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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아이디어 : 캐릭터 중심의 자체완결적 서사

- "캐릭터 중심의 자체완결적인 서사." 한국에서 굉장히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서사문법이라고 본다. 결함이 있는 인물들을 잔뜩 출동시켜서, 그 결함으로 말미암은 갈등이 파국으로 치달은 끝에 어떻게든 마무리되는 방법이랄까. 이런 이야기 전개방식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장르가 TV 드라마, 그중에서도 대가족이 복작거리는 홈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 이 장르의 히트상품은 KBS <넝쿨째 굴러온 당신> 일텐데, 한번에 정리도 잘 안되는 사건과 갈등들이 두서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럭저럭 이해가 잘 가는 편이다. 이건 애초에 이야기의 중심이 사건이 아니라 캐릭터에 있기 때문이다. 연속극은, 특히나 주부를 대상으로 한 연속극은 그래야 한다. 처음 2회 정도만 잘 보고 캐릭터 파악만 대충 끝나면 언제 어느 때나 이야기 흐름에 젖어들 수 있게끔 만드는 구조. 어찌보면 시트콤과도 흡사하다 할 수 있겠다.

 

- 그러나 월화드라마나 수목드라마같이 비교적 시청자의 집중도가 높은 장르에서도 이 문법은 흔히 쓰이는 편인데, 이 경우에는 전형적인 영웅담을 자체완결적인 서사로 살짝 변형시켜서 적용된다. 요컨대 '영웅이 난관에 봉착하나 이를 극복하는' 이야기에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고 마침표를 찍는 형태랄까. 이 마침표를 찍기 위해 주인공은 그냥 결함이 아니라 '근원적인 결함' 이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가장 흔히 써먹는 게 출생의 비밀. 근데 사극이나 판타지 만들 거 아니면 사실 이거 이상 가는 게 없다... 드라마 기획안 생각하다 보니 알겠드라...) 근원적인 결함으로 인하여 주인공은 영웅이 되고, 근원적인 결함이 폭발하여 이야기의 주된 갈등을 형성하고, 근원적인 결함이 해결되며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나게 된다. 눈여겨 볼 것은, 사건이 중요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캐릭터의 중요도가 더 높다는 것이다.

 

- 또한 주목할 점은 '완결된 서사' 라는 점이다. 캐릭터를 완결시키는 서사는 확실히 극적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시청자 (혹은 독자) 에게 어떤 인물의 '가장 뜨거운 순간' 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한정된 자원과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를 완결시켜야 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플롯의 가시적인 효과는 큰 유혹일 수밖에 없다. 나는 한국의 드라마/영화 시장에 캐릭터 중심의 서사가 넘쳐나는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통적으로 픽션을 경시하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분명히 했던 문화의 영향도 있겠지만.

 

- 한가지 더 : 이 땅에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백이면 백 "그래서?" 라고 묻는다. 요컨대 기획의도가 확실하고 주제의식이 뚜렷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캐릭터 중심의 자체완결적인 서사" 가 가지는 특징과 정확하게 부합한다. 서사는 이야기이며, 이야기란 메시지이며, 메시지는 뚜렷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 뚜렷한 목적을 가진 이야기는 끝을 명확히 하기 마련이다. 조금 차갑게 말하자면 이런 목적 하에 만들어진 캐릭터는 주제와 목적의식을 위해 봉사하는 작가의 도구일 뿐이다.

 

- 그래서인지 역설적이게도, 캐릭터 중심의 서사는 캐릭터가 이야기와 함께 매장되는 현상을 만들어낸다.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는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수명을 다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에는 슈퍼히어로물이 없고, 드라마 시즌제, 시트콤 시즌제, 뭐 애니메이션 시즌제도 없다. 캐릭터가 죄다 1회용이기 때문이다. 음.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야기는 없고 캐릭터만 있기 때문이다.

 

- "사건 중심의 개방적인 서사" 를 위해서는 좀 더 넉넉한 자원과 시간, 그리고 서사에 대한 치밀한 '애정' 이 필요하다. 목적이 아니라 애정이다. 나는 애정을 가지고 만들어낸 이야기에는 좀 더 다층적이고 '리얼한' 목적의식이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굳이' 이야기를 만든다는 행위 자체에 이미 연출 Directing 의 의미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영상학적으로 치자면 타르코프스키의 미쟝센과도 같은 의미랄까...

 

- 세상이 이야기를 대하는 태도가 세상이 세상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나의 평소 지론이다. 조금 바꿔 말하자면 사람들은 세상이 이야기 같기를 바란다. 기승전결에 따라 선이 승리하고 악이 징벌받는 뭐 그런 곳. 이런 걸 갖구 진실과 사실을 따지는 게 리얼리즘 담론이긴 하지만, 어쨌든 서로가 서로를 그려나간다는 것이 이 담론에서 말하는 진실과 허구의 재미난 속성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느냐, 하는 점이 '어떤' 세상을 만드느냐, 하는 점도 조금은 결정하지 않을까?

 

- 그러므로 서사행위에 애정을 가집시다. 아, 이게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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