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봤던 책 가운데에선 제일 두껍고 거창하지만 한편으론 가장 단순했던, 이 책을 마침내 다 읽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대체 왜 대학 시절부터 이 책을 읽고싶었던 거지?; 나는 (그리고 아마 이 책을 선택할 많은 이들은) 신의 존재와 부재에 대한 사변적이며 철학적인, 그러니까 뭉뚱그려서 "형이상학적" 인 논리전개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이 책은 "형이상" 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애초에 종교란 형이상학적 문제이니 과학이 건드려선 안된다, 라는 명제 자체를 짓밟아 버리고 시작하는 책이니 할 말 다했지 뭐... 이 책의 온도는 사뭇 당황스러울 만큼 뜨겁다.
도킨스는 무서울만큼 현실과 강력하게 접착된 논리들로 철저하게 과학적인 "무신론" 을 설파한다. "무신론" 을 설파한다고 했다. 이 말인즉슨,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고로 신을 믿는 것은 멍청한 짓" 이라는 뜻이다. 그는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나, 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명제나, 신이 존재하는 게 더 좋을 거라는 명제나, 신이 존재하든 안하든 무슨 상관이냐는 명제가 모두 다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쯤 되면 종교문제에 이렇게까지 열을 올려본 기억이 없는 보통의 한국 사람들은 누구나 의아함을 느낄 것이다. 종교전쟁에 가족이라도 잃어본 사람인 건가? 뭐, 비슷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무신론자에게는 시민권을 부여해서는 안된다는 언사가 유력 정치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사회에 좀 더 어울리는 온도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단순한 지적 호기심으로 그의 흥분을 뒤쫓아 무신론 혹은 범신론의 어느 지점에 손을 들어준다손 치더라도, 그건 이 책의 본래 취지와는 별반 어울리지 않는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생각보다 상당히 정치적인 책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책의 명성만큼 읽는 과정이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다. 도킨스의 주장에 대해 "편집증적이다" 라는 비판이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사실 도킨스가 정의하는 단어들을 유심히 쫓아가지 않으면 누구나 고개를 갸웃하게 되어 있다. 거의 사전 수준의 각주가 필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장에서 말하는 신이란 무엇이고, 다음에 말하는 종교란 무엇이고, 다음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이며... (이건 번역의 문제도 있으리라고 본다) 헌데 논의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는 의도가 의심될 정도로 노골적인 허수아비 논증을 진행해 버린다.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읽어 나갔지만, 아마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읽었다면 고개를 갸웃할 부분이 많았으리라. 기본적으로 이건 염두에 둬야 한다. 도킨스가 부정하는 신은 "전지전능한 징벌자로서의 인격신" 이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전세계의 종교 가운데 전지전능한 징벌자로서의 인격신을 상정한 것은 예루살렘을 모태로 둔 몇가지 종교가 전부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종교의 해악이나, 신의 무능함과 같은 것도 모두 다 이 몇가지 종교에 대한 논증에 그치고 만다. 이 책이 보편적인 종교나 형이상학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볼 수 없으며, 다분히 정치적인 함의를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그냥, 이 책은 미국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게다가 내가 가장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논증과정에서 등장하는 어마어마한 비약의 다윈주의와, 정말 불쾌한 그놈의 진화심리학... (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를 쓴 사람이란 걸 깜빡했던 거지)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을 정도로 과격하게 진행되는 다윈주의와 진화심리학의 향연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도킨스가 이야기하는 무신론이라는 것까지도 부정하고 싶은 맘이 절로 든다. 어쨌거나 이건 기분 문제일 뿐이고, 아예 인류사회학 전반을 포괄하는 이론으로 비약된 다윈주의와 자연선택설이야 그냥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그만둘 수 있다. 하지만 그 망할 진화심리학이란 이론은 진심으로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아 이건 내 역량으로 이룰 수가 없는 문제인건가. 그저 내 맘에 안든다고 충분히 합리적인 이론을 비판하는 건 안될 일이겠지만, 난 그래도 대부분의 학문적 진보란 생각보다 단순한 기분의 문제에서 시작한다고 믿는데. (이 책을 쓰는 내내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한 도킨스는 어떠냐고? 이 책 전체가 아예 노골적으로 정치적이라고 했잖수)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할 수 있으면 하고... 여하튼 자연과학자들의 책은 깔끔한 맛이 있어서 좋을 때가 있다. 심지어 자연과학 "석학" 들이 쓴 책은 그 특유의 단순함 때문에 일종의 예술적 아름다움도 풍길 때가 있는데, 뭐 복잡한 수학공식에서 풍겨나는 아름다움이나 칼 세이건의 순수함이 풍기는 아름다움이 비근한 예가 되겠다. 그런데 도킨스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편집증에 가까운 것 같다. 뭐랄까, 가끔 공대생들이랑 이야기할 때 느껴지는 어떤 생각의 벽이랄까. 어쩌면 인문학도과 과학도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과학도들은 인문학도를 백프로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반면 인문학도는 과학도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점인 것 같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좀 열성적인 금연홍보책자를 본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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