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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Diary / Journal

달님

얘기를 듣자하니 오늘 밤은 댁을 보고 소원을 빌어야 한답니다. 추석때도 빌었던 소원, 대보름때 또 빌어봐야 뭐가 달라질까 싶지만서두, 어젯밤부터 오곡밥 먹고, 오늘 아침에는 귀밝이술도 마시고, 부럼도 깨물고, 복쌈도 먹고, 더위도 팔아치운 처지에 그깟 소원비는 거 하나 뭐가 어렵겠습니까. 다만 굳이 소원을 빌라는 그 취지가 저는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이게 소원을 빌면 정말 "이루어진다" 는 건지, 새해를 맞이하여 보름쯤 지난 후라면 각자 "소원" 이라고 할 만한 목표 하나쯤은 정해놓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은근한 압박인 건지. 글쎄. 난 요즘 같아서는 첫 돌때로 돌아가서 연필 자루 따위 잡지 않고 만원짜리나 한움쿰 줍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데 이런 초자연적인 소원을 이뤄줄 건 아니잖아요? 나도 뭐 그때부터 다시 살기도 피곤한 일이고. 그러니 다 생긴대로 살아야 하는 거겠죠. 요컨대 쏟아진 물은 다시 담아줄 수 없는 신통력 따위, 나보다 더 세상을 오래 산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겠냐, 뭐 그런 요지의 말입니다. <퓨처 워커>에서 미가 미래를 보는 방법이 그렇죠. 과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미래도 정해져 있다는 게 그 무녀의 일관된 증언입니다만, 실제로 그렇지 않나요? 달님이 아무리 괴상한 신통력을 부린다손 치더라도 이미 말과 행동으로 내가 몸서리나게 싫다고 표현해버린 그 누군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꿀 리도 없을테고, 평생 배운 도둑질이라곤 이딴 글이나 쓰는 것밖엔 없는 사람한테 떼돈을 벌게 해 줄 수 있을 리도 없죠. 정말 깜짝놀랄 행운을 한순간 퍼부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딴 꼼수로 바뀌는 건 그다지 많지 않더군요. 세상에 진정 필요하고 중요한 움직임은 항상 느릿느릿, 신중하게 진행되기 마련입니다. 저는 뭐 운명론자는 아닙니다만, 시간에는 정말 거대한 흐름 같은 것이 있어서,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미래의 움직임이란 것도 존재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정태가 존재하는 한에는 달님이 됐건 주님이 됐건 무력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에요. 저는 그 대표적인 분야가 다름아닌 그 허울뿐인 "소원" 이라고 생각하는 거고, 아마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리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소중한 말들을 이렇게 허무한 밤에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내뱉고, 고이 간직할 수 있는 거겠죠.

아무튼 저도 몇가지 빌긴 빌었습니다. 말하고 나니 저도 어이가 없어서 쫌 웃었더랬습니다. 말이란 건 참 웃기죠. 머릿속으로 생각할 때에는 그럭저럭 체계적이거나 현실적이거나 이성적이었던 그림들이 말로 형태를 바꾸는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허점을 드러냅니다. 대표적인 예가 기존에 존재하는 어떤 시쳇말들과 부딪힐 때에요. 이건 뭐 말을 그려내는 사람의 능력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네들이 차지하고 있는 의미영역과, 내가 꺼낸 말의 차이를 억지로 분석해서 흡사 다른 것처럼 만들어 놔 봐야, 나 스스로도 어느 순간 회의가 들기 마련이거든요. "그게 그거 아닌가?" 요걸 잘 정리해서 남들이 알아먹을 수 있게끔 체계를 구성할 능력을 갖춘 사람은 철학자가 됩니다. 말장난으로 세계를 만드는 거죠. 요걸 사람들이 좋아하는 "과학적인" 분야와 접목시키고 나면 아예 말만 가지고 실험도 하고 발명도 하고 상품도 만들고 돈도 벌 수 있습니다. 제가 4년간 대학을 다니면서 가장 짜증났던 부분이에요.

...뭐 그냥 그랬다구요. 달이 별로 밝진 않네요. 신통력이 있을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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