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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마초에 대한 단상

- 불순물 없이 순수한 폭력과 무모한 결단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리고 굳건한 신념. 때때로 마초들의 세계는 그 액기스만 뽑아서 잘 편집했을 때에는 흡사 황홀경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아마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꼬여버린 스스로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을 경우,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단순화" 에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정신적인 나태의 결과물이며, 반이성적인 동경이고, 반근대적, 숫제 반계몽주의적인 사유방식이다. 그러니 근대와 이성의 터널을 지나오며 도태되어버린 수많은 감정들이 그러하듯 단순함과 단호함, 그리고 당당함에 대한 동경은 미학의 탈을 뒤집어쓰고 세상에 종종 출몰한다. 그래서 그게 나쁜 건가?

- 미학에 대한 윤리적 판결은 학문적으로는 당연히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만, 세상 일이란 게 늘 그렇듯 모든 병은 합병증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간과할 수가 없다. 하여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선 뚜렷한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다만 글쟁이를 비롯한 모든 창작자들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서 있기 마련이고, 명백한 단호함의 숱한 반복 없이는 그 어떤 작품도 생산할 수 없다는 점은 확실히 짚어놔야 하겠다. 그러니 폭넓은 의미에서 마초가 아닌 예술가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스스로 회의하는 작품 따위는 없다. 회의는 수용자가 하는 것이다. 창작물에는 입은 있지만 귀는 없다. 그러니 모든 창작물은 언제나 폭력적이고 때로 일방적인, 무모한 결단을 내리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발뺌해 봐야 결국 모든 창조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저작을 불살라버리라고 말하는 이들은 도대체 그 모든 책임을 껴안고 가기가 얼마나 무서웠던 걸까?

-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그 어떤 폭력도 저지르지 않고 그저 평화와 행복만을 전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 밖엔 없다. 삶과 죄는 분리할 수 없으며 숱한 죄들은 그저 누군가에게 익스큐-즈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을 뿐이다. 심지어 근대가 열리고 니체가 신을 죽여버린 후에는 이놈의 익스큐-즈라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초인을 이야기했지만 어디 그게 쉬운건가. 결국 오늘날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한 채 항상 불안해하며 산다. 그러니 마초들이 질겅질겅 내뱉는 말같지 않은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솔직함, 당당함, 심지어 "멋" 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은 결국, 그들이 우리 내면의 거추장한 죄의식을 해방시켜주는 대속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본다.

- 짐 레이너와 타이커스, 김훈과 코맥 맥카시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파이트 클럽>과 오늘 본 <훌리건스>를 생각해본다. 참 촌스럽지 않은 마초가 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물론 나는 마초적인 작품을 쓸 수야 있겠지만, 나 스스로 그렇게 되는 건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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