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는 제발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나도 그렇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심정이겠지. 하지만 시대는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니지 않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거야. 프로도, 이미 우리 시대는 어두워지고 있네. 적은 빠른 속도로 세력을 키우고 있고, 그의 계획은 아직 완성은 안 되었지만 상당히 진척된 것이 사실이야."
- <반지원정대> 2장 '과거의 그림자'
...소왕국의 제왕들은 서로 싸움을 벌였고, 그들의 탐욕스런 신병기의 붉은 칼날에 아침 햇살이 불꽃처럼 반사되었다. 승리와 패배가 있었으며 탑이 무너지고 성채가 불타올라 화염이 하늘을 찔렀다. 죽은 왕과 왕비들의 상여 위에 황금이 덮였고, 무덤이 그들을 덮고 나서 돌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 위에 풀이 자랐다...
- 7장 '톰 봄바딜의 집에서'
황금이라 한들 모두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방랑자라 해서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속이 강한 사람은 늙어도 쇠하지 않으며,
깊은 뿌리는 서리의 해를 입지 않으니
잿더미 속에서 불씨가 살아날 것이며,
어둠 속에서 빛이 새어 나올 것이다.
부러진 칼날이 다시 벼려질 것이며
잃어버린 왕관을 다시 찾을 것이다.
All that is gold does not glitter,
Not all those who wander are lost;
The old that is strong does not wither,
Deep roots are not reached by the frost.
From the ashes a fire shall be woken,
A light from the shadows shall spring;
Renewed shall be blade that was broken,
The crownless again shall be king.
- 10장 '성큼걸이'
최근 <호빗> 개봉 즈음에 맞춰 <실마릴리온>도 보고 원작소설 <호빗>도 다 읽었더랬다. 사실 호빗보다는 실마릴리온을 진지하고 끈질기게 읽은 게 좀 영향이 컸는데, 새삼 중간계에 왜 그리 설정 덕후들이 많이 붙어있는 건지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중간계가 참, 여러모로 매력적인 세계다. 온갖 신화적인 로망들은 죄다 긁어모은 세계라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사실 반지의 제왕은 십여년 전에 옛날에 예문판 <반지전쟁>으로 읽었던 기억밖에 없어서, 읽어치우는 김에 씨앗사 판으로 읽고자 마음먹고 e북으로 구해서 읽고 있다. 거기에 얼마 전까지 알라딘 e북에서 씨앗사판 <반지의 제왕> 1권을 무료로(!) 배포했던 것도 한몫 했다. (사실 가장 큰 이바지는 움베르트 에코 씨가 했다. 다들 <전날의 섬>이 어렵다고 했을 때 나는 왜 그 충고를 흘려들었던가...)
오랜만에 읽는 LorR에서는 뜻밖에도 고전의 향기가 느껴진다. 최근까지 읽었던 책들 중에서는 <레미제라블>이 작품의 문체와 가장 비슷한 느낌마저 난다(!) 대체 이렇게나 유려하고, 섬세하고, 치밀하고, 따뜻한 필치를 고딩시절의 나는 왜 비할 바 없는 지루함으로 느꼈던 걸까. 이게 예문판과 씨앗사판 번역의 차이인지, 나의 성장을 의미하는 건지, 아니면 초독과 재독 사이에 놓여 있는 LotR 삼부작 영화, 원작 <호빗> 및 영화판 <호빗>, 그리고 <실마릴리온> 재독의 경험이 감각의 왜곡을 가져온 건지... 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때는 읽지 못했던 것들이 많이 보이는 것만은 확실하다. 인용한 것 중에 첫번째 부분은 예전에도 발췌했던 기억이 나는데, 고분언덕의 을씨년함을 묘사하는 두 번째 부분은 참 새삼스레 감탄한 문장이며, (저 아련한 몇 줄 사이에 얼마나 지난한 역사가 가로놓여 있는지 떠올리자면...) 마지막 부분은 아마 톨킨의 오리지널 문장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난 심지어 다른 영시를 그냥 인용한 건 줄 알았다니까.
그러고보면 최근 영화판을 요란스럽게 했던 두 편의 영화들- <호빗>과 <레미제라블>- 은 저마다 만만치 않은 분량의 텍스트를 배경에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누군가의 이 정도 성의로 꾸려진 '세계' 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퍽 많은 이들의 폭넓은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사실 어느 정도는, 당연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참 이런 걸 느낄 때마다 거대한 이야기에 대한 욕망이 피어나기도 하는데... 누가 읽어줘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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