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살다보면

Thanks giving day

- 창세기의 어느 순간, 올해의 달력을 설계한 신께서는 틀림없이 중얼거렸을 것이다. "어디 휴가를 써보시지?" 아아 신이시여. 이런 시험은 너무나 가혹하십니다. 어차피 할일도 없는데 전 그냥 쓰지 않는 쪽을 택하겠나이다.

- 하여 지난 주말은 부대, 지금은 청주, 이번 주말도 부대에 있을 예정. 지난 주말을 보내 보니까, 그 산골짜기도 일년쯤 있다보니 정이 들었는지 별로 지겹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않다; 하긴 여기 있으나 거기 있으나 결국 할일도 하는 일도 비슷하니까. 먹고자고먹고자고 책읽고 게임하고...

- 일전에 이야기했던 <한국 현대사 산책>을 기어코 지르고야 말았는데, 기대보다 더 재밌다. 그러고보니 사실 이렇게 상세한 현대사 개설은 여태껏 그 어디서도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게걸스럽게 읽어치우는 중.

- Yes24 추천도서에 있었다는 이유+제목이 멋있다는 이유만으로 질러버린 책 <이성적 낙관주의자>. 반쯤 읽었는데 도대체 사람이 뭘 먹고 책을 쓰면 이렇게까지 단순무식해질 수 있는지 감탄하는 중이다-_-; 최근 들어 인문사회학 전반을 아예 해체하려 드는 진화심리학과 생물학의 작태는 (고종석씨 책에서 이런 움직임을 뭐라고 부른다는 걸 봤던 거 같은데 뭐더라) 꽤나 예전부터 감정적으로 맘에 들지 않던 바이지만, 이 책에 이르러 아예 그 뻔뻔한 논리전개가 녹색당과 그린피스를 인류를 굶겨죽이려 드는 몰지각한 자들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여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인 시끄러운 잔소리꾼 정도로 취급하는 것을 접하고 나니... 이젠 그저 뭥미? 싶은 생각 뿐; 하지만 그저 자유무역과 세계화, 분업의 가치를 준 종교 수준으로 확장시키고, 그저 애덤 스미스 및 찰스 다윈과 짝짜꿍하는 데에서 지적 만족을 얻고 계신 우파 지식인이 쓴 진지한 책을 읽어보는 건 또 처음인 것 같아서 나름 새롭다. 아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싶기도 하고.

- 나이를 먹을수록 상상할 수 있는 미래의 가짓수가 점점 줄어든다. 자꾸만 과거에서 미래의 모습을 산출하려는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 하지만 이젠 그런 게 어느 정도는 버릇이 되어버렸다.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간혹, 아주 간혹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젠 그런 일들에 놀라본 기억도 꽤나 오래되었다. 무뎌진 삶에 늘 불안한 일상일지라도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놀라운 무력감, 혹은 권태감. 작은 일에 크게 웃는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느끼는 건 그렇게 격렬한 반응 자체에서 느껴지는 폭발적인 삶의 에너지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잃어가는 게 뭔지 알 것 같으면서, 그런 걸 하나하나 챙기기가 귀찮거나 멋지지 않다고 생각해 버리는 탓에 결국 챙기지 못한다. 그러나까 뭐랄까, 슬프기보다는 서글프다.

- 나는 타인에게 내가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진 사람인지 짐작해 내는 능력을 아예 상실해 버린 것 같다. 그러니 자꾸만 혼자서 지레짐작으로 적당한 리액션만을 준비했다가 상대방을 당황시키거나 실망시키고 만다. 오늘 하루만 대여섯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하고 싶은 건 해 주고 알고 싶은 것만 알기로 했다. 내가 지은 오늘의 죄가 얼마나 가볍거나 무거울지, 죽어서는 알 수 있을런지, 그런 걸 다 말끔하게 판결해 줄 판관이 있기만 하다면 그게 오히려 속시원할 것만 같다.

- 어떤 언급과 연관하여 :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 마음을 똑같은 방향으로 키워가는 바보짓을 내가 도대체 왜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조금 다른 방향으로는, 그 결말을 알기 때문에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진행시켜 나갈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필연적인 패망 앞에서는 오히려 편안하게 빌고 싶은 행복을 빌 수 있기 마련이니. 어쨌든 떠나보내거나 멀어지는 느낌 자체가 결코 좋은 건 아니다. 예전에 있었던 일이 너무 똑같이 재연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악스러울 뿐이지. 이건 나에게 주어진 천형 같은 걸까?

- 뭐 엄살은 적잖이 떨었던 것 같지만 사실 견딜 수 없는 아픔같은 게 어디 있누. 밥만 잘 먹더라, 죽는 것도 아니더라. 그런데 사실 밥만 잘 들어가고 죽는 것도 아니란 사실이 무엇보다 더 무서운 거 아니던가. 아니 언젠가는 죽어야 할텐데, 도대체 "그럼에도 잘만 살았습니다" 가 무수히 반복되다보면 어떻게 죽을 수가 있냐는 거지.

- 여하한 이유로, 오늘도 저를 기억하고 계신 모두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해피땡스기빙데이.

'살다보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찮은 근황  (2) 2010.11.14
부끄러운 흐름  (2) 2010.10.23
책 욕심  (0) 2010.09.12
생각 1  (0) 2010.08.26
마초에 대한 단상  (4) 2010.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