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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할땐/영화보고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12:08 East of Bucharest,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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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Corneliu Porumboiu

캐스팅
마르시아 안드레스쿠 :: 엠마노일 피스코치
Mircea Andreescu ::  Emanoil Piscoci
테오도르 코반 :: 버질 즈데레스큐
Teodor Corban ::  Virgil Jderescu
아이온 샤프드라우 :: 티베리우 마네스쿠
Ion Sapdaru :: Tiberiu Manescu

89분, 블랙코미디

 생전 처음 보는 루마니아 영화였다. 영어 제목인 <12:08 East of Bucharest, 2006>은 영어권에 개봉할 때 제목이었고 루마니아어 원제는 <A fost sau N-A fost?>. 뭐 한국말로 번역했을 때 어찌되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역시도 꽤나 적절한 제목이었다.

 1989년 12월 22일 오후 12시 8분, 루마니아에서는 공산정권의 독재자가 헬기를 타고 수도 부카레스트를 빠져나가는 사건이 벌어진다. 기념비적인 루마니아 혁명이 발발한 것인데, 영화는 바로 그 루마니아 혁명이 부카레스트 동쪽의 자그마한 시골마을에서도 "있었는지" 를 이야기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그 시각 이 작은 마을 사람들이 비밀경찰과 독재정권의 위협을 무릅쓰고 마을 광장에 나와 돌을 던지며 시위를 벌였는지, 혹은 집안에 숨어있다가 독재자가 헬기를 타고 도망가는 걸 목격한 후에야 광장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와 혁명을 "구경" 했는지를 묻는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바로 "그때", 독재자가 도망가고 공산정이 무너지는 그 순간에 사람들이 "거기 있었는지" 를 묻는 것이다. 영화는 혁명 16주년을 기념해 토론회를 여는 시골 방송국을 배경으로 삼는다. 방송국장이자 토론회 진행자인 버질은 혁명의 생생한 경험자라는 두 사람을 게스트로 모셔놓고 이상한 토론회를 여는데, 한 사람은 그 날 별로 한 일이 없었다고 말하며 김을 새게 만들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날 11시 30분 부터 동료들과 함께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다고 이야기하지만, 전화 연결된 시청자들에 의하면 그 날 그 사람은 물론이고 다른 동료들도 본 적이 없단다. 한술 더 떠서 그 사람은 21일 밤부터 밤 새도록 술이나 퍼 마시고 있었으며, 모든 사람은 12시 반이 넘어서, 그러니까 이미 독재정권이 무너졌다는 것이 만천하에 확인된 후에야 광장으로 나왔다는 거다. 진행자 버질은 조금씩 답답해진다. 이 작은 마을에는 혁명이 있었습니까? 아니,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혁명" 이라는 거대담론을 소소한 일상으로 끌어들이는 이 영화는 꽤 많은 해석의 여지를 담고 있는 멋진 블랙코미디다. 신화화된 혁명을 해체시키고 그 미디어적인 허구성을 폭로하는 영화로 읽을 수도 있을테고, 뭐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못지 않게 자주 언급되는 질문인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에서 읽을 수 있듯 이제 와서 그 실체를 폭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묻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루마니아 내부 사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민주화 혁명 이후 경제사정이 별로 나아지진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정말 "그때가 나았지" 같은 말이 속출하고 있다면 이 정도 언급이 나올만 하긴 하다) 뭐 어느 쪽이든 제 3자 입장에서 보기에 이 영화는 그 모두를 담고 있는 사소하고 씁쓸한 농담 쪽에 가깝다. 거대담론은 무엇을 막론하고 소시민의 일상에선 꽤나 멀리 떨어져 있기 마련이다. 플라톤과 헤라클라이토스를 들먹이며 혁명을 다루는 토론회를 시작해봐야 대다수 사람들의 입장에선 그저 입다물고 종이배나 접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라는 거다. 더구나 미래도 현재도 아닌 과거의 거대담론을 논하는 입장에선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막말로 혁명이 없었다고 치자, 혹은 혁명이 있었다고 치자. 그래서 어쩌라고? 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직접적인 끈을 부정하고 그저 그 사이 어딘가에 부유하는 일상이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혁명은 가로등처럼 여기에서 저기로 짜자잔 켜지는 것이고 어쨌든 우리는 혁명이 켜진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됐으니 트리를 마련하고, 아이들은 폭죽장난을 치는, 뭐 그렇고 그런 일상을.

 우리나라 역시 혁명의 역사가 꽤나 가까운 나라이고, 한편으로는 혁명의 결과가 뭐 있나 싶을 정도로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나라인 만큼 이 영화의 이야기가 마냥 먼 세계의 말장난인 것만은 아니다. 이 영화와 비슷한 말장난을 우리는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다. 419를 선도했다는 4.18사건은 단지 술마시다가 거사날짜를 하루 착각한 고대 총학생회장의 실수라던가, 하는 식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퍽이나 신화화된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꽤 여러가지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게 사실이다. 사실 잘은 모르겠다. 영화 말미에 언급되듯 혁명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이었다. 다만 오늘날 와서 생각하기에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이 과거가 아닌 현재가 됐을때, 혹은 당겨와야 할 미래로 자리매김할 때에도 쉽게 그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영화는 엄밀히 거대한 과거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니 거기까지 이야기를 확장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외에? 카메라워킹이 매우 흥미로운 영화였다. 기술의 한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TV토론 장면의 연출력을 보아하니 상당부분은 의도적이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