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사람을 너무 치사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자격지심이 있다
대학생 때는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그때 학교 근처 원룸 보증금이 보통 삼백 내지 오백 정도였다. 엄청 크지 는 않은 돈이지만, 갓 스물이 된 친구들에게 그런 돈이 있을 리 없으니 보통은 집에서 지원해 준 돈이었다. 물론 나는 보증금 삼백 내지 오백을 받지 못했지만 다달이 월세로 쓸 돈과 용돈을 받았고 알바같은 걸 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삶을 꾸려갈 수 있었다. 등록금은 단 한푼도 내 손으로 마련하지 않았다. 이것만 해도 정말 어렵게 사는 남들보다, 대학을 졸업한 것만으로 억대 빚을 지게 되는 남들보다 정말 많은 혜택을 봤다는 걸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내가 조금만 더 부지런하거나 똑똑하거나 검소했다면, 그 삼백 내지 오백 따위 내 손으로 마련할 여지가 충분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까 그냥 멀거니 남들을 부러워하는 나의 그 심정이라는 것이 너무나 치사하고 초라한 것이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동등하게 출발하지 않는다. 격차라는 것은 아래를 봐도 끝이 없고 위를 봐도 끝이 없다. 그걸 어느 누구와 비교하는 것만큼 바보같은 짓이 어디 있을까? 비교를 하려면 아예 재벌집이랑 비교를 하지 왜. 그런데 사람 맘이란 게 정말 이상하지. 그렇게 다른 세상 사는 사람이랑은 아예 비교같은 걸 하지 않으면서...
취직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을 때 좀 더 부러운 건 집에서 무리없이 출퇴근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서울에 집이 있다는 거, 아니면 그냥 거처를 무상으로 마련할 수 있다는 그 사소한 것이 실은 참으로 거대한 권력이었다. 처음에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공간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점유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대한민국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는 나라니까. 물론 자유는 있지만 대가를 치러야 한다. 월에 50만원쯤 하는 대가를. 그나마 내 집보다 편안할 리도 없고, 넓을 리도 없고, 혼자 산다는 외로움을 (뭐 지금은 혼자 사는 게 편하지만서두) 견뎌야 하니까 그 대가라는 게 쉽게 계산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불미스럽게 마무리되고 말았지만, 한때를 풍미했던 팟캐스트 <김생민의 영수증>에서 김생민은 늘 "어지간하면 독립할 생각 말고 집에서 살아라"라고 강조했다. 독립해서 산다는 것 자체가 재정적으로 분명히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이다. 단순 월세만 계산해도 월 오십씩 열두달이면 육백, 이런 식으로 오 년을 산다 치면 삼천이다. 서울에 집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서울에 집을 가진 사람에 비해 이 정도 부담을 추가로 져야 한다. 이 부담을 지기 싫어서 전세자금을 모으려면 억대 돈이 필요한데 이 돈이야 말로 청년이 자기 손으로 모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부모 손을 빌려야 한다. 하아. 여기에 식비나 간식비, 그리고 뭐 전자제품과 가구를 산다거나 하는 기타등등 비용까지 계산하면 격차는 훠어어얼씬 클 것이다. 가끔씩 이런 계산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그것 또한 그렇게 치사하고 초라할 수가 없었더랬다...
요사이는 너무나 명랑하게 자신의 재산 수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 때문에 괜히 치사하고 초라한 감정을 느낄 때가 꽤 많다. 그러니까 내 연봉이 얼마고, 내가 얼마짜리 집을 살 것이고, 우리 부모가 얼마를 주었으며, 얼마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여유 자금으로는 얼마 정도가 있다. 등등등등... 이런 걸 세세히 밝히는 것에 무슨 의도가 있을까? 아마도 없을 확률이 높다. 그냥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 밝히는 걸텐데, 그걸 대충 짐작하면서도 들을 때마다 자꾸만 내 신세를 생각하게 되는 나 자신이 너무나 치사하고 초라해지는 것이다...
그냥, 이사할 시즌이 돼서 이곳저곳 쑤시고 다니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엔 가난한 걸 잘 모르고 살다가 이사갈 때가 되면 참 뼈저리게 느낀다. 이런 신세를 평생 벗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 아득한 기분이 들 때도 많다. 나도 부모가 한 1억쯤 툭 툭 던져줄 여유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많이 한다. 현실은 그저 아프지 않으시면 다행이지만서두... 새삼 느끼지만 부모 친척이 돈줄인 경우와 짐인 경우 삶의 격차란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엔 나보다 훠어어어얼씬 심한 짐을 짊어지고 사는 젊은이가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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