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심심할땐/영화보고

해운대

낚였다. 정말 볼 생각 없었는데 "생각보다 괜찮다" 는 이야기를 좀 들었다고, 게다가 소리소문없이 천만관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해서 섣불리 선택한 게 잘못이었다. <해운대>의 대흥행이란 사건은 올여름 한국의 영화계가 ("한국영화계" 가 아니라) 얼마나 심심한 잔치였는지 증거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는다. 쓰나미 영화에 2/3가 지나가도록 쓰나미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를 굳이 지적하고 싶진 않다. 사실 그 정도 옵션은 제작자의 선택이기도 하다. 역대 헐리우드 영화 최대 흥행기록작인 <타이타닉>에서 타이타닉은 영화 절반이 지나도록 가라앉을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까. 문제는 <타이타닉>의 그와 그녀의 이야기와는 달리, <해운대>의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들은 정말 전혀, 조금도, 털끝만치도, 궁금하거나 흥미롭지 않다는 점에 있다. 그냥 재밌으니까 웃으면서 보면 된다고는 하는데, 대체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 좋은 건지...-_- 게다가 이렇게 복합플롯을 깔아놓는 영화는 상황과 캐릭터를 꽉잡고 가는 연출의 힘이 중요한데, 지맘대로 진지했다가 개념없이 굴다가 다시 심각해지고 잠시 뒤에 몸개그를 뿌렸다가 또 몇 컷 뒤에 헤벌레거리는 캐릭터들과, 이 사건이 터지면 뒷수습 없이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기에 바빠서 심지어 앞서 무슨 상황이 있었는지, 이 영화의 스크립터는 뭘 했는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상황과 컷과 시퀀스들의 연속이 줄줄이 뿌려지다보니... 단체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간들 아니면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1화부터 정주행하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드는 서사적 아비규환 앞에서, 나는 흡사 한여름 해운대 난장판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만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설마 이것이 진정한 연출의도?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쓰나미가 닥쳐오면서 정신없이 뿌려놓았던 모든 이야기들은 한큐에 정리가 되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심감독님의 역작 디워처럼, 강렬한 재난영화의 스펙터클 하나를 성취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들러리로 세워놓은 것이냐...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 특수효과들이 너무나 초라하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최종적으로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체 어쩌자고 만든 거야?

영화를 관람한 오후 한시의 청주cgv 17관 풍경 또한 또 하나의 아비규환이긴 했다. 영화 초반부터 음향이 엉망이었고, 그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알아듣기 힘든, 발음이 부정확한 (박중훈, 님하 연기경력이 그 정도 됐으면 제발...) 혹은 지독히 거슬리는 억양의 부산 사투리 대사들이 웅얼웅얼 묻혀버렸으며, 뒷자리 청년은 의자를 툭툭 건드리고 앞자리 아저씨는 전화를 받는 한편 옆자리 아줌마는 앞자리 앉은 딸과 거리낌없이 의사소통을 하시고 옆옆자리 꼬마는 칭얼칭얼거리다가 무려 다 먹은 콜라컵에 오줌을 누는 (...) 엽기적인 상황이 펼쳐졌으니까. 이 영화를 보러 온 천만명의 사람들이 대강 이 영화 앞에서 어떤 포-즈 를 취했는지 대강 짐작케 만드는 사건들이었다. 그러게, 그저, 올 여름방학엔 유난히 가족과 함께 할 킬링타임용 영화가 없었던 것 뿐인 게다. 으으.

그러므로 나는 더 늦기전에 퍼블릭 에너미를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좋은 영화로 안구정화를 어서...

'심심할땐 > 영화보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들  (5) 2009.11.25
Wicked Little Town  (0) 2009.11.06
드래그 미 투 헬 및  (2) 2009.06.26
짧게, 마더.  (0) 2009.05.28
박쥐 (Thirst, 2009)  (2) 2009.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