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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중에

잡생각 정리: 민주정과 공화정 그리고 로마 제국의 멸망

- 회사 일 때문에 근 3주째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에 대해서만 생각하다보니 (...) 정신이 살짝 이상해진것 같다. 그건 일단 접어두고...

 

- 로마의 흥망성쇠에 대해서라면 거의 16세기의 마키아벨리부터 (16세기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블로그에 글쓰면서까지 고증에 철저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는 지겨워;) 몽테스키외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계획한 사람들과 미국 혁명을 지도한 사람들, 중남미에 공화국을 세울 것인가 입헌군주국을 세울것인가를 고뇌했던 사람들과 20세기의 내로라하는 학자들... 그리고 20세기 들어 세계 곳곳에 독립국가를 만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고뇌와 고민을 거쳤으니 내가 이제와서 얼마나 참신한 생각을 내놓거나 좀 더 쉬운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싶은 위축감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건 다 로마가 왕이 없었던 나라 중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흥했던, 그것도 무시무시하게 흥했던 나라라는 사실 때문에 18~19세기에 들어 왕과 귀족들을 싫어하게 된 사람들이 죄다 로마사를 들여다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로 왕이 없는 나라가 잘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 전범같은 걸로 로마사를 참고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문득 느끼는 건데 어린이 역사책에서 로마사를 균형잡히고 깊이있는 서술로 깔끔하게 정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건 어떤 식으로든 주관이 개입하게 될 수밖에 없는 영역이며,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관대로 로마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하고 그 레토릭을 현실 정치와 학문에 이용해 왔다.

 

- 일단 로마사 공부의 고전이 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같은 경우에는 (사실 내가 다른 걸 안 읽었다. 마키아벨리라던가 몽테스키외라던가...) 로마의 흥망성쇠의 비결을 '공화국 시민들의 빛나는 덕성'으로 보았다. 아니, 기번은 쇠망사를 썼지 참. 그러니까 로마가 멸망하게 된 이유는 '공화국 시민들의 빛나는 덕성' 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게 그거잖아!) 이게 바로 플라톤의 <국가>에서 출발해 아리스토텔레스와 로마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에 부활했으며 계몽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꽃을 피우게 되는 (헉헉) '공화주의'라는 사상의 기원이다.

 

-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와 다르다. 일단 민주주의는 정체(政體)와 관련된 문제이다. 즉 국가라는 것을 운영하는 하나의 방법이 이념화한 것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원칙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다수결, 즉 '다수에 의한 지배'이며 소수에 의한 지배나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마땅히 타파해야 할 일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를 짚어가려면 자유주의에 대한 설명과 자유에 대한 개념을 또 짚어야 하나 이건 정말 끝이 없다... 자유주의만 해도 책 한권이다ㅜㅜ)

 

- 공화주의는 국체(國體)와 관련된 이념이다. 즉, 국가가 누구 것이냐. 국가란 무엇인가? 뭐 이렇게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한 공화주의의 대답은 '국가란 시민 공공의 재산' 이라는 것이다. 공화국을 가리키는 영단어 Republic은 라틴어 Res publica 에서 나왔는데 이 단어가 공공의 일, 공공의 재산을 가리키는 말이라서... (*참고로 번역어 공화국共和國은 공화주의의 본래 뜻과는 그닥 관계가 없다... 중국 춘추시대에 실제 있었던 나라 이름에서 따온 거라) 자, 그럼 국가란 시민 공공의 재산인데, 그 공공의 재산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여기서 다수에 의한 지배, 즉 민주주의를 택한 나라는 민주공화국이 되는 것. 하지만 본래 공화주의에는 다수에 의한 지배라는 개념은 들어있지 않다. 공화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공화국 시민의 덕성'을 고루 갖춘 시민에 의한 지배이다.

 

- 그렇다면 공화국 시민의 덕성이란 무엇인가? 용기, 명예, 자선 등등 좋은 말은 이것저것 가져다 붙일 수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뭉치는 개념은 '나의 이익보다 공동체(=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행동' 이다. 이걸 "공공선에 대한 헌신" 이라고 부른다. 플라톤 같은 사람이 철인정치를 주장한 맥락이 여기에 있다. 플라톤은 공공선이 절대적 진리 - 즉 이데아와 맞닿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국가는 공공의 재산이니까 공공의 이익과 공공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철학자에게 그 관리를 맡기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인 셈.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펀드 운영은 펀드매니저에게...

 

- 이쯤에서 다시 로마로 돌아오자면 몽테스키외였나 마키아벨리였나 기번이었나 잘 기억은 안나는데 하여튼 어떤 학자는 "그 어떤 헌법과 규범 등의 안전장치보다도" 자발적으로 공공선에 대한 헌신에 나선 시민들이 많았기에 로마 공화정이 그토록 잘나갈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민이란 아마도 원로원에 그득했던 귀족들을 이야기하는 것일 확률이 크다. 실제 로마 원로원이 나라를 지배하는 기관으로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귀족들이 헌신적으로 나랏일에 참여했던 덕이 크니까... 그러나 포에니 전쟁을 거치고 원로원 귀족들이 과도한 부를 차지하게 되면서 일종의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었고, 이와 함께 공화국 시민의 덕성이란 것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 이때 원로원을 밀쳐내고 로마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 황제였다. 초기 제정의 황제는 변질되어 버린 원로원을 대신해 "공화국 시민의 덕성" 을 대변하는 지도자였던 셈. 보통 로마 황제가 공화정 로마를 멸망시켰다고 말하는데 자세한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확실히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개인이 등장한 건 사실이지만, 원래 공화국 시민의 덕성에는 "복종" 과 "절제"라는 것도 들어가 있다. 자발적인 복종은 자유를 해치는 게 아니라나. 개념상 로마 황제는 오히려 원로원 귀족들이 잃어버린 공화주의의 핵심, "공화국 시민의 덕성" 을 가지고 있는... 정확히는 가져야 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런 사람에게 복종하는 건 공화주의에 위배되는 게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괜히 자신을 '제1시민'이라고 말한 게 아니다.

 

- 로마 황제의 독특한 성격 덕택에 공화정의 전통은 지속되었으나 로마의 시민들은 서서히 이전과 같은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황제와 극소수의 귀족들은 여전히 공공사업과 자선을 통해 공공의 선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이는 어느 순간부터 "공동체에 헌신" 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식의 형식적 행위가 되고 말았으며... 결국에는 로마 전체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지적. 이 모델은 특히 자본주의 사상의 대두와 함께 "개인의 이익 추구가 곧 국가의 발전을 가져올 것" 이라고 주장한 자유주의자, (*혹은 공리주의자) 들과의 대립을 겪고 있던 영국 (*그리고 미국)의 사상가들이 좋아했던 것 같다. "로마 같은 나라는 개인보다 공공의 이익을 우선해서 승승장구했던 거야 무식한 것들아"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에드워드 기번이 그랬고, 미국인들은 로마의 정치제도(*정확히는 그에 대한 폴리비우스의 찬탄)를 더 뒤져서 "삼권분립" 이라는 아이디어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 그러나 이 모델이 가지고 있는 크나큰 문제점은 로마의 전성기가 누가 봐도 공화정 시대가 아니라 황제가 다스리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로마의 제정은 "공화정 시대에 잘 쌓아 둔 제도에 의지했던 시대" 혹은 "그나마 현명했던 황제들이 나와서 잘 유지됐던 몇백년" 정도로 폄훼되는 일이 흔하다. 사실 476년의 서로마 멸망을 로마의 공식적인 몰락 시점으로 잡는다면 이 정도 설명으로 퉁칠 수 있겠으나, 서로마 멸망 후에도 천 년 가까이 몹시 잘 나갔던 동로마 제국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동로마는 천 년 동안 공화정의 유산을 뜯어먹었나? 혹은 천 년 동안 쓸만한 황제들이 나왔던 건가? 심지어 서로마는 공화정의 전통을 어느 정도 가진 나라였으나 동로마는 아예 페르시아 식의 전제군주국에 가까운 나라였는데. 결국 에드워드 기번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동로마를 까면서 (...) 이 문제를 덮어버렸고, 다른 로마사학자들은 아예 "비잔티움 제국" 이라는 이름으로 동로마사를 로마사에서 분리시켜 버림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근데 이게 해결은 맞는 건가.

 

- 어쨌든 나는 학자가 아니며 그냥 좀 이상한 출판사에 다니는 직원일 뿐이다 (...) 그러므로 결국에는 별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나름의 권위를 갖춘 '로마멸망 모델'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그게 썩 맘에 들지는 않는다. 근데 이게 정말 민감한 문제인 것이, 조금만 엇나가면 독재를 찬양하는 식으로 변질될 수가 있어서. 대표적인 것이 카이사르빠로 소문난 시오노 나나미 여사. 근데 이 분은 막상 비잔티움 제국은 사정없이 깐다. 흠. 하긴 전제주의와 독재는 다르니까.

 

- 어떤 나라든 통치권력에게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 초월적인 권위를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대부분, 상당수, 일반적인 나라들은 종교에서 그 권위를 빌려왔다. 서아시아와 이집트에 오랫동안 자리를 잡았던 나라들이 대표적이며 인도에 우후죽순 자라났던 나라들도 마찬가지. 기본적으로 유학적 질서에 기대는 우리나라나 중국의 황제는 '천명'이라는 것에서 그 권위를 가져왔으며 천명을 정당화하는 것은 유학자들이었으니 역시 조금 복잡한 종교의 권위에 기댔던 셈. (* 세계사 공부를 하면 할수록 조선시대 사대부들이나 중세시대 성직자들이나 별로 다르질 않은 것 같다... 저들에게 이단심판에 있다면 이쪽에는 사문난적이 있다!!)

 

- 그런데 왜 로마는 이렇게 이상한 데에서 권위를 빌려온 걸까. 아니 공화국 시민의 덕성이라니; 이게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처럼 이해하기 쉬운 개념도 아닌데다가 막 스토아 철학 이런 데에서 생각의 틀을 빌려오다 보니까 후대로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져서... 개인적으로는 나중에는 로마인들 스스로도 대체 뭐가 로마 황제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건지 아리송한 수준이 되지 않았나 싶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갑작스레 기독교를 공인한 걸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데 (* 이것도 언젠가 포스팅 남겨야겠음. 역시 로마사는 이야기거리가 많아) 확실히 기독교가 끼어든 이후로 로마 황제는 한층 깔끔하게 황제의 권위를 세울 수 있게 된다.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수호자!!!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자!!!! 다들 닥치고 꿇어라!!!" 이렇게 해 두면 명예며 헌신이며 자선이며 공공 선이며 기타등등 복잡한 것들은 뒤에서 성직자들이 해결해주니까...아 얼마나 편한가.

 

- 뭔 얘기를 하다가 글이 이리 길어졌는가... 여하튼 중요한 건 로마가 뭣땜시 멸망했는가? 난 대체 어떻게 써야 하는가????? 참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