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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Diary / Journal

역사를 서술하는 태도

- 사실 '역사를 왜 배우냐'는 질문에 그다지 설득력 있게 대답하는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다. 과거를 통해 교훈을 깨달아서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서, 라는 대답이 그나마 가장 정석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목적으로 배우는 역사가 그 목적에 꼭 합당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 같지도 않고, 또 지금 역사란 명목으로 파생된 수많은 학문들이 반드시 이런 목적에 합치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르네상스 미술사' 라는 것은 우리의 미래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 교훈을 전달하는가? 이 질문에는 또다시 그다지 직관적이지 않은 설명들이 얼기설기 붙을 수도 있겠지만서두,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정리가 되지 않나 싶다.

 

1) 거기에 역사가 있으니까

2) 재밌으니까

3) 민족국가의 이데올로기 형성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니까 : 즉 근대적 국민교육의 일환으로.

 

- 고로 민족주의에 염증을 느끼는 무정부주의자로서 과거에 있었던 일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굳이 역사를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싶은 게 내 솔직한 생각이다. 그리고 여태껏 만나본 사람 중에 굳이 역사를 배우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무식함을 견디지 못하는, 그러니까 순수한 지적 호기심/혹은 교양에 대한 갈망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 '교양에 대한 갈망' 을 또 이리저리 풀이해 보자면 재미있는 심리적 기재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건 내 마음도 아니니까 거기까지만 해 두고...

 

- 나와 같은 경우에는 두번째, 재미있으니까 정도의 핑계를 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정확히 얘기하자면 내가 관심있는 건 '과거에 있었던 일' 이 아니라 '오늘날에 서술된 역사' 에 가깝다. 즉 무미건조한 현실의 집합이 아니라 플롯과 캐릭터와 사건을 갖춘 채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들의 합, 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 되겠다. 이 말인즉슨 흔하고 뻔한 어느 시대의 장삼이사가 어떻게 농사를 짓고 어떻게 길쌈을 하며 살다가 죽었는지는 내 관심사에 조금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난 미시사가 싫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미시사에서 플롯과 캐릭터와 사건을 뽑아내서 흥미진진하게 읽어 내려갈 만한 재주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미시사가 재미있어지는 부분이라면 그 미시사가 어떤 거시사에 살을 좀 더 붙여서 이해를 다각적으로 만다는 부분 정도랄까. 예컨대 프랑스 혁명 직전에 평범한 농민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탈을 당했는가, 같은 미시사라던가...

 

- 그런데 교과서적인 통사 서술은 대부분 그 시대에 알아야 할 이야기들을 종합해 놓는 것에 만족하고 끝을 맺는다. 삼국시대의 정치사, 경제사, 문화사를 '순서대로 줄줄' 읊어 놓고 책 딱 덮는 거다. 결국 총체적 안물안궁의 소굴인 셈이니 이런 책이 재미있을 턱이 없다. 게다가 이런 식의 서술은 '그 시대에 일어났던 일' 중에 우리들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들' 이 있다는 전제를 세운 채 진행되기 마련인데, 그런 식의 전제는 늘상 어떤 권위를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역사학계의 합의라던가, 정치적 합의라던가... 그럼 꼭 거기에 어깃장을 놓는 목소리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온다. "우리는 이런 것도 알아야 한다!" 는 식으로 말이지. 이런 목소리들을 일일이 수습하야 시대마다 어떤 것을 알아야 하고 어떤 것은 몰라도 되는지 취사선별해서 가르쳐 주는 것이 이른바 교육이라는 것일 터인데, 중요한 것은 정작 이 모든 것들을 외우고 알아야 하는 학생의 의사는 이런 의사결정 과정에서 아오안이 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난 그 교육학이란 것에서 이런 맹점을 어떻게 다루는지 퍽이나 궁금하다. 즉

 

1) 수많은 사실 중 어떤 것을 가르칠 것인지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의 합의를 통해 어떻게 결정할 것이며

2) 그렇게 결정된 합의 사항은 학생의 의사와 얼마나 연관을 맺고 있는지

 

- 어쨌든 나는 교육자가 아니고 또 역사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내가 재미있는 방식대로 쓰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플롯과 캐릭터, 사건을 통해 써 나가는 역사는 위에서 이야기한 1)과 2)의 문제를 대부분 (비교적 긴 노력 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다. 어떤 것을 써 내려갈지는 '합당함'을 존재 의의로 하는 플롯느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며, 2)같은 경우에는 어차피 교육의 일환이 아니라면 서로에게 강제성이 없는 거니까. 이런 식의 '내러티브 역사' 가 가지는 매력은 이렇게 단순한 것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역시나 1)의 문제를 플롯느님이 얼마나 잘 해결해 주실 것인가, 라는 점이 되겠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사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딱 잘라 말하자면 왜곡, 과장, 비약 혹은 반 시대적인 시점 등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라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이다.

 

- 하지만 그런 건 결국 소설, 특히 장편소설을 쓸 때에도 같은 문제가 되기 마련이고... (*소설이 상상력으로 채워진 가상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느 정도 이상의 분량을 써 내려간 소설은 의외로 사실에 관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이건 뭐 써보면 뼈저리게 다가오는 일이기도 하고 어느 순간 장편을 쉽사리 쓰기 어려워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럴 때 의지하게 되는 건 결국 작가 자신의 양심과 굳건한 의지, 뭐 그런 거 밖에 없는 것 같다. 결국엔 나를 믿어야 글이 나온다는 생뚱맞은 결론.

 

-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느냐 물으신다면, 뭐 이 블로그가 언제는 독자의 동의를 구하고 글쓰는 장소였습니까

 

201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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