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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Diary / Journal

요즈음의 고민

"선빈씨는 요새 가장 큰 고민이 뭐예요?"

한 이틀 전쯤에 이런 질문을 들었는데 정말 순간적으로 그런 거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적잖이 당황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해 버리고 나서도 (...) 과연 정말 그런 걸까 꽤 고민했음. 그러니까 고민이 없다는 게 고민이 되는 건가. 허나 확실한 건 최근 들어서 막 속상하거나 미치겠거나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들 만큼 곤란한 마음을 느낀 적이 없다는 거... 엄밀히 얘기하면 그만큼 문제의 본질이 작다기보다는 내가 속을 썩여 봐야 속히 해결될 사이즈가 아니기 때문에 크게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며, 내가 속을 썩여서 해결될 일이면 그냥 해결하고 말기 때문에 그 중간 어디쯤에 머무르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장난처럼 보이겠지만 그 중간 어디쯤에 머무르는 건 항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및 소통에 관한 일이다. 항상 내가 생각하기엔 간단한 문제가 저 사람에게 가면 어려운 일이 되고, 그걸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다투고 싸우고 얘기하고... 사람 마음이 그렇게 잘 안되는 건 어찌됐건 사람에게 뭔가 기대를 갖기 때문일 것이다. 내 말을 이해할 거라는 믿음, 그러면 일이 쉽게 풀릴 거라는 믿음, 등등등. 그러지 않을 거면 사실 의사소통을 왜 하겠는가.

사람에게 희망을 갖는 건 대략 내가 이십대 초반 이후로 키워 온 고질병이다. 거대한 것부터 사소한 것까지 항상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친절한 사람, 잘난 사람, 나와 취미가 비슷한 사람, 활동력 있는 사람, 뜻이 잘 맞는 사람, 이도저도 아니면 능력있는 선생님, 프로패셔널한 기술자, 기타등등 누군가를 만나서 일을 잘 꾸며보면 지금과는 다른 신세계가 열리고 인생의 새 막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희망. 아니 뭐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더라도 당장 내 눈앞의 문제라도 해결될 거라는 희망. 항상 그 희망이 나를 괴롭게 만들고 실망하게 만들었다.

단언하지 말라는 조언을 많이 받았지만, 그러나 단언컨대, 인생에서 단 한번도 내 희망을 충족하는 인간을 만나 본 역사가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인데 왜냐하면 점점 사람에게 희망을 갖는 걸 포기해 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딱히 그러자는 다짐과 결심을 굳힌 건 아닌데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일단 사람들은 원래 말귀를 못알아듣는다. (나도 그럴 것이다 아마도) 그리고 알아들어봤자 별로 도움이 되는 경우가 드물다. 내 문제를 남이 해결해 주는 일은 없고, 해결의 실마리를 주는 일은 간혹 있으나 극히 드물다. 조악한 비유를 하자면 유능한 선생님을 백날 찾아다녀 봐야 내 공부는 내가 하는 수밖에 없다는... 십대 후반의 그 평범한 깨달음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왕 십대 후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때의 나는 아마도 자율성이 극에 달해 있는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뭐든 혼자 배우고 익히고 만들어 내는 데에 도가 터 있었으니까. 근데 지금은 뭘 새로 배우고 익히려면 일단 어떤 사람을 만나면 좋을까, 어느 학원에 가면 좋을까, 얼마를 들여야 할까부터 궁리하게 된다. 대체 왜? 일단 주머니에 돈이 있어서 그런 건가? 그보다는 일단 유능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내 머릿속과 몸속에 어떤 지식과 기능을 잘 불어넣어 줄 것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사교육을 전전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냥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혼자서 뭔가를 배워 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건 역시나 어떤 종류의 두려움 때문일텐데, 그 두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역시 잘 모르겠다.

+ 대인관계에 대한 이런 건조한 이야기를 제하고 사실 내가 제일 많이 하는 고민이라면 역시 매일 이 시간 무렵에 드는 생각. "대체 나는 하루 종일 무엇을 한 것인가" 왜 매일매일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열한시가 넘는 것인가. 내가 특별히 야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며 퇴근 이후에 엄청나게 많은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며 출퇴근 시간이 몇 시간씩 되는 것도 아닌데... 오늘은 기껏해야 밥 먹고 영화 한 편 보고 들어왔을 뿐인데, 그 이후에 빨래 한 번 돌리고 청소 설거지하고 잠깐 동안 이렇게 이상한 글이나 썼을 뿐인데 벌써 한 시다. 정말인지 이해가 어렵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의 나는 매일매일의 일상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대체로 젊은 나이에 자신감 있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일상을 버틸 만한 돈을 벌고 적당한 취미 생활을 한다. 아마 이십년이나 삼십년 뒤 내 인생을 돌이킬 때에 "그땐 참 좋았지"로 요약될 시절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요 문장에서 눈치를 챈 사람도 있겠지만 문제가 있다면 이런 일상이 언제까지 지속 가능할 것인가- 그런 의문일 것이다. 이것은 꼭 고용 안정성에 관한 의문만은 아닌데, 사실 생계안정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해 본 적은 없다. 그보다는 결혼(혹은 독신선언)이나 부모 부양, 혹은 노화와 같이 정말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을 언제까지 피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뭐 그런 것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걸 일일이 생각하다 보면 사람들이 왜 결혼을 하는 건지, 인생의 "안정"이란 게 무슨 뜻인지 조금 짐작이 가기도 한다. 어쨌건 넘나 사랑해서 하는 건 결코 아닌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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