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소 어린 것들을 접할 일이 없는데 최근 며칠 새 일때문에 강의를 하다보니 이래저래 잡생각이 많아졌다.
어린 시절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한숨과 함께) 빨리 좀 커라." 였더랬다. 그게 뭐 빨리 철 좀 들어라, 이런 종류의 푸념은 아니었고, 어린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이상한 공포와 아집,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 하등 사소하고 불필요하지만 지켜야 하는 규칙 (예를 들어 뭐 그림일기 나 곤충 채집같은 방학숙제를 해 가야 한다거나...) 에서 벗어나 '말이 통하는' 성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어렸을 때는 이런 뜻을 알면서도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는 거냐며 투덜거렸던 기억만 나는데, 어느덧 삼십대 중반에 이르고 나서 보니 그게 무슨 말인지 좀 알 것 같다. 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딴 거 다 필요없다고 깨 버리기엔 한없이 견고한 것이 어린이의 세계 아니겠는가.
그런데 또 한편으로 삼십대 중반에 이르고 나서 보니, 그걸 사소하고 필요없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가, 싶은 의문도 든다. 이런 사고방식은 그러니까 마치 애벌레가 변태를 거쳐 성충이 되듯, 일단 성충이 되고 나면 애벌레 시절에 무슨 고민을 얼마나 했든 그딴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는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일정부분 그게 맞기도 하다. 그 시절엔 대체 왜 그러고 살았나, 싶은 고민이 굳이 어린이 시절 뿐 아니라 스무살 이후로도 넘쳐나니까.
그런데 과연 그런가? 과연 어린 시절은 오로지 성인이 되기 위한 자양분으로서만 중요한 것인가? 그럼 나중에 도움이 될 만한 고민만 하고 나머지는 빨리빨리 치워버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동교육에서 내린 결론이 아닌가 싶다. 예컨대 소파 방정환 선생께서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그 아이가 누리는 삶과 세계도 나름의 완결성을 갖춘 것임을 인정하자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인정하기 어려우면 적어도 무시라도 하면 안되겠지. 어쨌든 인생의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소중한 거니까.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제아무리 나이가 찬 어른이라 해도 우리 모두는 가슴 속에 어린이 한 명씩을 키우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개 어린시절의 어떤 순간에 박제되어 모종의 이유로 평생을 함께 하는 어린이들. 그 어린이들은 참 이상한 공포와 아집, 사소한 것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 정말 불필요하지만 지켜야 하는 규칙 등에 사로잡혀 있으며... (대개 입맛 같은 것들이 참 많다. 아니면 뭐 양말 개는 방식이라던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어른들이 그 어린이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경우가 참 많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그러고보면 참 불합리한 일이다. 인간의 성격과 생활 습관은 대개 어렸을 때 형성된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켜내기가 어렵고,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고, 무제한으로 쏟아지는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지혜도 갖춰지지 않은 시기에 우리는 인격을 형성하고, 고집을 만들고, 가치관과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심지어 이 과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는 부모라는 사람들은 대개 검증되지 않은 지식과 가치관, 고집, 생활습관을 자식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어린 시절의 틀을 깨부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냥 아이들한테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생각하다보니 이런 생각들이. 나는 중2때 처음 소설을 썼고 중3때 가장 열심히 썼는데, 지금 내 강의를 듣는 아이들이 딱 그 정도 나이가 된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까지 글쓰기로 벌어먹는 내 인생의 길이 그 무렵에 거의 결정되었다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아이고, 지금 생각하면 참 얼토당토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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