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득문득 떠오르는 단상들을 정리하는 습관은 중요한 거다. 뭐 포스트모더니즘적 글쓰기 같은 걸 시도하자는 건 아니고... 여하튼 오늘의 유로 시작 전까지 짬내서 간단히, 메모 겸 일기로서의 포스팅.
-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을 점점 더 체계적으로 인지하게 되는데, 예컨대 '문화산업' 이라던가 '자본주의' 같은 단어가 구체적으로 지칭하는 시스템과 그것이 작동하는 원리, 혹은 구성요소에 대해서 나름의 윤곽을 잡고 성격을 부여하고 가치판단을 하려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세상을 분석 분류하여 시험공부하듯 개념정리하고 있다는 뜻인데, 보통 '이성적' 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방향으로의 지성발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나... 반대급부로는 점점 더 새로운 체계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와 습득이 느려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게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즉 듣도보도 못한 체계를 접하게 되면 일단 그 작동원리와 구성요소와 역사적 근원을 알아내야만 하며, 그것을 알아내지 못하는 이상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허나 세상이 어디 그렇게 쉽게 분석되고 파악되는 시스템의 합으로만 되어있더냐... 설령 그렇다 한들 그걸 다 공부하고 있을 만큼 부지런한 성격도 못되고. 결국 이런 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정말 빼도박도 못하는 어른이 되는 건 아닌가, 하고 씁쓸해하는 중이다.
- 이런 변화와 함께 나타나는 게, 자꾸만 사교육을 일종의 탈출구 비슷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르는 게 있으면 일단 부딪혀서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돈 주고 배우면 좀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먼저 든다는 뜻. 나는 뭐, 요사이는 백수로 살았다지만 그래도 경제주체로서의 생활기간이 3년 가까이 되는 동안 이런 사고방식이 좀 고착화된 것 같기도 하다. 허나 그간 이것저것 배우면서 느낀 거라곤, 제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있다고 한 들 세상에 누군가 손쉽게 가르쳐줄 수 있는 기술이나 지식이라곤 없다는 것 뿐. 그러고 보면 초중고에 대학교까지 졸업하면서 늘 중얼거리고 살았던 건데 대체 왜 엄청난 깨달음처럼 느껴지는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체계나 지식, 좀 더 구체적으로는 운동, 예술, 영어 등등의 제반 분야 앞에서 실감하는 막막함이 덜해질 날이 올 것 같지는 않다.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다만 이 막막함을 떨쳐낼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 사교육의 역할이 충분하다고 할 지 모르겠으나, 나는 일평생 학원이란 걸 몇 번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인지라 초기의 거부감이 좀 심한 건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배워봐야 별 것도 없는데 돈이 아깝다는 거지...
- 그러고 보면 '소설같은 걸 어떻게 쓰냐' 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늘 '그냥 쓰면 된다' 고 대답해 왔다. 그 대답에는 하등의 거짓도 비아냥도 담겨있지 않다. 정말 그냥 썼으니까... 대학시절 창작관련 수업을 들어본 바에 따르면 '더 잘 쓰기' 위한 비법도 별로 다르지 않다. 그냥 써야지 뭐; 그러니 누군가 소설을 쓰기 위해서 사교육을 받는다고 하면 나는 정말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지금 내가 배우러 다니는 것들을 보고 누군가는 비슷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든다. ('노래같은 걸 어떻게 써요?' 라고 물었는데 '그냥 쓰면 된다' 고 대답한다면 정말 열받을 거 같다...) 음음. 그러고 보면 세상 누군가는 아이폰도 돈 내고 배우고 SNS 사용법도 돈을 내고 배운다. 그 분들도 언젠가는 그냥 하면 되는 사람이었을텐데. '그냥 하면 되는' 사람이 갑자기 '돈을 내고 배워야 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이유는 뭘까...
- 멀리 있는 사람 얘기하듯 말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세대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 관계는 죄악이라는 게 내 기본적인 세계관이다. 사람간에 맺는 것이건 사람과 사물간에 맺는 것이건 마찬가지다. 허나 죄악이라는 워딩이 좀 센 것 같기도 하니 일단은 뭐, '마일리지' 같은 걸로 해 두자. 마일리지가 쌓이는 건 어느 존재에게나 위태로운 일이다. 그러니까 그게 선의에서 비롯된 옳은 일이건, 악의에서 비롯된 옳은 일이건, 혹은 선의에서 비롯된 그릇된 일이건, 악의에서 비롯된 그릇된 일이건, 그걸 따지는 건 적합하지 않다. 혹시나 선의에서 비롯된 그릇된 일, 아니면 미처 모르고 자행된 그릇된 일을 수정하기 위해 버둥댄다면 그건 더 큰 혼란, 불필요하고 복잡한 윤리적 문제만을 불러올 뿐이다. 세상은 수정이 불가능한 수묵화와도 같다. 섣부른 덧칠은 늘 존재를 망친다. 다른 말로 바꿔보자면, 속죄와 구원은 불가능하다.
- 대신 부채의식이 중요하다. 일전에 배철수씨였나. 40세 이상이 된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를 욕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던 것 같다. 아무리 세상이 이상하고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더라도, 결국 자기가 만들어 낸 세상이라는 뜻이었다. 뭐 정작 내가 그 나이가 됐을 때 이 말을 얼마나 야속하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서두... 아무튼 지금도 나는 그 정도의 부채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나라나 이 사회가 아무리 수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로 가득 찬 것 같더라도, 나 스스로가 그 부조리에 일정부분 편입되지 않고서는 여기까지 살아올 수 없었음을 알고 있다. 예컨대, 분명코 나는 학벌사회의 덕을 보고 있고, 지구상 어디선가 자행되는 아동노동 착취의 덕을 보고 있으며, 부당하고 더러운 우연을 통해 나태함을 지속적으로 용서받고 있다. 또한 그 모든 이권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졌다고 말할 자신도 없다. 그러니... 사실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없다. 이 모든 시스템을 부정한 뒤에 보다 '나은' 세상을 제시할 자신도 없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가능성도 없는 것 같다) 속죄와 구원보다는 부채의식이 중요하다는 말은, 어쨌거나 일단은 이걸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나는 사람들이 일단 이걸 인식하기만 해도 세상의 많은 부분이 바뀔 거라고 믿는다.
- 왜냐하면 마일리지는 주고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에게 무수한 죄를 짓는다. 일반적인 방법을 통해 자식이 그걸 갚아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어마어마한 죄의식에 질식하지 않고 지속되는 이유는, 보통의 경우 증오에 가득차서 자식의 죄값을 모두 받아낼 것을 기도하는 부모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출산과 육아는 수많은 부모에게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자 삶의 이유이기도 하다. 관계 '마일리지' 의 가치판단은 늘 이렇게 자의적이다. 고개를 돌리는 것이 어려울 뿐, 일단 생각이 전환될 수만 있다면 거대한 증오는 거대한 사랑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거대한 마일리지는 거대한 에너지를 가지고 늘 존재를 위협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언제나 그 '양' 에 있다. '질' 적인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 '양' 을 인식하고, 즉 부채의식을 갖고 거기에 뭔가를 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 요컨대 태어난 것 부터가 잘못이고 그 나이까지 살아온 게 잘못이며 수정할 방법도 없으니까 그냥 최대한 조용히 있다가 가자는 거다. 그럴 바에는 왜 사냐? 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 문제는 패스. 까뮈의 <시지프 신화>의 첫대목을 인용하자면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 그러고보면 부처님은 "관계는 고통이다" 라고 했던 것 같다. 글쎄, 공부해 보면 비슷할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건 세상엔 답이 없다. 부처님 시절부터 그랬으면 2600년 가까이...
- 헬스장 달리면서 생각한 게 몇가지 더 있는데 나중에 덧붙이기. 축구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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