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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주저리

- 굳이 깊은 곳을 내려다보며 우울해지지 않아도 서로서로 적당한 위치에서 균형만 잘 잡아주면 유쾌하고 멋지게 합의할 수 있는 감정의 지점이 있다. 이런 합의를 공치사 이상의 것으로 믿느냐 마느냐, 하는 건 결국 내게 달려 있는 문제겠지만, 언제부턴가 소소한 확신같은 건 생겼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걸 지금 저 사람도 생각하고 있는 건 틀림없다, 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의 근원은 고작 이 믿음이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한 공간을 같이 나누는 것만으로 위로받은 느낌을 받고 있을 때면 조금씩 기대는 하고 싶어진다. 언젠가는 나도 한 사람쯤은, 누군가- 가 내 "친한 친구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지, 라고. 솔직히 아직은 자신이 없다. 나는 요새도 가끔씩 내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를 떠나버리는 상상을 하곤 하니까. 뭐 생각해 보면 가장 최근에 연애같은 연애를 할때도 그랬다. 그저 주구장창 헤어질때만 생각했다는, 좀 더 정확하게는 헤어지는 게 좀 더 세상 이치에 맞는 건 아닐까 싶었다는 뜻이다.

- 나는 학교에 있을 때에도, 군생활을 할 때에도 선배를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존경하거나 존경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에 이런 저런 소리를 많이 들은 편이다. 상대적으로 학창시절의 선배란 존재들은 말은 뭐라뭐라 하다가도 별다른 구속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떠나간 편인데(씹어버리면 그만이지 뭐;), 군생활의 선배들은 역시나 약간 다르다. 작년 가을 무렵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모 선배는 나를 앉혀두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더랬다. "니가 선배한테 하는 만큼 후배들이 너한테 해 주는 거다." 그 사람은 이 말이 퍽이나 설득력이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인데, 뭐 사실이 그렇긴 하다. 하극상이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이유는 자신이 윗사람의 권위를 무시하는 순간 자기 자신의 권위도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니까. 결국 조직의 위계란 것은 서로 피해를 보지 않고자 하는 암묵적인 동의 하에 유지된다.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권위란 것이 그 자신과는 별 상관도 없이 주어진 것이란 점이다. 자신의 것도 아닌 권위를 지키고자 남이 갖고 있지도 않은 권위를 치켜세워 주는 일련의 과정이 나는 역겨울 수준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기껏해야 그런 말들을 무시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퍽이나 거대한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니 요즘 나는 내가 아닌 것으로 지칭되는 순간들과 그 "내가 아닌 무언가" 가 가진 책임과 의무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방법들을 익혀가는 중이라고나 할까. 내가 훈련소 시절을 남들처럼 "지나고 보니 괜찮은 추억" 으로 떠올릴 수 없는 이유도 결국엔 같은 수순에 있다. 길다면 길 수 있는 그 유치한 페르소나 게임은 그냥 웃어넘길 수는 없는 세상의 질서와 같은 맥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고, 내 정체성이란 절대로 그런 흐름들을,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적당히 윤색된 추억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세상의 필요에 의해 꾸며지고 조작된 커다란 정체성 속에서 적당히 의무와 권리와 감동을 누리며 살아갈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냥 보통 사람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실 누구나 자신보다는 훨씬 커다란 존재로 살아가기 마련이니까. 누구누구의 노랫말처럼 "가장 보통의 존재" 로 세상에 보내진 사람이란 아예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것 참, 무력한 일이다.

- 와우가 재미없어지는 걸 보니 적당히 한 주기가 또 끝난 모양이다. 이번에는 소설이나 써 볼까 한다. C까지 쓰고 멈춰버렸는데; 뭐 얼마나 갈 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서너편은 더 쓰겠지. 내 인생 중기계획에 따르면 끈기없이 여기저기에 발만 담가보는 일들도 올 여름이면 끝인데. 으하함. 그 사이에 얼마나 괜찮은 실험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귀추를 주목시킬 시간이다.

- 근데 나름 유쾌하게 후다닭 쓴 포스팅인데도 뭐 이렇게 우울해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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