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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들/잉여력대폭발

[잉여력대폭발] 슈퍼히어로 평전 : 세번째, 캡틴 아메리카

본명 : 스티븐 로저스 (Steven Rogers)

직업 : 군인 (캡틴이라니까...)

활동지역 : 2차대전 당시 전장. 현대에는 주로 미국.

능력 : 슈퍼솔져 혈청의 힘으로 인간의 근력 및 반사신경을 극한까지 발휘함.

절대 파괴되지 않는 비브리늄 재질의 방패 소유.

숙적 : 레드스컬, 바론 제모 및 나치와 일본군들. 이외에 어벤져스 공통의 적들.

첫등장 : 1941년, 캡틴 아메리카 (Captain America #1)

 

- 미국적인 슈퍼히어로를 논할 때 DC의 슈퍼맨과 함께 빼먹을 수 없는 캐릭터인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 이름부터 무려 '미국대장' 인데다가 직업은 군인. 그것도 2차대전중에 최전선에서 싸우던 인물이며 유니폼 및 분신과도 같은 방패에는 성조기가 보란듯이 그려져 있다. 슈퍼맨이 초인적인 힘과 선한 마음으로 이땅에 팍스 아메리카나를 이룩하려는 미국의 정신을 은근히 보여준다면, 캡틴 아메리카에게서 그따위 섬세함(?)은 찾아볼 수 없다.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에 대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이 히어로는 미국 그 자체다.

- 물론 아무리 애국심에 불타는 고리짝 작가라 하더라도 이따위 캐릭터를 제정신으로 창조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캡틴 아메리카가 데뷔한 1941년이란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캡틴 아메리카가 데뷔한 시기는 정확히 1940년 겨울이었는데, 이 때 나치 독일의 기세는 그야말로 절정에 달해 있었다. 비시정부 수립으로 프랑스 정복은 마무리되었고, 런던 무제한 폭격으로 바다 건너 영국을 압박하는 한편 바르바로사 작전 (소련침공 계획) 도 착착 궤도에 오르던 시절이었으니까... 그야말로 히틀러가 정말 세계를 집어삼킬 것 같았던 시대였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고립주의를 유지하며 공식적으로 참전의사를 밝히지 않았지만, 무기대여법 http://j.mp/HLZuy8 을 실행하는 등 연합국에 호의적인 입장은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요컨대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이었으며, 미국 입장에서는 국내 정치적 사정을 확실히 다져두기 위해 어쩌면 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와중보다 프로파간다가 더욱 필요한 시기였다는 뜻이다.

- 결국 그는 태생부터 명백히 정치적 목적을 가진 영웅이었다. 캡틴 아메리카 탄생 초반부의 이야기를 대강 살펴보자 : 스티븐 로저스는 비록 육체적으론 허약하지만 국가에 목숨을 바치려는 충성심만은 누구보다 강한 청년이었는데, 그의 강인한 마음을 알아 본 국가에 의해 '슈퍼솔져 프로젝트' 에 투입되어 인간의 잠재능력을 극한까지 끌어낸 슈퍼 군인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2차대전에 투입된 캡틴 아메리카는 든든한 동료, 아리따운 여군의 도움 아래 사악한 나치와 일본군을 무찌르고 미국을 지켜낸다... 이건 뭐 국방부에서 찍어낸 만화도 아니고 (;;) 우스울 만큼 노골적인 국가주의의 상징이란 점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DC의 슈퍼맨과 구별된다. 난 사실 이렇게 노골적인 캐릭터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이 더 무섭지만...

 히틀러 아구리를 날리며 데뷔한 캡틴 아메리카

- 사실 캡틴은 무능력하다. 슈퍼솔져 실험을 통해 '인간의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냈' 다고는 하는데 뭐 육백만불의 사나이급은 아니라서 가끔은 맨손의 악당에게 쥐어 터지기도 한다; 또한 그에게는 무기가 없다. 대신 주어진 것은 절대 '깨어지지 않는' 방패다. 이렇게나 빈약한 능력을 가지고도 그가 영웅노릇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굳건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영웅의 의지 :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 생명, 환경 등등 여하튼 좋은 것들을 향한 무서울만큼 강인한 믿음! 강인한 믿음과 깨지지 않는 방패를 가진 캡틴은 사실 적을 잘 깨부수는 영웅이라기보다는 그 어떤 시련과 공격에도 절대로 굴하지 않는, 그래서 언젠가는 승리하는 영웅이며, 어쩌면 이것이 1940년대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미국적인 가치의 현현이었던 것이다.

- 하지만 종전 이후 대부분의 히어로물이 쇠락의 길을 걸었고, 캡틴 아메리카도 인기를 잃은 뒤 종간되어 한동안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스파이더맨 등이 주도한) 1960년대의 히어로물 부흥기에 조심스럽게 부활하게 되는데, 물론 이 구닥다리 정치찌라시 히어로를 이른바 '데탕트' 의 시대에 다시 꺼내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복간이 결정된 것은 뭔 생각이 있단 뜻이었을 테니... 마블은 캡틴 아메리카가 2차대전 당시 북극에 추락하여 냉동되었다가 현대에 다시 깨어났다는 설정 아래 2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현대에 되살리게 된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현대화 과정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이 설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현대에 부활한 이후 그는 애국심에 불타는 열혈 청년이 아닌, 구닥다리 신념까지도 냉동보관하여 돌아온 노인네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를 수정보완할 수 없다면, 그를 둘러싸고 바라보는 환경을 바꿔버리겠다는 것이었을텐데, 이 결단이 결국 이 구닥다리 캐릭터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다. 캡틴은 히어로팀인 어벤져스의 실질적 리더로 등극하여 아직까지도 마블 유니버스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얼마 전 영화로도 데뷔해서 그럭저럭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더 두고봐야겠지만.

- 캡틴은 스스로를 노인이라고 칭한다. (곧 등장할 영화판 <어벤져스> 예고편을 보니 거기서도 그렇게 말하는 모양이다) 물론 그의 육체는 아직 쌩쌩하니까, 이것은 그의 정신이 낡았다는 걸 그 스스로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는 오래된 미국이다. 너무 낡았다는 이유로 현대의 미국인들이 가끔 잊거나 현실을 핑계삼아 무시하는 모든 가치와 지혜들, 예컨대 정의, 자유, 민주주의 등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로지 그런 것들을 위해서만 행동한다. 그는 자체 시리즈물보다는 (주로 2차대전 당시의 에피소드를 다루는 편이다) 다른 히어로들과 함께 등장하는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존재감이 도드라지는 편인데, 이는 현대에 부활한 캡틴의 존재의의가 직접 방패를 들고 적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닌, 굳은 의지로 영웅들을 단결시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실상부 마블 유니버스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인 어벤져스 단결구호, 어벤져스, 돌격! Avengers Assemble! 를 외치는 것이 캡틴이라는 것은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요컨대 오늘날 캡틴은 영웅들의 멘토이며, 마블 유니버스의 활동하는 현자로 기능한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이름도 대장이잖아...)

- 대선이 한창일 때 오바마가 외치던 말을 떠올려본다. "미국은 어떤 국가입니까?" 민주당은 애국법 재정,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및 관타나모 수용소의 악행으로 더럽혀진 공화당의 미국을 비판하며 '미국은 원래 그런 국가가 아니' 라고 이야기했다. 미국인들은 길을 잃었을 때 과거로 돌아간다. 미국이 처음 세워질 때 국부國父들이 외치던 말을 기억하며 그들의 길을 가려고 노력한다. 캡틴 아메리카는 바로 그 국가를 상징한다. 얼핏 유치찬란해 보일 수 있는 캡틴 아메리카란 히어로를 결코 단순하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냉동인간이 되어 돌아온 캡틴은 애초에 그가 태어났던 1940년대보다 훨씬 더 옛날의 신념, 독립전쟁 당시의 신념을 안고 현대로 날아온 셈이다. 그러니 많은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캡틴 아메리카의 국가주의가 곧바로 미국 패권주의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캡틴이 상징하는 건 그냥 미국일 뿐이다. 캡틴 그 자신이 알다시피, 아주 낡은 미국.

- 참고로 국내 및 유럽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퍼스트 어벤져>란 이름으로 개봉했다. 이름에서 미국색이 너무 짙게 느껴지는 탓이었다. 뭐... 어쩌면 이 캐릭터는 태생부터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기엔 글러버린 괴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 알고 보면 생각처럼 마냥 단순한 히어로는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