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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Diary / Journal

<위플래시>를 감상하는 태도

 

 

* 스포일러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걱정되는 사람은 그냥 보지 마세요...

 

- <위플래시>는 뻔하지만 신선하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사람마다 이 영화를 '뻔하게 본 방식' 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개같은 스승을 밟고 일어서 예술의 한 장을 펼쳐낸'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것이냐, '괴팍하지만 헌신적인 스승의 헌신적인 가르침에 힘입어 예술의 한 장을 펼쳐낸' 학생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것이냐... 하는 점이 그것이다. 어떻게 같은 이야기를 보고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지가 신비로울 정도로, 이 영화에서 펼쳐지는 학생(앤드류)의 성취와 선생(플렛쳐)의 역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그야말로 극과 극을 달린다. 사실 이건 이 영화가 닳고 닳은 성장극의 문법 - 즉 괴팍한 선생과 자신의 능력을 잘 모르는 천재 학생의 만남 - 을 반복하는 척 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일텐데, 아마도 플렛쳐에게 감정이입을 한 관객은 이 영화가 (어딘가 이상하긴 해도) 여전히 그 문법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이 영화의 플렛쳐는 괴팍한 선생이 아니라 나쁜 선생이고, 학생은 천재가 아니라 평범한 노력파일 뿐이다.

 

- 플렛쳐가 나쁜 선생인 이유는 무엇보다 학생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플렛쳐의 관심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머물렀던 적이 없다. 그저 음악과 음악에 대한 '자신의 기준'에만 충실했을 뿐이지. 앤드류의 선배가 자살했다고 했을 때 그의 애도가 과연 사람을 향한 것이었나, 아니면 그의 연주를 향한 것이었나? 때때로 이 영화의 플렛쳐를 본받아서 후배를 향한 멘토링에 나서겠다고 마음 먹는 사람들이 있어서 '굳이' 하는 말인데, 제발 그러지 말라. 제아무리 성취가 귀하다지만 그보다 귀한 게 사람 아니겠나? 다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츤데레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나?

 

- ...라고 말하는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하는 말은 명백히, "'그만하면 됐어' 라는 말이 최악"이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이 메시지에 집중하여 영화를 읽은 사람들은 적어도 예술이 가지고 있는 모종의 비극성에 대한 암시를 찾아냈을 것이다. 이 영화가 그렇게나 추켜세우는 재즈 뮤지션 찰리 파커가 술과 마약에 찌들어 34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굉장히 명백한 사실이니까.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는 불행한 삶을 살아간 끝에 요절한 예술가들을 숱하게 알고 있으며, 그들의 좌절과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을 '시대의 명작' 이랍시고 추켜세우는 것이 너무나도 파렴치하고 무서우며... 사실 덧없는 일이라는 결론에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만하면 됐어' 라고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그럭저럭 살만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칠십년 인생' 을 살 것인가, '힘들고 지치고 죽을 것만 같지만 모두가 뚜렷이 기억하는 삼십년 인생' 을 살아갈 것인가.

 

- 이 영화가 돋보이는 이유는 적어도 그 '덧없음' 에서 눈을 돌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위의 문장에도 써 놓았지만 예술적 성취의 덧없음을 보상해 주는 것은 딱 하나 뿐이다.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박수, 함성, 그리고 감동. 허나 이 영화에는 그 어떤 형식으로도 '관객' 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관객이 없는 무대만큼 황망한 것도 없고... 9분에 이르는 <위플래시>의 마지막 연주는 참으로 그 황망함의 극치에 있다. 그러니 나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저들이 대체 무엇을 이루었는지, 그걸 이루어서 얻은 것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묻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막판에 관객들이 기립박수라도 쳐 주고 앤드류와 플렛쳐가 뜨거운 눈물이라도 흘렸다면 아마 플렛쳐 안티가 지금의 절반 정도로는 줄었을텐데 말이지.

 

- 여하간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하게 만드는 영화다. 나도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서른 살 되기 전에 명작 하나만 남기고 죽으면 짱 멋진 인생'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하고 살았던 거 같은데, 그 사상의 현신이라 할 수 있는 플렛쳐가 그렇게도 싫었던 걸 보니 나이가 들긴 들었나보다. 흐음, 하지만 플렛쳐에게 감정이입하는 사람들이 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인 걸 보면 또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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