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시 회사 일 때문에 3일 정도 중세 유럽 봉건사회의 성립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 정신이 살짝 이상해 진 것 같다... 망할 회사... 뭐 이딴 생각을 하게 만들어... 솔직히 나는 요새 오버워치 생각만 하기도 바쁘단 말이다.
- 일단 중세 유럽은 어떤 식으로 도식화를 시켜 설명을 하건 어디선가는 오류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세계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이 좀 다양한 세계인가. 대충 로마 멸망 이후 카롤루스의 서로마 황제 즉위로 다시금 하나된 세계가 되었다고 배우긴 하지만 그 하나된 세계라는 것이 채 100년도 못 가고 허무하게 사라진 걸 놓고 보면 그게 얼마나 맞는 이야기인지도 몹시 큰 의문이 드는 게 사실. 훗날 학자들이 도식화를 하다보니 그 시점쯤에 "유럽의 재통일" 뭐 그런 기치를 세워놓고 로마와 분리되는 새로운 가치를 세워보려고 한 건데 어디 역사가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던가. 사실 누군가는 로마가 대략 16세기까지도 멸망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게 또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거시기허구.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세계" 라는 하나된 아이덴티티가 있었는가, 그 경계가 어디인가를 묻는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가톨릭 세계" 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사실 가톨릭 세계에 속한 나라들끼리는 동양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일어났다. 예컨대 왕족을 빌려온다거나... 우리나라에서 왕조의 대가 끊겼다고 중국 명문가 일족을 데려다가 새 왕으로 세우는 게 가능할까? 근데 유럽에서는 그렇게 했다는 거다. 교회의 수호자로서 명성 있는 가문이라면 외국인이라도 OK. 참 이거 쉽지 않은 일 아닌가... 싶은데 기본적으로는 귀족 권력의 전통이 강한 곳에서나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았나 싶고.
- 그렇다면 "가톨릭 세계" 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1)로마 교황에게 정통성을 인정받는 성직자가 2) 현지 세속권력자의 인정 하에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들을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세계. 라고 말하는 것이 또 합당할 것 같다. 즉 하나된 유럽세계라는 세상에는 두 가지 인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로마 교황의 인정, 세속 권력자의 인정. 그냥 중국처럼 앗싸리 황제가 다스리는 땅! 해버리면 간단할텐데 이건 씨 명목상 권력자가 둘이나 되다보니 이상한 문제들이 생긴다.
- 일단은 교회가 진짜 영적인 일만 담당하는 집단이 아니다 보니 생기는 문제다. 교회가 가진 땅도 많고, 재산도 많고, 심지어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농민들에게 세금도 거두었으니까. 1) 이걸 누가 관리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다음으로는 서로마 멸망 이후로 유럽에 성직자들 빼고 지식인이라고는 씨가 말랐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게 주먹구구로 되는 일이 아닌데, 어떤 식으로든 성직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거다. 2) 그러니까 세속 권력자 입장에서는 성직자들 도움을 얻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다음으로는 실질적으로 농민들의 삶에 깊숙히 개입하고 있는 건 세속 권력자들이 아니라 교회였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솔직히 평범한 농민들이 맨날 전쟁하기 바쁜 영주 얼굴 볼 기회가 얼마나 있는가? 죽도록 일하느라 불만이 폭발할 수도 있는 농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이게 다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은 우리 영주에게 복종해야 한다, 거짓말 하지 마라, 강도질 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주절주절 설교를 해 대는 건 전부 교회의 역할이었다. 이른바 "사회화" 과정에 필요한 도덕 기준의 제시와 주입을 전적으로 교회가 맡았다는 거. 3) 그러니까 세속 권력자 입장에서는 역시 교회의 도움이 절실했다. 솔직히 교회가 선동해서 영주를 적그리스도로 선언해 버린다면 농민들이 우워우워 들고 일어나는 것도 이상할 것 없는 일일테니까. 굳이 그럴 이유야 없었겠지만... (하지만 종교개혁이 시작된다면 어떨까)
- 물론 교회 입장에서도 세속 권력자들의 도움은 필요하다. 교회에는 무력이 없으니까... 그래서 서로서로 돕는 관계가 형성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걸 종속적인 관계로 봐야 하느냐, 독립적인 관계로 봐야 하느냐, 협력관계로 봐야 하느냐, 누구의 힘이 얼마나 우위에 있는가? 뭐 이런 문제를 두고 표현을 굉장히 신중히 쓸 수밖에 없는 것 (크르릉) 게다가 어떤 관계로 정의한다 하더라도 중세 유럽의 세속권력자들 역시 왕, 황제, 영주 등등으로 세분화되어 있던 터라 누가 누구에게 종속되어 있었는지 뭐 이런 것들이 굉장히 복잡해진다. 짜증나게...
- 여기서 마법의 키가 되는 것이 "인사권"이다. 역시 인사가 만사! 교회 재산을 제외한 중세 유럽의 다른 모오오오오든 재산은 기본적으로 혈연에 따른 상속이 기준이었다. 장원과 영지는 말할 것도 없고, 국민국가의 개념이 생기기 이전에는 왕국 역시 혈연에 따른 가문의 재산일 뿐. 그런데 유독 교회의 재산만은 상속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직자들은 하느님께 인생을 바쳤으니, 욕심을 버리고 청빈하게 살아가는 게 옳기 때문에. 근데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교회의 막대한 재산이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니까, 결국엔 성직자가 교회 재산 "관리" 를 맡게 되는데... 즉 성직자 인사권을 쥔 자가 그 재산을 누구에게 "관리" 하게 할지 선택할 수 있었던 것.
- 중세 초기, 그러니까 카롤루스 이후에는 유럽 어디를 막론하고 지방 영주에게 성직자 서임권이 있었던 것 같다. 카롤루스 제국이 무너진 이후로 지방분권 현상이 극심화하면서 이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솔까말 믿고 기댈 게 영주밖에 없는데 영주 말 들어야지 뭐. 영주들은 자기 말 잘 듣는 성직자나, 혹은 자기 아들을 성직자로 만들어서 수도원장으로 앉힌 다음 막대한 재산을 수도원에 기부하는 형식으로 가문의 뒷주머니를 만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심 깊은 통치자가 되니까 명성도 얻고 얼마나 좋은가. 물론 그냥 돈 받고 파는 경우가 많았다고는 하지만서두. 경매라도 붙인 건가...
- 그런데 유럽이 안정되면서 그동안 대장 노릇에 익숙해진 지방영주의 권력을 찍어누르는 것이 평생 숙원인 "왕"들이 등장하게 된다. 프랑스에는 영주들의 추대를 받은 카페 왕조가, 영국에는 정복자 윌리엄의 노르만 왕조가, 독일에는 신성로마제국이. 중세 초기의 왕들은 보통 "영주들의 총대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건 프랑스에 제일 잘 어울리는 말이고, 노르만 왕조는 애초에 전쟁으로 만들어진 정복왕조인지라 꽤 강력한 왕권을 뽐냈다고 한다. 신성로마제국은 좀 애매한 경우였는데, 여기서는 주로 동방 접경지역에서 슬라브족의 땅을 빼앗아 가며 덩치를 키운 영주들이 (작센이라던가 잘리어라던가...) 왕 노릇을 했던 터라 프랑스보다는 사정이 좀 나았다고. 하지만 여타 귀족들의 목이 뻣뻣하긴 마찬가지였으니 뭔가 수가 필요했다. 여기서 성직자 인사권이 중요해진다.
- 흔히 신성로마제국 초대 황제로 회고되는 오토 1세는 지방 영주들이 행사하던 성직자 인사권을 자기가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 를 위협하는 마자르족을 물리친 뒤 교황의 요청을 받고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 교황은 자기를 구해준 오토 1세를 "서로마의 황제" 로 임명하고 적극 협력하기 시작. 그리하여 오토 1세는 본격적인 영주 제압작전에 나서는데 그 방법이 바로 성직자들을 영주로 키우는 거였다. 어차피 성직자 인사권을 쥐고 있는 한 성직자들은 황제에게 충성할 수 밖에 없었고, 교회 재산은 영주들의 재산과 달리 상속이 안 되기 때문에 성직자가 죽고 나면 다시 황제가 그 후임자를 임명할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미 제국 각지에 있는 성직자들을 통해 영주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 문제는 이미 교회가 썩을 대로 썩어서 교회 재산을 사고 파는 건 물론이고, 성직자가 결혼도 하고 자식에게 상속도 시키고 있었다는 거... 그래서 신성로마 황제들은 교회 개혁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사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청빈"과 "성직매매금지"를 키워드로 삼는 개혁운동은 이미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이 개혁운동이 황제가 원하는 지점에서 멈추지 않고 더욱 진행되어서... "성직자 인사권을 교황이 행사하겠다!" 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황제 입장에서는 황당한 노릇이다. 아니 애초에 개혁운동을 왜 진행시켰는데??? 이걸 두고 안된다고 했다가 눈보라 쏟아지는 산중에서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을 꿇었던 게 저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물론 그게 끝은 아니었고 하인리히 4세가 폭주해서 그레고리 7세를 물리치긴 했지만 결국 성직자 서임권은 교황에게 넘어갔다. 뭐 세속의 일은 황제가 하고 어쩌구 저쩌구 말은 많았지만... 사실 대공위시대를 거치면서 신성로마 황제는 일단 리타이어. 그러니까 황제 대 교황의 대결은 일단 황제 패배로 봐야 한다. 당장 하인리히 4세가 이겼다고 해서 교황권 그거 별 거 아니라는 인식은 좀...
- 보통 성직자 서임권을 두고 독일 얘기는 많이 하는데 프랑스와 영국 얘기는 안 한다. (부드득) 일단 프랑스. 여기서 성직자 서임권은 여전히 영주들한테 있었다. 프랑스 왕은 자나깨나 귀족들 찍어누를 생각에 여념이 없었는데, 교황이 귀족들의 중요한 권리를 빼앗아간다고 하니 오히려 환영할 일. 프랑스는 이후로도 교황 말을 제일 잘 듣고 고분고분 따르며 교회 재산에 손도 안 대는 아주 모범적인 가톨릭 신자 노릇을 하셨다. 십자군 전쟁도 사실상 프랑스 기사들이 제일 많이 나갔고... (독일은 시큰둥) 프랑스 왕 입장에서는 왕국 내 영주들이랑, 자기보다 훨씬 강한 영국이랑 싸우기도 벅찬 파국에 일단 교황 편에 서는 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던 것. 물론 십자군 전쟁으로 교황 단물이 다 빠진 이후에는 아비뇽 유수라는 사태가...
- 영국은 원래 왕권이 강했던 나라라 교황이 뭘 하겠다는 소리에는 영 시큰둥하다. 독일 황제처럼 성직자들의 협력에 의지하는 처지도 아닌지라 결사적으로 으르렁댈 일은 또 아닌 것 같구, 해서 적당히 타협을 한다. 성직자 임명권은 교황이 갖는 대신 해임권은 자기가 갖는 걸루. 마찬가지로 교회법도 인정하되 왕의 승인을 얻어야 발휘되게 하고... 뭐 하여튼 교황이랑 큰 문제 안 생기게 적당히 단도리 하려고 했던 듯. 영국의 이런 성향은 나중에 성공회의 성립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고 한다. 애초에 교황이 뭘 하겠다는 걸 영 못마땅해하는 나라였다는 거.
- 일단 여기까지 흐름을 잡고 보면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휴우) 요약하자면 독일 황제는 극도로 싫어했지만 결국엔 타협했고, 프랑스 왕은 영주들 찍어누르느라고 고분고분하게 굴었고, 영국 왕은 좀 시큰둥하지만 여하튼 타협을 했고. 여하튼 교황 말을 어떻게든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거. 교황권 강화의 물꼬는 기본적으로 지방 영주들을 찍어누르려 했던 독일 황제가 텄지만 결국엔 교회 스스로가 세속 권력을 포기하고 "청빈" 같은 가치를 목청껏 외치기 시작하면서 잡게 됐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즉 기본적으로 교황이 존경받는 세상이니까 가진 건 목소리밖에 없는 교황이 이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거.
- 물론 야심차게 시작한 십자군 전쟁이 연달아 실패하고, 오스만 제국의 팽창으로 비잔티움이 몰락해 버리고, 흑사병이 창궐하여 유럽 인구 대부분이 떼죽음을 당하면서 교황이 제아무리 청빈하게 살아봐야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힘든 세상이 시작되어 버린다. 이때 어느 정도 힘을 키워서 영주들을 짓밟은 프랑스 왕이 "이제 교회에서 세금을 걷겠다" 고 선언했고, 여기에 극렬 반대하다가 교황이 프랑스로 끌려가면서 본격적인 몰락이 시작. 한 때 교황이 네 명이나 되는 막장 사태를 맞이했다가 간신히 하나로 합체... 하면 이제 슬슬 중세는 가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거다. (* 종교개혁은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교황청에 십일조 내가 싫다는 거라서 이것도 결국엔 세금 문제로 봐야 하는 것 같다... 사실 좀 더 찾아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영국 왕한테는 이혼하지 말라고 했더니 아예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버리고. (흑) 아무래도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아서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양대 슈퍼파워인 프랑스와 신성로마 사이에서 본격적인 "세속영주화" 를 노렸다가 신대륙 개척으로 슈퍼 국가가 된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한테 완전히 짓밟히는 게 사코 디 로마. 이 사건 이후로는 교황권력 별 거 없다고 해도 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예수회 활동같은 게 있긴 하지만 세속적인 영향력은 그닥.
- 말이 이렇게 길어진 건 다 프랑스사, 독일사, 영국사에서 제각각 자기 생각에 중요한 얘기만 써놓은 탓이 크다. 예컨대 "성직자 서임권" 논쟁은 분명히 서유럽 전체의 문제인데도 독일과 교황 사이의 일로만 본다거나... 영국은 중세 전체를 통틀어서 그놈의 마그나카르타와 의회정치 빼고 다른 역사적 관심은 아예 없는 것 같다. (...) 프랑스사는 그냥 프랑스왕 졸라 쎄져서 절대왕정 등장하는 과정 말고는 별 관심이 없고. 독일사가 그나마 종교개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긴 하지만 너무 지엽적인지라...
- 아악 너무 길어졌어. 싫다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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