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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Diary / Journal

가까운 것

맛이 가버린 컴퓨터를 원상복귀시키고 인터넷을 다시 품에 안은 기념으로 쓰잘데기 없는 검색질에 매진하다가 또 못 볼 걸 봐버렸다. 그러니까 아버지. 나는 그 분에 대한 태도는 명확히 하기로 마음먹은지 오래이고 이미 주제를 넘을 정도로 실행에 옮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단순히 마음속으로 단죄하는 것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결과물을 눈앞에 가져다 두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이전까지의 충격들이,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았던 사람이 너무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걸 똑똑히 목격한 탓에 닥쳐온 단순한 쇼크에 불과했다면, 약 두 시간 전에 내 혈압을 상승시키던 흥분은 그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인, 이를테면 유인촌이나 이명박을 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점이 정말로 진심으로 놀랍다. 이제는 안타까운 게 아니라 역겨워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지금 돌이켜 봐도 그 분은 참 말을 잘 했다. 지금도 잘 하고 있다. 어쩌면 그 분은 거대한 정의와 인생의 필연적 비극성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어쩌면 훨씬 더 많은 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좋게 보이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멀리 있는 것들, 추상적인 그림들, 거대한 구조에 대해서는 거리낌없이 이런저런 말을 내뱉고 또 실천에도 옮길 수 있는 사람들이 정작 매우 가까운 곳의 불의와 부조리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그럽다는 점이 나는 한없이 섬뜩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민주주의의 실현과 시민운동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열변을 토하던 사람이 밤이 깊어지고 술이 한두잔 들어가자 노래방에 들어온 예쁜 여자와 안 예쁜 여자에 대해서 거의 똑같은 태도로 열변을 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은 걸까? 내가 순진해서? 그렇게 "안 순진한" 사람들이 서울광장엔 촛불을 들고 나오면서 정작 교육감으로 누구를 선출했는지, 사교육비로 얼마를 써서 무슨 풍조를 만들어 냈는지, 멀쩡한 여자에게 얼마나 가혹하고도 지독한 폭력을 지속적으로 가해 왔는지, 나는 똑똑히 또 잔인하게 기억하고 있다.

세상에 말로는 절대 통할 수 없는 마음들이 있다는 걸 다시 되새겨 버렸다. 밤이 너무 어둡다. 세상엔 비밀이 너무 많다. 잠들기 어려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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