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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견딜 수 없이

1.
노상 견딜 수 없는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숨을 쉬고 걸음을 내딛는 매 순간 순간이 어쩜 이리도 팍팍하고 비현실적인지 진정 놀랍기만 하다. 정말 그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왜 아직 내가 여기 이땅에서 똑같이 숨을 쉬고 비슷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하루를 살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게 아마도 슬슬 겨울이 지나고 눈이 녹아 한세월을 겹겹이 싸고 있던 포장이 훌렁 벗겨버렸다는 느낌을 받게 된 탓일 것이다. 떠나야 한다. 그런데 떠날 수가 없다. 되새겨보면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그때는 심심할때 불러볼 동네 친구라도 있었다. 자꾸 비슷한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긴 하지만; 이제 제-발 그만 좀 하자. 그깟 3개월 더 있어봐야 내가 국가를 위해 뭐 엄청난 일을 해 놓겠니 응? 망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2.
숙소에 물이 끊긴지 한달쯤 됐다. 원체 잘 씻지 않는 성격인지라 큰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니지만 (...) 정수기를 쓸 수 없고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 정말 원초적인 짜증을 불러 일으킨다. 무엇보다 짜증나는 건 별 대책이 없다는 이유로 진짜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는 책임자들의 태도이다. 한번 동파된 수도관이 자연해동되려면 적어도 4월, 늦으면 5월 까지는 기다려야 한단다. 이런 써글, 그런 사태를 막아보라고 당신들이 월급 받아가면서 근무하고 있는 거잖아. 맘같아선 있는대로 면박을 주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별 방법이 없다는 걸 뻔히 알기에 (어쩜 이곳의 모든 일들이란 이토록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는건지;) 결국 잠자코 분을 삭히고만 있다. 그런데 정말 짜증나는 건 이 양반들의 태도가 단순한 수수방관을 넘어 아예 망각의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어디 대나무숲도 없고 여기에나 성질 부려야지. 이것 봐. 댁들 집에 물 안나왔으면 정말 그렇게 모른척 했을겨? 아아 내가 얼른 여기를 떠나야지.

3.
우리나라 군대는... 아니다. 군대의 생리에 대해선 제대하거든 짚어보자. 한가지 맘먹은 건 절대로 어디가서 "군대" 라는 조직의 성격과 문화의 전반적인 작동원리에 대해 아는 척 하지 말자는 것이니, 딱 한 번만 손 가는대로 지껄여 보고 그만두련다. 끝나거든.

4.
전역 이후의 삶을 곰곰히 계획하다보니 결국엔 당장 내일의 할 일들이 공허해지고 있다. 런던과 마드리드와 베네치아의 볼거리들을 챙기면서도 당장 이 첩첩산중 강원도 산골짜기에 들락날락하는 이들의 명단을 체-크 하는 일을 진행하기란, 정도 이상으로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작업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한동안 바지런히 싸돌아다닐 일을 예비하여 체력이나 길러두고 그나마 잘 진행되고 있는 절연 계획이나 차근차근 진행해야지, 라고는 하지만 당장 여기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관계와 인과관계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상 그런 맘을 먹기가 쉬운 것도 아니다. 당장 오늘 밤만 해도 나는 무엇을 했던가? 네이트온으로 잡담했지. 아 얼른 그만둬야지 정말.

5.
어쨌거나 앞으로 모든 일들이 잘 될거라는 부질없는 자신감은 세상을 다시 만나게 되는 모든 이들의 공통적인 착각이 아닐까 싶다. 이 정신상태를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굴어놓고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라는 말로 명쾌하게 정리한 이가 있었지.

6.
그렇다고 남은 4개월을 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빈칸으로 남게 하고 싶진 않다. 내 삶에는 정말 빈칸이 좀 필요하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짜증난다 요새는. 정말 먼곳으로 떠나서 몇 년쯤 죽은 듯이 살았으면 좋겠다. 하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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