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계획대로라면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하게 마무리될 일정은 아니었는데... 역시 피곤한 건 피곤한 거라 별 수가 없었다. 그나마 토요일날 세 편은 계획대로 봤는데 같이 다니던 일행도 떨어져 나간 뒤 다음날은 도무지 귀찮아서. 그나마 <숫호구>의 현장구매표를 구해야 한다는 일종의 집념이 없었다면 오늘 아침에 일찍 귀가해 버릴 뻔 했다. 처음엔 영화가 궁금했는데 이젠 뭐, 오기랄까? 하지만 09시 05분에 도달한 롯데시네마 티켓박스의 자원봉사자분이 해맑게 말씀하시드라. "<숫호구> 매진입니다^^" 에라이; 왜이리 인기가 좋은 겁니까? 첫날 <영건탐정사무소>의 현장구매가 너무 스무스하게 성공해버린 탓에 조금은 마음을 놓고 있었거늘... 아침에 비가 오는 바람에 길거리로 나서길 좀 주저한 게 잘못이었던 것도 같고. 그렇다고 거기까지 갔는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긴 뭣하고, 영화제 시간표엔 이상할 정도로 맘을 끄는 영화도 없고 해서 무려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보고 말았다 (;;)
그리하여 올해 피판 후기는 뜬금없이 닼나이트로 시작...;;
솔직히 아침을 먹으면서 멍하니 다크나이트를 기다리다 보니 내가 피판까지 와서 뭣하는 짓인가 싶었다. 아이맥스관도 아닌데 굳이... 근데 막상 보고 나니까, 우와, 우와, 우와. 우와... 그냥 첫날 본 영화 세 편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포맷되어 버리는 현상이...;; 물론 독립 장르영화들과 할리우드 블럭버스터를 애초에 같은 기준에 놓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서두, 정말 "클래스" 의 차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아아 기발함과 똘끼 충만한 이야기가 주는 충격이란 건 어지간해서는 오락영화의 달인이 구사하는 정공법의 충격을 이겨낼 수가 없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진짜 미친 것 같다.; 내가 개성은 미비하고 선 굵은 "거장" 감독들한테 어지간해서는 애정을 표하는 일이 없는데 (리들리 스콧이라던가) 인셉션이나 메멘토 앞에서도 그저 시니컬했던 나도, <다크나이트> 앞에서도 "솔직히 조커 빼면 시체인 영화 아니냐" 며 그다지 감격하지는 않았던 나도 이 영화 앞에선 정녕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사실 정말 찾아보기 힘든, 진정한 의미의 정통 히어로 무비다. 영웅이 갖은 고난을 겪은 끝에 악을 무찌르는 이야기란 뜻이다. 이 뻔하고 유치한 이야기를 갖은 방법으로 변주하고 윤색하여 세련된 현대식 영웅을 만들어 낸 것이 여타 히어로 무비의 성공비법이라면, 놀런 감독은 이 뻔한 이야기를 더더욱 뻔하고 장엄하게 가다듬어 정말 고전적인 영웅, 혹은 악당(조커)을 만들어 냈다.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그렇게 고전적 영웅이 탄생했고 <다크나이트>에서는 태생적 악당이 탄생했다. 그리하여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다시금 영웅에 관한 이야기, 좀 더 정확히는 영웅에게 닥친 거대한 위기와 그 필연적 결말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이 영화는 배트맨의 "부재" 에 관한 영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난으로 인해 영웅이 부재한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노력하는 소영웅들의 성장과 이를 처절하게 짓밟는 악의 준동을 다룬 이야기라고. 사실 결말이 뻔할 수 밖에 없다. 영웅은 돌아와서 승리할 것이며 아마도 장엄한 최후가 함께할 것이다. 그런데 이걸 다루는 솜씨가 거의 미친 수준이다. 결말을 뻔히 아는 관객을 숨막히게 만들고, 적절한 순간에 관객이 정말 원하는 순간을 던져주고, 심지어 진짜 배드엔딩은 아닐까 쩔쩔 고민하게 만든다. 갖은 고난 끝에 배트맨이 귀환하는 순간엔 나 정말 너무나도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 이건 분명 대하소설의 호흡이다. 러닝타임이 세시간에 육박하는데, 이 긴 시간동안 이야기 흐름이 끊기는 법이 단 한순간도 없다. "길다" 는 느낌은 분명히 강한데 그래서 지루한 게 아니라 "그래서 장엄한" 영웅담이 완성되는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나 고전적인 영웅담을 이렇게나 노련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감독이 몇이나 된단 말인가. 여기가 무슨 호메로스가 서사시 읊던 그리스도 아니고...
물론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장르의 정수를 상당한 정공법으로 구사하고 있는 만큼, 이 장르의 감수성에 대한 애정이 미비한 사람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주요 인물들 : 베인이나 라즈 알굴 - 탈리아 알 굴, 캣우먼과 같은 캐릭터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없다면 아무래도 감흥이 적잖이 줄었을 것이다. 이건 놀런의 전작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나이트>를 복습한다고 해서 생겨날 수 있는 이해도 아니고, 그보다는 디씨 코믹스의 관습적인 문화 자장을 인식하고 있어야 생겨나는 "느낌" 에 가까운 것 같다. 이게 표현이 좀 애매하긴 한데 "팬" 이어야 한다는 말과는 물론 다르다. 극중 인물들이 종종 자체완결성이 결여된 행동을 하는데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 필름 외부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뜻이랄까. "걔가 원래 그렇지 뭐" 정도의 느낌...
아아 닼나이트의 충격이 너무 커서; 후기의 목적이 변질된 감이 없지 않은데;; 진정하고 영화제 후기를 시작하자면
16th 피판레이디 박하선님(의 아바타)와 함께
박하선씨 아마도 나랑 동갑...
웅 위에도 써두었지만 첫 영화는 <영건탐정사무소>였다. 온라인 매진작인지라 아홉시 조금 넘어서 현장판매를 노렸는데 다행히도 무난히 성공했고... 감독님이 피판 단골손님인데다가 <이웃집 좀비>가 워낙 여기저기서 호평을 받았던 기억이 나서 믿고 고른 작품이었다. 이 이야기인 즉슨 난 이 영화가 이렇게나 진지하...려 하는 영화일줄은 전혀 예상을 못했다는 것. 사실 피판에서 상영되는 대부분의 영화가 '진지하려' 하지는 않잖아? 개인적 생각이지만 장르적인 문법이란 것은 이미 기성 문법을 뒤엎는 데에서 오는 쾌감을 주된 재료로 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건 관객들이 놀라운 속도로 영악해지고 있는 세상에서 뚜렷한 '재원' 의 투자 없이 지속적인 신선함을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일테고. 말이 좀 복잡하긴 하지만 결국 돈 없이 영화찍는데 돈 많은 사람이랑 똑같이 진지하려고 하면 아무래도 불리하지 않겠느냐, 라는 뜻이다.
허나, 나는 소설만 써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서두... '어떤 장면' 에 대한 욕심이 창작을 추동하는 경우가 제법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소설이야 그걸 쓰면 되지만 현실적 제약이 심한 영화는 그게 쉽지가 않고, 그래서인지 때로 "앜 이런 장면 나도 찍어보면 좋겠다!" 는 욕심만으로 구성되는 영화를 종종 보곤 한다. 그... 너무 혹평인 것 같긴 하지만 내 느낌엔 이 영화가 좀 많이 그런 편이었다. 욕심만으로 채집한 장면과 장면이 너무너무 튀고 캐릭터에도 일관성이 없는데다가 (특히 여주인공은 아예 다른 사람 같다) 이야기는 매우 혼잡하다. 솔직히 시간여행물로서의 점수는 빵점을 넘어 마이너스에 육박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배우들은 연기를 아주 못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감' 을 못 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강렬했다. 테이크를 두세번만 더 갔으면 괜찮게 나올 것도 같은데! 아니면 누가 와서 연기지도만 해 줘도 좋을 것 같은데! 아 왜 저런 걸 오케이 컷이라고! 뭐 그런 장면이 좀 많았고, 그 와중에 잠시 출연하신 박혁권씨는 정말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연기를 보여주셨더랬다 ㅠㅠ 아 너무 반가웠어요...
아무튼 이런 삐걱거림도 저예산 영화의 묘미 아니겠는가, 라고 치고 넘어가고 싶지만 그냥 그렇다 하기엔 이 영화가 너무나도 진지해서...OTL 그나마 추격씬이나 액션씬들의 합이 살아있고 완성도도 높은 편이었다. 특히 격투씬 몇 개는 아마 만들면서 제일 집중한 부분이 아닌가 싶은데, 성의로만 보면 그저 무미건조한 주먹질만 해 대는 <다크나이트 라이즈>보다 더 잘짜여진 것도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주 액션영화를 표방한 것도 아니잖아 OTL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영화는 끝났는데 문득 시작된 관객인사
막상 만드신 분들을 직접 보니 불만의 상당수가 줄어들었다 ㅠㅠ 그냥 짠해서?; 아 나는 아무래도 비평가는 못되려나봐... 그리고 최송현씨는 이름있는 분이란 걸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는데 정말 매우 아름다우셨더랬다.
감독님이 은근 팬도 많아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 개인적으로 크리티컬하다 생각한 질문만은 안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특히 시간여행의 논리적 정합성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두번째 영화는 부천시청. <라 원>이었음.
부천시청 이제 어쩐지 눈에 익다ㅋ 축제를 통한 도시이미지 재고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다능.
그... 이건 발리우드의 제왕 샤룩 칸이란 분이 나오는 영화였는데 나는 그냥 인도영화길래 골랐을 뿐이다; 인도영화에는 어쩐지 심신을 쉬게 해 주는 매력이 있다. 이젠 누구나 알고 있는 '뜬금없는 군무' 같은 것들이 특히 그렇고... 특유의 과장된 유머코드도 그렇고... 근데 난 궁금한 게 인도 사람도 자국 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크게 웃을까, 싶은 것. 얘기 듣기로는 극장 분위기가 우리처럼 엄숙하지 않고 웃고 떠들고 마시는 분위기라고는 하던데, 솔직히 이런 말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어;
들어서고 보니 어쩐지 익숙한 시청 내부. 아마 심야상영을 한 번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랬다. 참고로 시청 강당은 거의 맨 앞자리에서 봐도 무방할 만큼 스크린이 저~~~멀리 떨어져 있다. 난 알았던 것 같은데 왜 또 속았을까... 영화 시작 전에 나오는 엄숙한 안내 메시지 '흡연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에 관객들은 박장대소. 이어지는 '모든 액션은 전문가의 지도와 디지털 기술의 도움으로 촬영되었습니다. 집에서 따라하지 마십시오' 라는 안내에 다시 웃음. 이 무슨 의도치 않은...
그런데 이 영화도 의외로 엇나가지 않는?; 매오 진지한 히어로 영화였다. '디지털 기술' 의 도움을 받은 특수효과들은 모두 수준급이었고 배우들의 연기나 시나리오도 상당히 정석적인 풍이었으니. 군무장면도 몇 개 없었다. 그것도 생각보다 괴이하게 갑툭튀하진 않았고... 뭔가 최신 발리우드 영화의 몰개성?; 을 보는 것 같아서 좀 슬프기도 했다 ㅜㅜ 작년에 제천에서 봤던 그 영화는 정말 입이 찢어지도록 썩소를 짓게 만드는 힘이 있었거늘; 물론 고유의 DNA를 숨길 순 없는지 골때리는 시퀀스가 몇 개 있긴 했지만 아 뭔가 기대한 건 이게 아닌데, 라는 마음이랄까.
인도영화답게 매우 길어서, 다 보고 나오니 네다섯시. 다음 영화까지 시간이 남아서 영화제 이모저모(;;)를 둘러봤다.
때마침 시작된 퍼레이드.
운 좋게 사진기자들이나 서는 자리에서 포토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ㅋㅋ
두번째분 너무 쳐다보고 있다 (...)
뒤이은 자봉단의 궐기. 해맑은 날 접한 저 우산부대는 이렇게 보기엔 매우 꼴불견; 이었는데
아마도 해마다 장마철에 열려 온 피판의 상징물과도 같다는 의미? 인 것 같았다
뒤이은 타악기단
뭔가 방수처리가 잘 된 (...) 악기의 생김생김에서 비가 오는 것을 각오했다는 스멜이 느껴진다. 아님말구...;
저거 멜로디 괜찮았는데 아 지금 기억이 안난다.
시청 옆에는 이렇게 벼룩시장이 있었음.
근데 생각보다 작기도 하고 여섯시가 되니 다 닫아버려서 좀 아쉬웠다. 무슨 시장이 그리 일찍 닫누.
각설하고... 밥먹고 프리머스에서 세번째로 본 영화는 <좀바딩 1탄: 레밍턴의 저주>. 필리핀 영화다. 딱 '피판스러울 것 같아서' 고른 영화였고 걱정도 좀 됐는데 다행히도 정말 피판스러웠다. 피판 아니면 이런 영화를 어디서 보겠는가 싶은... 얘기가 산으로 가고 산으로 간 끝에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느낌이 딱 좋았다. 인터넷 뒤지면 정보가 '약간은' 나오겠지만, 기본적으로 퀴어 영화고 좀비는 그닥 나올 필요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예고편을 보면 어째 마케팅 포인트는 좀비였던 것두 같지만.
골때리는 부분이 워낙 많아서 일일이 골라내기가 뭣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정도 수위의 퀴어 영화가 심지어 흥행에도 성공할 수 있는 나라라니 필리핀은 어떤 곳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선 아마 죽었다 깨나도 나오지 못할 것이고 나온다 해도 개봉 따위 하지 못할, 하더라도 욕이나 먹을 괴작. 수위가 높다는 건 뭐 야하다는 뜻은 아니고 수많은 게이 농담들이 굉장히 직설적이고 당당하게 쓰이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정치적 엄밀함의 잣대로는 이렇게 편향된 농담들이 마구 유통되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걸 들이대는 순간 발랄함은 바이바이. 내가 우리나라의 정치 과잉을 싫어하는 이유가 이런 데에 있기도 하다. 어느 정도는... 하지만 정작 나는 매우 고지식한 사람이니까 뭐;
거의 이중인격을 표현해야 하는 주연을 비롯해 배우들 연기도 다들 좋았고... 아 정말 게이다Gaydar 를 '발명' 해서 살인에 이용한다는 아이디어는 여기에만 묵혀두기엔 좀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모포비아를 다루는 내러티브에 이보다 유용한 장치가 또 있겠나 싶은데. 너무나도 진중한 살인마 아저씨에게서 약간은 일제시대 상하이에서 일본놈을 쫓던 독립투사의 향기가 나기도 하고... 결말만 좀 더 산으로 보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튼 이대로도 괜찮았던 영화.
의외로 관객이 없기도 했고 (매진이 아니라니!) 알고보니 관객인사가 있었다가 취소됐었더랬다. 솔직히 진짜 아깝다.; 그리고 너무나도 난감한 이야기인 주제에 12세 관람가라서 가족단위 관람객이 있었다는 건 참...;;; 잔인한 게 없긴 했지만;
첫날은 여기까지. 둘째날은 닼나이트만 보고 이렇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사실 비오는 일요일 아침 무거운 몸을 일으켜 티켓박스로 행차하고도 고작 몇 분 차이로 <숫호구>를 못 본 게 어쩐지 억울하고 오기가 돋아서! 목요일날 다시 가려고 계획중이다 (으르릉) 마침 이 날 영화가 끝나고 나서 배우+제작진과 함께하는 (사실 배우가 스탭이며 스탭이 배우인 것 같지만...) 모종의 부대행사가 있는 것도 같고? 그러나 어디까지나 혼자 하는 계획이니 또 언제 깨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녀오게 된다면, 2차 후기 커밍 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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