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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Diary / Journal

일하기 전에

비스마르크는 보불전쟁의 승리를 거둔 이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 독일을 통일했다. 

근데 이상하다. 아니 독일을 통일하려면 독일 내의 소국들을 공격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한반도를 통일하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했지 일본과 중국을 공격했나?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중국 내의 제후국을 공격했지 뭐 흉노족을 공격했나? 남북한을 통일하려면 북한을 공...략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여하튼, 근데 독일 통일에서는 유독 그게 그렇지가 않다. 비스마르크는 통일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독일 내 제후국들을 공격한 게 아니라, 제국에서 쫓아내야 할 덴마크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고 뒤이어 독일 내에는 한발짝도 내민 적이 없는 프랑스를 공격한다. 그리고 그 결과 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지는 현대사의 뿌리, 독일 제국을 성립하기에 이른다.

내가 찾아 본 참고도서 중에 이 부분을 가장 그럴싸하게 메꾸고 있는 설명은 "비스마르크는 이 전쟁을 통해 남독일에서도 민족주의 감정이 발현되기를 바랐다." 는 언급이었다. 이걸 보면 그나마 좀 이해가 간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서 내부의 단결을 꾀하는 전략인 셈이다. 근데 전쟁을 먼저 벌여 놓고 같은 민족끼리 뭉치자고 우기는 게 말이 되나? 심지어 독일 민족이라는 게 정체도 흐릿할 때였는데. 이건 뭐 대동아공영권도 아니고...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실제로 보불전쟁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먼저 벌인 프랑스의 침략전쟁이었다. 비스마르크가 낚았으니 그냥 비스마르크가 벌였다고 하는 건데 이걸 큰 무리수 없이 조작해 낸 것만 해도 비스마르크가 왜 그리 수완 좋은 정치가 소리를 듣는 것인지 이해가 가는 점. 아무튼 그래서 보불전쟁이 벌어지자 바이에른 같은 남독일의 제후국도 비스마르크에게 가세해야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근데 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독일을 통일하기 위해 프랑스를 공격한다" 같은 요상한 말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던 걸까. 그때는 엠스 전보 사건 같은 것도 몰랐으니 이 중간 단계를 이해했을 리도 없는데. 이 대목에서 나는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독자들이 '비판적 독서'라는 것에 심각하게 무능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책은 밑줄치고 읽으며 숭배하는 것이지 감히 질문을 던지고 의문을 품는 대상이 아니었고,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 존재이다 보니 뭔가 명제가 나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뿐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늘 고민하게 된다. 더구나 학습물이라는 것은 어차피 설명해야 할 내용이 정해져 있고, 그것들을 맥락에 맞추어 잘 제공하는 게 지금 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보니 항상 부딪히게 되는 고민의 벽이 앞서 이야기한 보불전쟁 같은 것들. (사실 보불전쟁은 그나마 맥락 설명이 쉬운 편이다. 보오전쟁은 진짜... 세계사에서는 언급도 짧은 주제에...) 어쨌든 말이 너무 길어지면 곤란하고, 또 파고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만큼 어느 부분에서 끊는 것이 적절한가 늘상 고민하게 되는데 또 이걸 읽을 독자들을 생각하면 이런 고민이 다 무에 소용있나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독자 반응에 의하면 이런 것에 관심있는 사람은 정말 1도 없다. 대부분의 관심은 사진과 그림 등의 시각자료, 그리고 정말 명백한 팩트 오류에만 집중되어 있을 뿐.

이런 얘기를 늘어놓다 보면 mp3 시대에 고음질에 집착하며 해외 녹음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는 뮤지션들도 떠오르고 뭐 그렇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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