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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아는 것만을 본다"

크로스로드에 김보영 작가의 글 하나가 실렸다. 트위터를 떠돌다가 발견했는데 곱씹어볼 통찰이 꽤나 많은 편.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id=8&para1=121&Board=0025


특히 나는 이 부분이 재미났는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뇌는 아는 것만을 본다.



- 이 얼마나 적확한 표현인가. 몇가지를 덧붙이자면,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 수록 '더 많이 아는 것' 을 포기하게 된다. 수많은 노인들이 오랜 세월을 기울여 탄식한 바에 따르면 나이와 호기심의 총량은 대체로 완만한 반비례 곡선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뭐 서글프다거나 그래서 젊음이 부럽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호기심을 제물로 바친 결과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익숙함이며, 나아가 그 익숙함을 딛고 이룩하는 지식의 깊이이다. 팍 줄여서 표현하자면 그것이 바로 지혜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문제는 그 지혜라는 것의 성질에 있다. 지혜라는 말이 갖고 있는 함의는 실로 무궁무진하지만, 나는 많은 경우 그것이 통찰력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꿰뚫어서 본질을 파악하는 눈. 즉, 복잡하고 난삽한 정보의 틈바구니에서 최소의 노력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나꿔챌 줄 아는 실용적인 능력. 그러니 사실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나에게 필요한 것' 이 무엇인지 자꾸만 스스로 제한을 짓게 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 제한을 잘 지은 사람은 현명한 노인이 되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괴팍한 노인이 된다.


- 요사이 나이 든 사람들이 복잡한 글을 읽어내는 광경을 자주 목격하는 편인데 (...) 몇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 길고 복잡한 텍스트일수록 당연히 그 안에 담겨있는 정보의 절대량도 많다. 그러니 '복잡한 글을 잘 읽는다' 는 평가는 '그 많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술술술 받아들이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사실 독해력의 향상은 정보를 많이 받아들이는 능력이 아니라, 그 많은 정보 중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가려내고 나머지는 버리는 능력, 즉 제대로 된 필터링에 달려있다. 이쯤 되면 고등학교 논술 연습할 때 신문 사설 오려다가 주제문장에 밑줄 치고 중요 부분을 요약하던 게 기억나겠지만... 사실 여기에서도 '필요한 정보' 가 무엇인지 가려내는 기준이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 여기서 위의 김보영 작가는 <인터스텔라>의 서로 다른 독해법에 대해서 이야기했더랬다. 아마도 아버지와 딸의 눈물겨운 소통에 집중하신 분들은 블랙홀이니 중력이니 시간 왜곡이니 하는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 로 판단하고 걸러냈을 것이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정보의 무더기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럴싸하게 들리는... (사실 이 부분이 중요하지만) 이를테면 초상화의 뒷배경과도 같은 것이다. 반면 세상에는 초상화의 배경에 집중하여 인물의 얼굴은 부차적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초상화의 얼굴을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내는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어느 쪽이 텍스트를 바르게 읽고 있는지는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다. 그저 사람마다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극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 사실 저 문장에 꽂힌것도 내가 평소에 생각해 온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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