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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할땐/영화보고

더 퀸 (The Queen,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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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포스터는 참 맘에 안들어서...

감독
스티븐 프리어스 Stephen Frears

캐스팅
헬렌 미렌 :: 엘리자베스 2세
Helen Mirren :: The Queen
마이클 쉰 :: 토니 블레어
Michael Sheen :: Tony Blair
헬렌 맥크로이 :: 블레어 부인
Helen McCrory :: Cherie Blair
제임스 크롬웰 :: 필립 왕자
James Cromwell :: Prince Philip
알렉스 제닝스 :: 찰스 황태자
Alex Jennings :: Prince Charles
로저 알람 :: 로빈 자르빈
Roger Allam :: Robin Janvrin
실비아 심스 :: 여왕의 어머니 (대비쯤 되나...)
Sylvia Syms :: Queen Mother

102분, 드라마

 영국인들이 왕실에 대해 가지는 태도는 각별하다고 알고 있다. 세계적으로 아직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꽤 되지만, 그 가운데에 "왕" 의 이름 하에 한 시대를 통치하고 호령했던 나라는 오로지 영국밖에 없는 탓일 것이다. 말하자면 천년이 넘어가는 영국 왕실의 전통과 역사는 곧 대영제국이라는 신화를 이룩했던 영국 역사의 산증인이나 다름이 없다는 게다. 거기에 영국국민 특유의 국민성 (이런게 있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소한 그 국가의 정체성이 특별한 것은 사실이니까) 이 합쳐지면 영국의 왕실은 곧 세계에 전무후무한 위엄과 권위를 갖추고 있는 왕실이 된다. 문제는 오늘날 모든 위엄과 권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어 주어야 유지되는, 일종의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민이 주인인 모든 나라에서 모든 상징적, 실질적 정치권력이 가지고 있는 한계이자 19세기 혁명의 역사가 만들어낸 인류의 대표적인 성과이다. 선거와 득표율이라는 지표 없이 다만 핏줄이라는 낡고 이미 부정당한 체제에 의지해 모든 영국민의 여왕, 나아가 모든 영국민의 할머니를 자처하는 엘리자베스 여왕은 다이애나비의 죽음 앞에서 이제 그 위엄을 실험당하고 위협당할 처지에 놓인다. 이전까지, 실질적 권력의 지표에서 상징적인 자리로 물러선 뒤의 영국 왕실은 오히려 더 아련한 사랑의 기억이었다. 영국왕실은 국민을 대량학살했다던가 오판으로 국가를 옳지 못한 방향으로 이끈 왕실이라는 오명에서 상당부분 자유로우며, 오히려 영국의 명예와 위엄을 지키며 적절한 시기에 모든 권력을 스스로 손에서 놓고 물러설 줄 알았던 지혜롭고 자애로운 어른의 이미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 영화 속의 여왕은 꽤 어린 나이부터 단지 이름뿐인 어른이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지를 몸소 체험하며 자라난 사람이었다. 어른은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어른은 위엄을 지켜야 한다. 어른은 경거망동해선 안된다. 어른은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고 이에 적절한 "조언" 을 줄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위엄을 지키는데도 아이들은 그들이 여왕에게 허용했던 위엄을 너무 쉽게 빼앗아가기 시작한다. 단지 다이애나비라는 "경박한" 이의 죽음에 적절한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름뿐인 정치권력과 이를 위협하는 대중들의 사랑이라는 키워드 앞에서, 이 영화는 마치 신기루같은 모든 인기에 대한 비유로 자라난다. 대중은 잔인하다. 그들이 만들어내고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존재 앞에서는 더 그렇다.

 다이애나비가 왕실가족이 아닌 그냥 봉사자였거나, 자유로운 왕실가족이 아닌 그냥 왕실가족이었다면 그녀에 대한 대중적 인기는 그렇게 무시무시하진 않았을 일이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듯 그녀에 대한 광적인 숭배는 그녀가 "왕실이라는 현실에 속박된 채 자유를 꿈꾸는 자애로운 왕족" 이라는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이미지를 잘 유지한 채 가장 적절한 순간에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따라서 다이애나비를 숭배하며 한편으로는 여왕을 멸시하는 대중들의 태도는 상당부분 모순적이다. 입으로는 왕실에 대한 실망과 저주를 퍼붓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왕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여왕은 자신에게 온갖 멸시가 쏟아져 올 때 이미 그들의 모순된 태도를 잘 견지하고 있었으며, 이같이 비이성적인 태도는 곧 사그라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왕을 격하게 탓한다는 것은 곧 그들이 왕실을 격하게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 다이애나비를 추모하는 이들을 손수 찾아간 여왕은 그들이 죽은 다이애나비가 아닌 살아있는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 엄청난 비난이 쏟아진 후에도 마지막까지 대중은 여왕의 신하이자 여왕의 아이였다. 이건 오히려 왕실이 상징적인 지위로 물러나 있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는 심리적 기재이다. 그들은 현실적이고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신화의 세계에서 여왕과 자신들을 관계맺음으로서 일종의 무의식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겉포장만 여왕과 신민일 뿐, 이것은 이미 연예인과 팬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이는 정치적 스타로 자리매김한 토니 블레어 총리에게도 일정부분 적용될 수 있는 역학관계인 것이다. 대중은 쉽게 찾아온 만큼 쉽게 떠나간다. 신화와 현실의 경계선에서 위태롭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 엘리자베스2세나 토니 블레어의 고뇌는 이 이상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명목뿐인 자신들의 존재를 지켜낼 수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위엄과, 인기.

 엘리자베스 2세 역할을 맡은 헬렌 미렌은 이 영화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따냈다. 나 역시 그 기사를 보고 이 영화를 알게 됐고. 별 기대는 않고 봤는데 생각보다 여러가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였다.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 만큼 섹시하고 권위있는 영국발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쏟아지며, 실화를 떠올리게 만드려는 목적 하에 실제 자료화면도 꽤 많이 사용된다. 어느 정도는 페이크 다큐로 읽어도 괜찮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