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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들/잉여력대폭발

[잉여력대폭발] 슈퍼히어로 평전 : 첫번째, 배트맨

본명 : 브루스 웨인(Bruce Wayne)

직업 : 억만장자, 자선사업가

활동지역 : 고담(Gotham)시

능력(...), 뛰어난 신체능력, 천재적인 지능, 천재적인 지능으로 주문제작 혹은 직접 만들어 낸 각종 발명품들.

숙적 : 조커, 펭귄, 투페이스, 베인, 리들러, 라즈 알 굴, 허쉬, 닥터 스트레인지 등등. 대부분이 미친놈이다.

첫등장 : 1939년, 탐정만화(Detctive comic #24)

 

-  악당에게 부모를 잃은 것이 탄생의 원인이 되었다.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 토마스 웨인과 어머니 마사 웨인은 고담시에서 존경받는 사업가 (이야기에 따라 다른데, 혹은 의사) 였는데, 어느 날 어린 브루스와 함께 시내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갱단의 습격을 받아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담시에 만연한 범죄자들에 대한 강력한 분노를 품게 된 브루스는 집사 알프레도의 도움 아래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 첨단 장비와 비밀기지를 마련하고, 무술을 연마하여 밤마다 고담시의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영웅으로 활약하게 된다.

- 범죄자들을 대하는 배트맨의 감정은 이중적이다 : 공포와, 분노. 이것은 어렸을 적 눈앞에서 부모를 잃으며 그가 느꼈던 감정이 트라우마가 되어 각인된 것이다. 때문에 배트맨은 부단한 범죄연구와 끝없는 자기연마를 통해 자신의 머릿속에 박힌 공포를 뛰어넘는 존재로 자리하고자 한다. 브루스는 어렸을 적 박쥐굴에 갇혔던 경험 때문에 박쥐를 대단히 두려워했는데, 그가 고담의 자경단으로 활약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굳이 박쥐를 모티브로 삼은 것은 자신에게 각인된 공포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범죄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고자 한다. 부모를 잃던 밤에 자신이 겪었던 감정 그대로를 적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배트맨은 항상 어둠 속에서 움직이며 적을 겁에 질리게 하는데, 이 활동방식은 어쩌면 사적인 복수의 일환일 수도 있고, 정신병리적인 강박증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곧, 그의 영웅활동은 정의를 지키려는 선한 의지의 발현보다는 단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발버둥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무한히 선한 클라크 켄트 : 슈퍼맨이나 국가를 위해 돌진하는 스티븐 로저스 : 캡틴 아메리카와 비교되는 점이다.

- 때문에 배트맨은 스스로 정해 놓은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고자 한다. 이는 그 자신이 영웅과 범죄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법과 질서를 향한 배트맨의 굳은 신념은 사실 온갖 질곡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영웅으로 기능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로는 엄격함이 지나치면서 이것 또한 그가 가진 강박증의 하나로 비춰지기도 하는데, 일례로 그는 절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헌데 이게 미필적 고의까지 포함한 개념이다보니 숙적인 조커가 눈앞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목숨을 걸고 구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그는 자신이 체포한 범죄자들을 죄다 "아캄수용소" 라는 특수수용소에 가두는데, 여기 갇힌 범죄자들은 하나 같이 배트맨을 향한 원한에 불타게 되고 이때문에 순전히 "배트맨을 불러내려는" 의도만으로 끝없는 재범을 일으키곤 한다. (이를 형상화한 대표적인 악당이 조커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게 반복되다 보니 결국 고담시민들은 배트맨이 고담시에 범죄를 불러온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 배트맨은 끝없이 좌절하는 영웅이다. 그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밤거리로 나서지만, 자신의 행동방식이 결국엔 악당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숙적 조커는 오로지 '배트맨을 조롱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데, 그를 죽이지 않으면서 저지하는 방법은 딱 하나 뿐이다 : 배트맨 자신이 활동을 중지하는 것. 조커는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과장된 웃음을 그려넣고 규칙을 향한 배트맨의 엄숙주의를 계속해서 조롱한다. 왜 그렇게 심각하게 굴어? Why so serious? 그는 배트맨이 사적인 복수심에 미치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짓눌려 영웅놀이를 하며 발버둥치고,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 과장된 엄숙주의로 법과 원칙을 갈망할 뿐, 결국엔 자신의 짝패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규칙을 향한 배트맨의 강박과 엄숙주의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걸맞는 악과 무질서를 필요로 하고, 나아가 소환한다. 배트맨에게 있어 조커는 재앙이지만 조커의 진정한 최후는 배트맨을 악당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 하비 덴트; 투페이스는 이런 배트맨이 타락할 경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악당이다. 그는 고담시의 촉망받는 검사였는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정의에 대한 믿음을 잃고 악당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투페이스는 동전 하나를 들고 다니며,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늘 동전을 던져 생사를 결정한다. 그는 강박적인 규칙에 얽매여 스스로 좌절하는 배트맨과, 끝없는 무질서를 몰고다니며 배트맨을 조롱하는 조커의 중간에 있는 존재로서 상징하는 바가 크다.

- 주인공이 심리적으로 영 불안한 사람이라 그런지... 배트맨이 상대하는 악당들은 유난히 그냥 미친놈들이 많은 편이다. 그러니까, 세계를 지배한다던지, 떼돈을 벌 거라던지, 여자 때문이라던지, 가족 때문이라던지, 뭐 이렇게 이해할 만한 이유로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냥 사람 죽이는 게 재밌다거나, 사람을 잘 죽이는 게 유일한 자존심이라거나, 단지 배트맨이 거슬린다거나, 극단적으로는 조커나 리들러처럼 놀고 싶어서라거나... 이렇게 극단적인 악당들이 유독 많이 나오는 시리즈라면 선악의 경계가 명확해야 할 것 같은데 별로 그렇지가 못하다. 결국 배트맨 시리즈는 이들 모두를 한 덩어리로 묶어서, 신경증에 시달리는 세상의 불안한 단면을 묘사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 배트맨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싶다면 그 어떤 만화나 영화보다 최근 게임으로 나온 <배트맨 : 아캄시티>를 한 번 플레이해 볼 것을 권한다. 나름 오픈월드 게임을 지향하다 보니 '배트맨의 일상생활' 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기에 적절하다. 메인 악당은 물론 조커지만, 이외에도 배트맨 시리즈의 대표적인 슈퍼빌런들이 등장하는데... 정녕 어찌나 다채롭게 미친 놈들인지; 세시간쯤 플레이하면 배트맨이 제정신과 제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특히 수시로 전화 걸어서 떠들어 대는 조커랑 툭하면 공중전화로 살인예고 하는 라자즈.... 확 그냥...

- 배트맨이 탄생한 1940년대는 사립탐정과 팜므파탈이 등장하는 느와르물이 유행하던 시기다. 무능한 경찰, 신출귀몰한 범인, 미궁에 빠진 사건, 정체불명의 여인, 그리고 유능한 사립탐정이 등장하는 이야기. 배트맨이 '탐정만화' 로 데뷔했다는 걸 되새기자면 (그리고 80년대가 되도록 '탐정'으로 통했다는 걸 돌이켜보자면) 사실 이 캐릭터가 모든 사립탐정의 원형인  셜록 홈즈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배트맨의 신경질적인 면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이 <다크나이트 리턴즈>가 출간되고 팀버튼의 영화가 개봉한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이란 걸 상기하고, 최근 가장 핫한 영드 <셜록>시리즈의 셜록 역시 딱히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걸 돌이켜 보자. 셜록 시즌2에 등장한 모리어티의 모습에선 조커의 향기가 많이 느껴지기도 했다. 내 느낌이지만 장르물의 발전 경향이란 게 어느 정도는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 잉여력 대폭발 시리즈는 아마도 한동안 계속됩니다. 다음은 우리들의 후렌들리 네이버후드, 스파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