빼로, 그러니까 빨간 곽에 들어있는 그 녀석을 난 유난히도 싫어한다. 이 녀석은 빼빼로의 본질인 허무함을 너무 극단적으로 느끼게 해 버린다. 언뜻 길-고 무난할 것만 같은 맛의 시간을 온몸으로 현현하고 있는 주제에, 알갱이 하나 없이 벌거벗은 초코과자만 짤막하게 두 세 조각, 입에 툭툭 떨어지고 나면 그것으로 게임오버다. 심심하고 무미건조하고 허무한 건 나 하나로 족하다. 과자까지 그런 걸 먹을 필욘 없잖아? 배고파서 먹은 적도 있고 심심해서 먹은 적도 있지만, 일용할 양식으로든 무익한 취미생활로든 오리지날 빼빼로는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늘 아몬드 빼빼로나 누드 빼빼로를 선택한다. 좀 더 디테일하게는 아몬드 빼빼로를 좋아한다. 그나마 허무한 느낌이 덜하니까.

사실 빼빼로만큼 외로워보이는 과자도 드물다. 빼빼로 이외의 어떤 과자도 이렇게 단독적인 개별주체의 모습이 두드러지는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빼빼로는 엉기지도 않고 쌓이지도 않고 뒤집어지지도 않고 부스러지지도 않는다. 그냥 옳곧게 서서 선택을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곱고 무참하게 갉아질 뿐이다. 이따금 혼자 부러지는 게 사고라면 사고라고 할까. 그러니 하고 많은 과자 가운데 하필 빼빼로가 사랑과 고백의 상징으로 쓰인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이상
내일 빼빼로 받을 일 없는 1人



ps. 故 미실새주의 명복을 빕니다
     하얀거탑 장준혁 이래로 진정 손꼽히는 악역이었어요
     새주없는 선덕여왕은 이제 무슨 재미로 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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