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니엘 월러스라는 미국 작가의 소설.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의 원작 <큰 물고기> (...)로 잘 알려진 사람이라고 한다. 출판사에서 홍보자료를 그렇게 뿌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거의 모든 리뷰과 서평들이 이 이야기로 시작과 끝을 맺고 있다. 읽기 전에는 이 소설이 <빅 피쉬>의 원작이라고 생각했을 정도. 그러나 <빅 피쉬>와는 머리카락 하나 만큼의 공통점도 없으며 심지어 분위기도 꽤나 다른 작품이다. 흠... 사실 내가 아는 것도 팀 버튼의 <빅 피쉬>일 뿐이니 이렇게 단정짓는 게 알맞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 기본적으로는 환상소설의 얼개를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유령이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만병을 치료하는 샘물이 나오고 기타 등등등. 여기서 말하는 환상소설이라 함은, 현실과 가상을 뒤섞어서 경이감을 느끼게 하는... 바로 그 장르를 말하며 장르 분류상으로 <반지의 제왕>류의 에픽 판타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엄밀히 말해 에픽 판타지는 '또 다른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 '환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혹은 '마술적 리얼리즘'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게 가장 적확한 표현일텐데, 사실 나는 이 부류의 장르구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사실 그 '마술적 리얼리즘' 이라는 단어 자체가 리얼리즘 문학을 공고하게 만드려는 시도처럼 보이는 데다가, 어차피 문학판에서는 너나 나나 구라치는 게 일상인데 이런 식으로 잘게 구분짓다가 결국 남는 것이 그놈의 '순문학' 이라는 무의미한 이정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 서언이 길었는데... 책 자체가 인상적인 편은 아니다. 분위기는 적당히 음침하고 기괴한 동화 풍의 옛날 이야기. 등장인물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단 둘이 살아왔으나 서로에게 애증의 감정을 갖고 있는 남매. 동생은 아주 아름다운데 눈이 멀었고 언니는 아주 못생겼으며 동생의 불쌍한 처지를 이용해 자신의 열등감을 풀어낸다. 여기에 미국인들이 좋아라 하는 '창작민담' 류의 이야기를 이리저리 뒤섞어서 세월의 무게를 한껏 끼얹는다. 한 줄 요약하자면 딱 팀 버튼이 좋아할 만한 그 분위기이며 90년대 말~2천년대 초에 적당히 유행했던 그 분위기인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동화의 기괴함' 에 대한 깨달음은 이미 <잔혹한 그림 동화>류의 베스트셀러가 한 번 훑고 지난 후에 시들해진 상태 아니던가. 그걸 기괴하다고 느끼고 기괴하게 풀어내는 건 정말 한 시절의 유행일 뿐이 아니었는가, 뭐 그런 깨달음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했고... 환상과 현실을 뒤섞는 시도는 이미 '리얼리즘' 문학이 괴사 상태에 빠진 문학판에서 별로 대단한 시도처럼 보이지도 않으며 결정적으로 이 책이 선사하는 깨달음이 딱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책을 덮고 난 후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터넷에 떠도는 서평들이 죄다 이렇게 모호할 리가 없다. 재미없으면 재미없다고 말하지 다들 왜 그리 솔직해지지 못하는지 몰라.
- 물론 책을 덮은 후 '한 줄 요약' 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는 건 그다지 옳은 독서의 방법이 아니라... 는 말을 듣고 있는 요즘이기도 하지만, 서사구조도 선명하지 않고, 메시지가 확실하지도 않고, 캐릭터가 매력적이지도 않으며 스타일이 도드라지지도 않는 이야기에서 어떤 가치를 느껴야 하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게다가 나는 요새 이런 식으로 '퉁 치는' 환상소설에 대한 매력을 점점 잃어가는 중이다. 환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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