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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할땐/책읽고

높은 성의 사나이 (1962)



- 알다시피 <안드로이드는 전자 양의 꿈을 꾸는가?> <마이너리티 리포트> <토탈 리콜>의 필립 K. 딕이다.


- 로저 젤라즈니, 필립 K 딕, 아서 클라크, 로버트 아인리히, 윌리엄 깁슨 등등 20세기 초중반 SF 작가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아무리 마음을 비우려고 해도 옛날 책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게 단순히 촌스럽다거나 시대에 뒤쳐졌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게, 옛날 사람들 특유의 '거대서사' 를 다루고자 하는 욕심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2015년 가장 핫했던 SF 소설 <마션>의 한없이 소박한 배경과 그 목적을 돌이켜 보자면, 위에 이야기한 작가들의 거대함이 어떤 것인지 아마 짐작이 가리라고 생각한다.


- <높은 성의 사내>역시 거대함으로는 여느 소설에 뒤지지 않는다. 하기사 애초에 전 세계의 운명을 논하는 대체역사물인데 거창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 이 책은 2차대전에서 일본과 독일이 승리했다는 가정 하에 펼쳐지는 가상의 역사를 논하고 있다.) 헌데 이 대체 역사가 철저히 미국인의 시각으로 본 상황변화라는 점이 좀 재미있긴 하다. 애초에 이야기의 배경 자체가 미국에서 멀리 떠나가는 일이 없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이 소설만 얌전히 읽다 보면 마치 세계에 북미-서유럽밖에는 없는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 이 역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대전 Z>의 폭넓은 관심과 비교해 보자면 필립 K 딕이 얼마나 옛날사람~ 옛날사람~ 인지를 알게 하는 부분이었음.


- 뭐 주역 얘기는 딱히 꺼내고 싶지도 않지만... (* 이 책에 나오는 일본인들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주역을 꺼내서 점을 친다. 그리고 전쟁 패배로 일본인의 지배를 받는 미국인들에게도 이 유행이 번져서, 백인들도 주역을 꺼내서 점을 친다... 뭐라고?) 사실 주역이 결말까지 등장하는 걸로 봐서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장치라고 봐도 무방할텐데, 다른 그 무엇보다 이 장치 하나 때문에 소설의 작품성이 어마어마하게 훼손되는 느낌. 작가가 주역에 푹 빠져 있었다고는 하는데 대체 주역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도 잘 모르겠고... 중요한 건 대체로 '동양철학' 이라는 것들은 이렇게 자신이 이해한 것들을 대놓고 줄줄 읊는다고 해서 잘 이해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학과는 다르다, 과학과는! 촌스럽다고!! ...허나 이 역시 이 책이 쓰여지던 당시에 얼마나 HOT! 한 장치였을지 되새겨 보자면, 역시 필립 K 딕이 얼마나 옛날 사람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었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예상 외의 트렌디물이었다는 것.


- 여러 모로 고전의 반열에 들기에는 얄팍했다. 고전의 판별 기준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 중 하나가 '세월의 검증' 이라고 답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해 준다고나 할까... 최근 드라마가 나오는 걸로 아는데 그건 또 얼마나 재밌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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