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살다보면/Diary / Journal

국정 역사교과서 도입에 반대하며

- 어쩐지 먼 훗날 후손들에게 "나는 세계가 미쳐 돌아가던 그 엄혹한 시절에도 이 정도 이성은 가진 사람이었다" 라고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몇 줄 기록을 남김.


- 건조한 사실만 놓고 보자면 국정 교과서 도입은 이미 반대하고 찬성하고 자시고... 그런 단계를 넘어선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 뭐 국회를 통과할 일도 없고 그냥 교육부 권한에서 짝짜꿍하고 필진 모아서 1년 안에 뚝딱 만들면 끝나는 일이라 하니 굉장히 맥이 빠지긴 한다. 국회 통과같은 절차가 있는 일들도 어어 하는 사이에 훌러덩 넘어가 버리는 게 대한민국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거늘 하물며 공무원끼리 뚝딱 하는 일은 얼마나 빠르게 되겠어. 게다가 이 나라는 "능률적인 일처리" 와 "졸속 처리" 의 차이점을 모르는 게 고질병인지라 아마 1년 안에 뭔가가 나오긴 할 거다. 2013년 교학사 교과서보다 더 엉망인 무언가가...


- 기본부터 짚어 보자. 사실 교과서 체제가 검정으로 바뀐지 얼마 되지도 않기 때문에, 애가 없거나 애가 있더라도 교육에 별 관심이 없는 절대 다수의 국민들은 아마 역사교과서가 국정이 아니라는 것... 아니 사실 대부분의 교과서가 국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나 라는 의심이 든다 (...) 나만 해도 출판사 이름 없이 "교육부" 라고 찍혀 있는 책으로 공부했던 기억이 더 많으니 어르신들은 오죽하겠는가. 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교과서가 여러권이고 학교마다 다른 책을 선택해서 사용한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 아니 어느 학교를 가든 똑같은 책을 가지고 똑같은 걸 배워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의문인 거지... 그러다보니 교과서 국정화 이슈는 일단 정치적 맥락으로 튀어나오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기 마련이다. "통합 교과서", 캬 이름부터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나라 사람들 통합 단일화 우리는 하나 뭐 이런거 기가 막히게 좋아하니까. 여기에 기존 교과서가 빨갱이 꺼다!!!! 라고 슬쩍 빨간칠만 해 주면 논란 끝. 디 엔드. 시마이.


- 국정교과서 전환이 왜 문제인가는 서울대 역사 교수들의 의견서 (여기) 가 가장 모범적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즉 "역사(한국사) 교과서 서술을 정부가 독점하는 정책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통해 오랜 고난 끝에 이룩한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습니다. 똑같은 역사 교재로 전국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상상력과 문화 창조 역량을 크게 위축시키고, 민주주의는 물론 경제 발전에도 장애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래, 이게 정답이다. 그리고 이런 것도 있다. 다수의 교과서에서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등 혹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국정교과서가 아니라 ‘교육과정’과 ‘집필기준’, 그리고 검정 과정을 장기적이고 신중하게 수행함으로써 바로잡을 일입니다. 너무 정답이라서 재미없게 들릴 정도다. 


- 사실 국정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문제는 둘째치고, 지금 우리나라 교과서 자체가 개판이다. 아니, 교육과정 자체가 개판이다. 교육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욕이 나올 수 밖에 없을 지경으로 허구헌날 교육과정이 틀어지고 교과서가 바뀌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면, 당장 내년 봄에 쓸 교과서가 올해 겨울까지도 확정되지 않는 정도. 그럼 그 교과서로 한 학기를 가르쳐야 하는 교사들은 언제 교과서를 연구하고 교수법을 개발하나? 이게 도입 초기의 혼란이라고 하고 싶겠지만, 슬프게도 교과서는 3년마다 바뀌고 있다. 3년! 이건 뭐 교과서 만드는 사람이나, 그 교과서를 검수하는 사람이나, 그 교과서로 수업을 하는 사람이나 정신이 없을 수밖에. 그러니 현행 역사교과서에 오류가 많다거나, 다소 편향된 시각이 있다거나... 하는 문제는 분명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게 맘에 안든다면 검정기간을 좀 길게 잡고 기준을 타이트하게 해서 저자와 출판사들을 들들 볶고, 신중하게 맘에 드는 것만 통과시키면 되는 일 아닌가. 대체 왜 국정교과서 도입같은 미련한 결정을 하면서 오히려 교과서 만드는 시간은 더 줄여버리고, 거기에 불필요한 날파리들이 달라붙어서 온갖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가져다 붙이게 하는 괴이한 일을 하는 걸까?


- 요컨대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이 글러먹었다는 거다. 지금 교과서가 엉망인 건 맞다. 근데 그건 교과서 만드는 과정, 더 넓게 봐서 국가의 교육과정 관리가 삐걱거리고 있기 때문이지, "학계가 좌편향되어 있기 때문" 이 아니라는 거다. 사실 국가의 공교육이라는 것은 사회에 걸맞는 인재, 좀 더 거칠게 말해서 훌륭한 노동자들을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재가 "분단과 이념대립" 을 가장 큰 역사적 화두로 붙잡아야 한다면, 물론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에 걸맞은 교과서를 만들어 내고 그에 걸맞은 교육방법을 연구하는 것도 분명 국가의 능력일 것이다. 단언컨대 이 정부는 그걸 해 낼 능력이 없다. 뜬금없이 국정교과서를 만들겠다는 건 그냥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거다. 사악하면 유능하기라도 하던가. 진짜 정내미 떨어지는 인간들.


- 사실 그들의 문제해결 방식은 정확하게 "애정결핍 환자" 의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Q) 요즘 젊은 애들이 나를 싫어한다. 왜지? A1) 젊어서 나처럼 고생을 안 해봐서 A2) 빨갱이들이 이상한 사상을 머릿속에 불어넣어서 // ... 그러니까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하고 계시는 게지. 국회의사당이 아니라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마 청와대에 있는 분이 제일 심한 것 같고...


- 이것보다 좀 더 그럴싸한 현실적 이야기를 해 보자면, 선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원래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싸움을 시작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것보다는 좀 싸울 만한 문제를 가지고 싸웠으면 하는 게 (당연히) 내 바람이다. 하다못해 '교육과정 관리가 엉망이다' 만 두고 싸웠어도 기분이 이렇게 참담하지는 않을 거다 (한숨) 한때는 이 문제가 이슈가 되었던 적도 있는데 이제 그렇게 거시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곤 정부에서도 정치권에서도 언론에서도 씨가 말라버린 것 같다. 오죽하면 이번 역사교과서 배부일이 현행 교육과정 진행과 비교해 1년이나 빠르다는 지적에 "그거야 수정 고시를 하면 된다" 는 답변을 할 정도니........


- 그러니까 이 정권은 행정부가 무슨 장기적 계획으로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모른 채 자꾸 이상한 주문을 하고, 피곤해진 공무원들은 땜빵으로 일처리를 하면서 일이 점점 산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요컨대 당신의 실무에 대해 전혀 파악하지 못한 낙하산 상사가 자꾸만 이상한 주문을 하는 광경을 상상하면 정확할 것 같다...

'살다보면 > Diary / Journa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씁쓸한 사실  (1) 2015.10.26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0) 2015.10.20
이상한 버릇  (0) 2015.07.06
2015 BiFan 을 맞이하는 태도  (0) 2015.06.25
201504 마지막 주말의 풍경들  (0) 2015.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