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쨌든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짓기 마련이다. 무슨 아담과 이브 혹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주변의 누군가에게는 민폐가 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걸 "죄" 라고 이름하느냐, 혹은 "관계" 라고 이름하느냐, 조금 다르게는 "기쁨" 이라고 이름하느냐가 사람과 사람간의 아우라가 겹치며 만들어내는 중간계에 대한 가치부여가 될 뿐이다. 결국 만들어지는 것은 현상이고, 가치를 부여하고 구조를 잡는 것은 단어이다. 단어가 죄를 숨기기에 죄를 죄로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속죄 대신 예의를 차린다.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후배는 선배에게 존경을 표하며, 선배는 후배를 챙겨주고, 연인은 다른 연인에게 신뢰를 보낸다. 관계를 규정하는 어마어마한 무게의 단어들이 무거워질 때 쯤이면 한 번씩 사건이 터진다. 뭐 폐륜이나 하극상이 될 수도 있고 그나마 가볍게는 이별이 될 수도 있겠으며, 보다 크게는 전쟁이 될 수도 있겠다. 사건이 터지고 봉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한 서사적 카타르시스를 원한다. 우리 사이엔, 너와 나 사이엔, 나와 타인 사이엔 "근본적으로" 작용하는 문제 따위는 없었고 그저 이런 사건을 통해 들어내고 불태워버리고 다시 지을 수 있는 아름다운 미래의 청사진 정도가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무너진 단어들 틈바구니로 다시 현상이 작동하고, 새로운 단어가 지어진다. 그것이 부모세대의 현상 혹은 단어와 다른 모습과 규칙을 취하고 있더래도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는다. 결국 사람은 살아가고 관계를 맺는 것 부터가 죄악이다. 죄를 지었으면 속죄가 이어져야 하는데 자꾸 엉뚱한 단어들만 덕지덕지 가져다 붙이고 있으니 해결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라고 엄청나게 비약해서 생각도 해 본다.
2.
알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단어의 가치나 힘을 믿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글을 써서 먹고 살겠다고 결심하고 있는 것은 참 이상한 아이러니지만, 내가 말과 단어와 구호의 힘을 믿었다면 문학이나 사학이 아니라 사회학이나 정치학에 관심을 갖는 것이 지당했을 일이다. 나는 말보다는 이야기의 가치를 믿으며 문학보다는 음악의 가치를 믿는다. 이야기와 음악은 말과 단어가 자꾸만 감추려 드는 현상들을 온몸으로 인정하고 불투명하나마 주체를 세울 줄 안다. 규정하고 분석해서 결과를 내어놓고 소통하려 드는 방법론 이면에는 지구가 종말을 맞을 날까지 끊이지 않을 무수한 담론의 바다가 숨겨져 있다. 나는 그게 싫다. 변명하고 거짓을 표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것들이, 그것들이 나쁘거나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 본질부터가 변명과 거짓과 은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싫다. 그러니 가치 있는 글을 쓰는 일은 석유로 1급수를 만드는 것과도 같다. 훌륭한 글쟁이들은 마치 기적적인 정수기와도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라고 지루한 생각도 해 본다.
3.
어쨌든 살아가는 것 부터가 죄악이라고 해서 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알 것은 알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손으로 지은 죄와 내 입으로 내뱉은 거짓을 진정한 죄와 거짓으로 인정하고 가뿐히 넘어가 주는 쿨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도 한다. 남이 지은 죄와 남이 내뱉은 거짓을 감싸주고 눈물로 정화해 줄 넓고도 착한 마음씨가 지구상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사람이 스스로 지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감추거나, 다른 이에게 떠넘기거나, 혹은 몇 년간의 옥살이 몇 대의 매질 혹은 몇 분 간의 기도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문제다. 금자씨에 의하면 기도는 이태리 타올과도 같은 것이라지만, 한 번 때를 밀었더라도 결국 언젠가 목욕탕에 갈 일이 또 생기기 마련이니까. 해결방법은 때를 원래 밀지 않는다는 외국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라고 무슨 뜻인지 통 모를 생각도 해 본다.
4.
여기까지의 잡설은 지지난주 용산에서 관람한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여자>에 대한 감상이었더랬다. 참고로 나는 한나가 문맹인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재판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를 만큼 순수하거나 멍청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의 그녀는 20세기 인류사의 가장 야만적인 부분을 온몸으로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의도적으로 완성된 인간상에 가까웠다. 그러니, 마이클이 한나와의 과거사를 부끄러워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한나의 숨겨진 마음을 수치심으로 오독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한 숭고한 인생의 서사적인 완결을 망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뭔지는 모르더라도 그냥 대단한 게 있다고 짐작은 할 수 있었겠지. 한나와 마이클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들의 관계는 대강 그런 식이었다. 때로는 그렇게 이유 없는 애정이 더 오래 가는 법이다.
5.
비타협적 감상문, 이상. 논의를 이런 식으로 끌고 가는 건 사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인데, 대학 졸업하고 요새는 통 못해봤다. <씨네21>에 이런 코너 하나 생기면 재밌겠다.
어쨌든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짓기 마련이다. 무슨 아담과 이브 혹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주변의 누군가에게는 민폐가 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걸 "죄" 라고 이름하느냐, 혹은 "관계" 라고 이름하느냐, 조금 다르게는 "기쁨" 이라고 이름하느냐가 사람과 사람간의 아우라가 겹치며 만들어내는 중간계에 대한 가치부여가 될 뿐이다. 결국 만들어지는 것은 현상이고, 가치를 부여하고 구조를 잡는 것은 단어이다. 단어가 죄를 숨기기에 죄를 죄로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속죄 대신 예의를 차린다.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후배는 선배에게 존경을 표하며, 선배는 후배를 챙겨주고, 연인은 다른 연인에게 신뢰를 보낸다. 관계를 규정하는 어마어마한 무게의 단어들이 무거워질 때 쯤이면 한 번씩 사건이 터진다. 뭐 폐륜이나 하극상이 될 수도 있고 그나마 가볍게는 이별이 될 수도 있겠으며, 보다 크게는 전쟁이 될 수도 있겠다. 사건이 터지고 봉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한 서사적 카타르시스를 원한다. 우리 사이엔, 너와 나 사이엔, 나와 타인 사이엔 "근본적으로" 작용하는 문제 따위는 없었고 그저 이런 사건을 통해 들어내고 불태워버리고 다시 지을 수 있는 아름다운 미래의 청사진 정도가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무너진 단어들 틈바구니로 다시 현상이 작동하고, 새로운 단어가 지어진다. 그것이 부모세대의 현상 혹은 단어와 다른 모습과 규칙을 취하고 있더래도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는다. 결국 사람은 살아가고 관계를 맺는 것 부터가 죄악이다. 죄를 지었으면 속죄가 이어져야 하는데 자꾸 엉뚱한 단어들만 덕지덕지 가져다 붙이고 있으니 해결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라고 엄청나게 비약해서 생각도 해 본다.
2.
알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단어의 가치나 힘을 믿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글을 써서 먹고 살겠다고 결심하고 있는 것은 참 이상한 아이러니지만, 내가 말과 단어와 구호의 힘을 믿었다면 문학이나 사학이 아니라 사회학이나 정치학에 관심을 갖는 것이 지당했을 일이다. 나는 말보다는 이야기의 가치를 믿으며 문학보다는 음악의 가치를 믿는다. 이야기와 음악은 말과 단어가 자꾸만 감추려 드는 현상들을 온몸으로 인정하고 불투명하나마 주체를 세울 줄 안다. 규정하고 분석해서 결과를 내어놓고 소통하려 드는 방법론 이면에는 지구가 종말을 맞을 날까지 끊이지 않을 무수한 담론의 바다가 숨겨져 있다. 나는 그게 싫다. 변명하고 거짓을 표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것들이, 그것들이 나쁘거나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 본질부터가 변명과 거짓과 은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싫다. 그러니 가치 있는 글을 쓰는 일은 석유로 1급수를 만드는 것과도 같다. 훌륭한 글쟁이들은 마치 기적적인 정수기와도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라고 지루한 생각도 해 본다.
3.
어쨌든 살아가는 것 부터가 죄악이라고 해서 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알 것은 알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손으로 지은 죄와 내 입으로 내뱉은 거짓을 진정한 죄와 거짓으로 인정하고 가뿐히 넘어가 주는 쿨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도 한다. 남이 지은 죄와 남이 내뱉은 거짓을 감싸주고 눈물로 정화해 줄 넓고도 착한 마음씨가 지구상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사람이 스스로 지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감추거나, 다른 이에게 떠넘기거나, 혹은 몇 년간의 옥살이 몇 대의 매질 혹은 몇 분 간의 기도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문제다. 금자씨에 의하면 기도는 이태리 타올과도 같은 것이라지만, 한 번 때를 밀었더라도 결국 언젠가 목욕탕에 갈 일이 또 생기기 마련이니까. 해결방법은 때를 원래 밀지 않는다는 외국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라고 무슨 뜻인지 통 모를 생각도 해 본다.
4.
여기까지의 잡설은 지지난주 용산에서 관람한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여자>에 대한 감상이었더랬다. 참고로 나는 한나가 문맹인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재판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를 만큼 순수하거나 멍청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의 그녀는 20세기 인류사의 가장 야만적인 부분을 온몸으로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의도적으로 완성된 인간상에 가까웠다. 그러니, 마이클이 한나와의 과거사를 부끄러워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한나의 숨겨진 마음을 수치심으로 오독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한 숭고한 인생의 서사적인 완결을 망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뭔지는 모르더라도 그냥 대단한 게 있다고 짐작은 할 수 있었겠지. 한나와 마이클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들의 관계는 대강 그런 식이었다. 때로는 그렇게 이유 없는 애정이 더 오래 가는 법이다.
5.
비타협적 감상문, 이상. 논의를 이런 식으로 끌고 가는 건 사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인데, 대학 졸업하고 요새는 통 못해봤다. <씨네21>에 이런 코너 하나 생기면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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