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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할땐/책읽고

용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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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
 북스피어

 듀나를 이야기할 때면 나는 언제나 고민에 빠지곤 한다. 사실 이 정체조차 모호한 "캐릭터" 의 글쓰기 방식이 언제나 맘에 와 닿는 편은 아니다. 이제 와서 조금씩 깨달아 가건데 작가로서의 듀나는 하나의 인격체라기 궁극의 냉소와 아이러니를 위해 태어난 아웃사이더적인 캐릭터에 가깝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이 인공적인 작가 캐릭터는 존재 자체가 반인격적이고, 반인간적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창조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이 정도의 반발점이 존재한다는 건 그 자체로 재밌는 일이다. 허나, 그 캐릭터의 성격에 완전히 동감하고 따라가기에 나는 너무 고전적이고, 보수적이며, 게다가 냉소와 아이러니를 삶과 글의 자양분으로 삼기엔 너무 나약하다. (조금 다른 표현으로는 "인간적이다" 같은 것도 있겠다) 이 캐릭터가 영화평이나 짧은 소개글 같은 것을 남길 때에는 그나마 동의가 가능하다. 그 정도는 하나의 "시선" 으로 즐겁게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소설은, 게다가 그 혹은 그녀가 시도하는 장르소설의 대부분은 스토리텔링보다는 세계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세계관이 뚜렷이 발자국을 남길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이다. 대부분의 독자는 소설과 세상의 경계에 뚜렷이 그어져 있는 캐릭터의 선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그런데다가 <용의 이>의 세계는 한층 더 작가중심적이며, 불친절하고, 훨씬 더 사변적이다. 유령과 좀비와 기억이 누더기인 가짜소녀가 먼 미래에서 중세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이게 또 당황스러울 정도로 냉소적이라니 원.

 (다시 읽어보고, 딱 한마디 말만 적어두고 싶은 게 생각났는데 <용의 이>에 수없이 등장하는 "정상적인 XX" 의 개념이 조금 불쾌했다. 듀나의 시니컬함은 단순히 특유의 삐딱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삐딱하다는 걸 너무나도 심하게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런데 그럴 필요가 있나? 어차피 정상적인 거라곤 나오지 않는 소설을 쓰면서 자꾸만 정상을 논하는 이유가 뭐야?)

 작가와 책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되, 다만 나같은 고민에 빠진 사람의 이해를 위해 이런 글들에 대한 쓸만한 비평이 나오질 않는 건 여전히 아쉬운 일이다. 하긴 한국사회의 지평 내에서 대중소설에 진지한 비평을 남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기는 하지만. 책에는 세 개의 비교적 짧은 이야기와 하나의 비교적 긴 이야기, 총 네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짧은 이야기 중 하나인 <너네 아빠 어딨니?>는 이미 영화화를 위한 시나리오 작업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정말 실력 있는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다면 무시무시한 괴작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_-;;; 첫 이야기인 <너네 아빠 어딨니?>는 가정폭력의 희생자인 소녀가장과 좀비 이야기의 만남을 다루고 있고, <천국의 왕>은 파우스트 혹은 프랑켄슈타인적인 폭군 과학자와 유령 이야기이다. 가장 짧은 편인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는 좀 성급하게 쓰여진 감이 없지 않지만 가상세계와 존재 혹은 사변의 증폭에 대한 은유로 읽혀지고, 표제작인 <용의 이>는 앞서 말한 뭐 그런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는 앞선 세 작품의 총화 정도로 읽혀졌는데. 아님 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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