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로 돌아가기 전 날 밤이었다. 아버님은 나를 안채로 조용히 부르셨다.
“베로나에 가거든 너와 혼인을 맺기로 한 처자가 있을 게다. 캐퓰릿가의 줄리엣이라고 한다. 어른들끼리는 다 이야기가 된 참이니 가서 인사도 하고 혼인 날짜도 정했으면 좋겠구나. 요사이 봄날 볕도 좋으니 되도록 빨리 했으면 어떨까 싶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혼인이요?”
“그래, 혼인.”
“아버님. 저는 아직 결혼에는 생각이 없습니다. 어떻게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나이가 찼는데 소식이 없으니 알아본 게 아니냐. 어차피 나중엔 나한테 감사하게 될게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제가 결혼할 사람은 제가 직접 정하겠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 그랬지.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세상에는 자기가 원하는 때에, 사랑하는 사람과, 절실한 이유로 결혼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그거랑은 전혀 다른 얘기 아닙니까. 제 이야기는, 적어도 제 결혼 상대방은 제가 직접 정하겠다는 겁니다. 제가 엄청난 욕심을 부리는 겁니까?”
“당연히 엄청난 욕심이지. 왜인지 알고 있냐?”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럼 일단 가보고 결정해. 그래도 안 늦어.”
솔직히 아버님이 약속을 했건, 안했건, 그냥 무시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니 나도 모든 책임을 아버님에게 돌려버릴 생각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결혼이 이렇게 해결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것을 우리 부자가 서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인 동시에 주군과 봉신이며, 피상속자와 상속자이지만 결국에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 영주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단순한 선언이 아버님께는 단순한 독립선언을 넘어 퍽이나 정치적인 언사로 들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로나로 향한 것은 조금은 현명하게 처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하필 그 여자인가? 베로나, 캐퓰릿 가문의 외동딸 줄리엣? - 나는 베로나로 향하는 내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하필이면 이 정체 모를 여인을 며느리로 삼을 생각을 하신 아버님의 속내를 파악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도통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일단, 캐퓰릿 가문은 아버님의 성내에 차는 명문가라고 할 수가 없다. 물론 베로나에서는 손꼽히는 상인인 모양이지만, 그래봐야 귀족은 아니었고, 가까운 베네치아나 피렌체만 가도 캐퓰릿 쯤이야 엄지손가락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만한 거상들이 넘쳐난다. 더구나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최근에는 사업도 그다지 잘 굴러가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게다가 이 가문은 평판도 그다지 좋질 못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같은 베로나 영내에 몬태규라는 가문과 불구대천 원수로 척을 진 모양인데, 태생이 장사치인 탓인지 척을 지는 방법도 칼부림, 주먹질, 패싸움 따위로 상당히 원초적인 편이었다. 주제에 돈은 어느 정도 버는 두 가문은 때로 무뢰배들을 고용해 저잣거리에서 크게 맞붙었다. 이런 날이면 온 영내에 곳곳이 찢어지고 깨지고 부러지는 부상자들이 속출했고, 두 가문과는 무관한 주민들도 어쩌다보니 동네 싸움에 말려들어 캐퓰릿이 잘했느니, 몬태규가 잘했느니, 따지다 보면 서로에게 공연히 눈을 흘기고, 백안시하는 일이 생기니 - 온 도시가 사사로운 싸움에 말려들어 시끄러워질 때면 결과적으로 가장 골치 아파지는 것은 베로나의 영주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백리 밖까지 안내할 사람을 보냈다. 약관의 백작에게 깍듯이 허리를 숙이는 집사를 맞이하며 나는 한없이 씁쓸했다. 이건 약혼도 결혼도 아니고 그냥 골칫거리 해결사일 뿐이잖아. 도대체 아버님은 무슨 생각인 거지?
“백작을 환영하는 뜻에서 오늘 밤은 캐퓰릿 공이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맘껏 마시면서 즐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제 정혼자를 먼저 만나봤으면 싶은데…”
“물론 줄리엣도 참석합니다. 하하. 정식 인사는 내일 낮에 하시겠지만, 오늘 연회장에서 직접 찾아보시는 것도 재밌겠군요.”
퍽이나.
베로나 성내에는 우리 일행을 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도 천하의 깡패가문인 캐퓰릿가의 장녀를 무려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찾아온 신기한 백작을 직접 구경하려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캐퓰릿 가 저택을 향해 나아갈수록 구경꾼은 점점 늘어났고, 그럴수록 나는 내 뜻과는 상관없이 그저 구애를 위해 행진하는 늠름한 수컷으로 보일 뿐이었으니, 흡사 동물원에서 깃을 활짝 펼치고 걷는 공작새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임계점에 다다른 부끄러움을 이기자니 정신 줄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미소를 띄우고 손을 흔들었다.
저택에 들어서자 캐퓰릿 공은 가느다란 눈매에 실핏줄 같은 미소를 함뿍 담으며 종종걸음으로 나를 향해 달려왔다. 저택 내부는 연회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캐퓰릿 공의 몸짓에는 도저히 무시하거나 다른 무언가로 착각할 수 없는 깍듯함이 배어 있었다. 말하자면, 동화에 나오는, 사자에게 굽실대는 여우의 깍듯함 같은 것.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파리스 백작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내가 영광이오. 과연 아버님이 말씀하신 대로 키도 크고… 수려하시구려. 내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아서 참 기분이 좋소!”
나는 억지웃음을 좀처럼 들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번만은 자신이 없었다. 눈치 없이 껄껄대는 캐퓰릿 앞에서 분위기가 막 어색해지려는 찰나였다.
“아가씨!”
나는 괄괄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힐끔 돌렸다가, 저택 내부 회랑 기둥에 몸을 가린 채 얼굴 반쪽만 빼꼼히 내밀어 날 바라보고 있는 어떤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아마 우리는 서로의 눈동자 색깔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아찔할 만큼 찬란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고, 눈이 한 번 깜빡한 사이에 그녀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달려갔다. 밝은 대낮에 망막을 스친 태양빛의 흔적처럼, 흔들리는 그녀의 잔상이 머릿속 가득 어른거렸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 무엇을 들이대고도 맹세할 수 있다.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그토록 찬란한 빛을 내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한밤의 별빛은 아마 그녀에게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동굴 속의 횃불은 그녀에게 더욱 따뜻하게 빛나는 법을 배워야 하겠지. 진정 아름다운 이는 그 이목구비의 조화로움을 논하기 이전에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을 만큼 눈부시고, 가슴 떨리는 빛으로 먼저 존재한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지상의 천한 말로 더럽혀지기 이전에 사랑의 제단에 먼저 올라선 미(美)의 화신에게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쁜 마음으로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저 여인이 누굽니까?”
캐퓰릿 공은 내 시선이 향한 곳을 힐끔 쳐다보더니 당황한 듯 내 앞을 가로막으며 대답했다.
“허허, 이런. 큰 실례가 될 뻔 했소. 아마 신랑이 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오. 채비가 끝나거든 정식으로 인사할 기회를 드릴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시구려.”
“그럼 저 여인이…”
“맞소. 줄리엣이라오.”
기다림은 다소 길었다. 그건 누구나 알다시피 내 결혼이 그렇게나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랑채에 시종들이 짐을 부리는 동안 캐퓰릿 공은 차를 대접했는데, 앉은 자리에서는 듣기 좋은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지만 그 뒤에 퍽이나 복잡한 속내가 숨겨져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게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은 제발 알아달라고 홰를 치는 것과 다름없는 태도였달까. 어쨌거나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캐퓰릿 공이 이 모든 문제를 확실히 마무리하기 전에는 줄리엣과 나를 인사시킬 생각이 없어보였다는 점이다.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이건 고문이었다. 캐퓰릿 공과의 대화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거의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약삭빠른 영감은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뻔히 알고, 일부러 줄리엣을 그 자리에 내려 보냈던 게 아닐까? 어느 순간 더 이상 정치적 단어를 골라낼 정신이 없어진 나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아버님이 캐퓰릿 가의 빚을 변제시켜주는 대가로 뭘 요구하신 겁니까?”
영감의 입가에 박제처럼 굳어있던 미소가 조금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금 더 나가기로 했다.
“말씀을 듣자 하니, 결국 두 어르신께서는 이 결혼을 매개로 해서 베로나 일대의 상권을 손에 쥐는 것을 목표로 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 저희 아버님은 캐퓰릿 가문을 앞잡이로 삼아서 베로나 자체를 손에 넣을 생각도 하신 것 같구요. 이 정도면 공에게는 충분히 입질이 당기는 조건 아닙니까? 만약 뭔가 내키지 않아서 거절하셨을 때, 우리가 저 몬태규 가문과 손을 잡는다면 어쩌실 겁니까. 제가 보기에 어르신은-”
“-그 이름은 여기서 거론하지 마시오. 나올 자리가 아니오.”
급속도로 굳어버린 영감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원수의 이름을 듣고 순간 분이 치민 영감이 다시 말을 꺼내지 않은 탓에 분위기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어찌됐건 지루한 자리를 일소하고 줄리엣을 부르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나에게도 이런 분위기는 달가울 것이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제가 좀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평생을 약조할 배우자를 찾아온 젊은이가 어찌 사랑보다 먼저 지루한 정치놀음에 휘둘려야 한단 말입니까? 괜찮으시다면 줄리엣과 정식으로 인사할 자리를 마련해 주심이…”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자신하시오? 난 아내를 두 번 잃었소. 하지만 두 아내의 집안과 맺은 관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 사업 동지로, 때로는 정치적 동지로. 말씀하시는 걸 보니 본인의 결혼이 그렇게 순진한 문제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울리지도 않는 연기를 하려고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구려.”
영감은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보고서야 나는 정치적 가식을 죄다 털어놓았을 때 진정 불리해지는 게 내 쪽이란 것을 깨달았지만, 이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쟁터 같은 이탈리아 한복판에서 라이벌에 맞서 가업을 지켜온 여우같은 상인과,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 푹 빠져 몇 시간 이내로 그녀를 다시 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은 약관의 귀족 서생. 나는 최소한 마지막 속내까지는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말씀하시지요. 저희 아버님은 얘기가 다 끝났으니 저는 날만 정하면 된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 저희 아버님께 하지 않은 제안은 무엇입니까?”
캐퓰릿 공은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주위를 살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 제안은 이렇소. 아버님을 배반하시오. 그럼 베로나를 손에 넣게 해 주겠소.”
나는 단숨에 대답했다.
“좋습니다. 우선 줄리엣을 불러주십시오.”
대답이 너무 빨랐던 모양이다. 캐퓰릿 공은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인가 꺼내려다가 문득 멈칫하며 내 표정을 살폈다. 아주 짧은 순간, 그 여우같은 영감의 눈빛이 내 가슴 깊숙한 곳을 칼날처럼 헤집고 지나가는 걸 느꼈지만,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던 모양이다. 영감은 예의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날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겠소. 방에서 조금 기다리시겠소? 딸아이를 찾아보지요.”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줄리엣은 연회에 입을 의복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타나지 않았고, 영감은 저녁에 있을 연회 준비로 바쁘다는 이유를 대며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사랑채 안을 서성거리며 내가 어떤 몹쓸 권모술수에 휩쓸린 건지 파악하려 애썼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먼 곳으로 달려가던 줄리엣의 잔상이 찬란한 빛이 되어 머릿속을 휩쓸어 버렸다. 캐퓰릿 공의 제안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요컨대 아버님의 세력을 배제한 채, 나를 내세워 베로나를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베로나의 영주가 되는 것이고, 캐퓰릿은 이곳의 진정한 실세로 등극할 것이며, 무엇보다 줄리엣이 내 아내가 될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합리적이지 않은가? 내가 무엇 때문에 망설여야 하지? 게다가 일단 줄리엣만 곁에 있게 하고 나면, 아버님과 캐퓰릿 공 사이에서 권력의 중심을 잡을 사람은 어차피 나였다. 결혼에 대한 확답만 얻고 나면 이후의 모든 일은 내가 조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캐퓰릿 공은 해질녘이 돼서야 다시 사랑채를 찾아왔다. 나는 줄리엣의 행방을 물었지만,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줄리엣이 곧 연회에 나올 것이라고만 말했다. 나는 나름 사태를 정리한답시고 더듬거리며 이야기했다.
“어르신,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일단 복잡한 문제는 결혼 날짜를 정한 이후에 논의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미 온 이탈리아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을 겁니다. 파리스 백작이 캐퓰릿 가문의 줄리엣과 곧 결혼한다고… 그러니 요란한 일은 먼저 해치우고 중요한 일은 요란하지 않게 처리하는 것이…”
영감은 껄껄대며 대답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급하다고 막 해치울 수는 없는 법 아니겠소.”
나는 의연하려고 애썼지만 그것이 남에게는 시종일관 시무룩한 태도로 보였다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연회 의상을 챙기는 내내 몸종이 왜 그렇게 죽상을 짓고 있냐고 몇 번이나 캐물었으니까. 캐퓰릿 영감은 사랑채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어둠이 깔린 하늘에 하얀 별들이 먼지조각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모두 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사실 나에게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미 베로나의 사람들 중 파리스 백작의 풍채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다만 내 시무룩한 표정과 시종일관 줄리엣을 찾아 두리번대는 눈빛이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다행일 뿐이었다. 따뜻한 술과 오색 과일이 즐비한 연회장 곳곳에 음악과 함께 은근한 바람이 불고, 평화와 한가로움이 내려앉았다. 베로나가 오랜만에 맛보는 귀족적인 평화임에 틀림없었다.
연회장에 직접 찾아온 영주는 나를 얼싸안으며 이 무뢰배들에게 예의란 것을 알려준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표했다. 오랜 세월 전장에서만 활약했다는 이 순진한 양반은 내 아버지나 캐퓰릿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의 놀라운 순진함이 내 정치적 감성을 일깨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저택 구석에 있던 분수대 근처에서 다시 한 번 줄리엣을 발견했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가린 보라색 가면 안에서도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조금 먼 거리였지만 어쩌면 당장 발걸음을 옮길 수도 있었다. 나를 붙잡은 것은 곁에 있던 캐퓰릿 공도, 영주도 아닌 줄리엣의 바로 앞에 있던 한 남자였다. 두 남녀는 꼿꼿이 선 채로, 서로를 가만히 마주보고 무엇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온 정신을 두 남녀에게 쏟았다. 그리고 둘은 자석처럼, 점점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입을 가져갔다.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왜? 어째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캐퓰릿 영감이 나를 속인 건가? 그녀는 애초에 다른 남자를 맘에 두고 있던 건가? 영감은 그걸 다 알면서 나를 이용한 건가? 그렇다면 저 남자는 누구지? 이건 특별한 술수인 건가? 질투심을 이용한 미인계? 아니면- 그냥 악몽인가?
둘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영주와 대화하고 있던 캐퓰릿 영감이 나를 힐끗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딸아이를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어디 보자… 지금 나와 있을 거요. 가면을 쓰고 있다지만 애비에게 그 정도야…”
“아, 이미 찾았습니다… 분수대 곁에 있더군요.”
“오, 그러셨소? 낮에 한번 스쳤을 뿐인데 기억력도 좋으시오. 허허…”
“그런데 곁에 있는 남자는 누굽니까?”
내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게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캐퓰릿 영감은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남자의 정체를 밝힌 것은 조금 뒤에 있던 영주였다. 그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몬태규 가문의 장자 아니오… 이름이 로미오였나? 하여튼, 오늘은 좋은 날이니 알아서 처신하리라고 믿소. 캐퓰릿 공.”
캐퓰릿 공은 잔뜩 짓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백작,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별일 아니니 금방 해결될 거요…”
영감은 황급히 사라졌지만 나는 차마 그에게 두 사람이 키스한 걸 보았느냐고, 묻지 못했다. 머릿속에 거대한 넝쿨이 자라나서 모든 생각의 길을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나는 가면이 내 당황한 표정을 가리고 취기가 내 상기된 얼굴을 덮어버리길 기원하며 그 자리에 꼿꼿이 선 채로 먼 곳의 줄리엣을 바라보고 있었다. 캐퓰릿 가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색이 느껴지자, 로미오는 주저하며 자리를 떴다. 다만 나는, 두 사람이 헤어지기 직전까지 짓고 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혼자 남은 줄리엣은 로미오가 사라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나타난 유모에게 끌려갔다.
영주가 이상하다는 듯 내 눈치를 살피다가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내 어깨를 토닥였다.
“백작. 너무 맘에 두지 마시오. 로미오는 평소 행실이 올곧고 성품이 바르기로 이름난 친구라오. 더구나 오늘 밤 분위기가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감히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겠소? 그만하고 다른 곳으로 가봅시다.”
나는 이를 악물고 영주와 함께 연회장 곳곳을 거닐었지만, 솔직히 어떤 말도 귓속에 들어오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잠시 뒤에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영주 앞을 빠져나온 나는 그 걸음 그대로 저택 안채를 향해 걸어갔다. 줄리엣을 만나야했다.
안채 곳곳에 있던 시종들은 내 모습을 보고 놀라긴 했지만, 줄리엣의 방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한참동안 씩씩대며 걷고 있다 보니, 캐퓰릿 영감이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쫓아와 뒤에서 소리 질렀다. “백작!”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영감은 난처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이거 미안하게 됐소. 백작을 위한 연회인데 내가 너무 나돌아서… 하지만 이 집안에는 몬태규의 씨앗이라곤 곱게 스치는 것도 힘들어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말이오. 얼른 몰아내지 않으면 누가 나서서 잔치를 망칠지 모르는 일 아니겠소. 자자, 그만 하고 갑시다. 줄리엣은 곧 나오라 할테니…”
“어르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줄리엣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골치 아픈 이야기는 다 집어치웁시다. 어떤 요구를 하시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제 와서 그녀가 다른 남자를 품에 안는 일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영감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남자를 안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그 표정과 말투로 봐서는 영감은 내가 본 걸 온전히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마 몬태규가의 장자가 줄리엣과 키스했다는 걸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는 게 현명할 리도 없었다.
“그게… 아무튼 줄리엣을 만나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가보겠습니다.”
나는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영감은 등 뒤에서 몇 번인가 나를 더 부르다가 이윽고 잠잠해졌다.
줄리엣의 방은 저택 뒤뜰을 바라보고 있는 2층에 있었다. 창밖으로 넓은 정원과 담장 너머 베로나의 뒷골목이 보이는 곳이었다. 방 앞에는 유모가 서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서 문을 두들겼다. “아가씨! 아가씨! 백작님이 오셨어요!” 줄리엣은 잠시 대답이 없었고, 나는 문 앞에 선 채로 미심쩍은 눈으로 유모를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유모는 내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쏘아붙였다.
“안에 누가 있소?”
유모는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지금 옷을 갈아입으시는 중이라 조금 늦으시는 것 같습니다. 아가씨! 백작님이 오셨다니까요! 지금 어서 나오셔야…”
유모의 말이 끝나기 전에 문이 열렸다. 줄리엣은 연회 때 입었던 드레스 차림에, 머리를 풀어 헤치곤, 나와 유모를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어쩔 줄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실례하겠소. 유모는 가 봐도 좋소.” 모두가 경황이 없던 탓에 나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나와 줄리엣만이 남았다. 줄리엣은 뒷걸음질로 침대에 다가갔다. 그녀의 등 뒤로 커다란 창문이 열려, 달과 별들이 바람을 타고 새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어 줄리엣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파리스 백작이오. 무례를 용서하시오. 낮에 잠시 눈빛이 스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소?”
잠시 창밖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당황해하던 줄리엣은 이윽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백작님.”
“그토록 강렬한 순간을 어찌 기억하지 못할 수 있겠소. 그 찰나만으로도 다시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소. 당신의 목소리는 어떠할지, 살결은 어떠할지… 당신께 바쳐질 모든 맹세는 오늘 당신을 다시 만난 이 순간 내 마음 속에서 완성되었으나, 당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내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겨두도록 하겠소.”
“심장 깊은 곳에서 금은보화와 함께 꺼낼 맹세라면 제가 언제쯤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백작님과 저는 이미 혼인하기로 한 사이이니 그 때가 되어서 주님 앞에 맹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줄리엣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나에게는 당신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시오?”
“사람의 마음은 권력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내 돈으로 당신의 마음을 사겠다고 한 적이 없소.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 내 가슴 속에 새긴 맹세를 바치겠다 했지-”
“사람의 마음은 쉽게 다치고 아물며 변덕스럽게 변하는 것이니, 제가 어찌 그걸 믿겠습니까.”
“그렇다면 저 빛나는 달에 대고 맹세하겠소.”
줄리엣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달은 쉽게 차고 기울며 변하는 것이니, 당신의 사랑도 그와 같다는 뜻이겠군요.”
“좋소. 그럼 무엇에 대고 맹세하면 좋겠소? 어찌하면 당신이 내 마음을 믿어주겠소?”
“백작님. 아직 뭐가 문제인지 모르시고 있군요. 제가 당신의 마음을 믿고, 받아들이더라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당신의 선택이 아니라 저의 선택이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당신의 선택을 얻어내고야 말겠소. 그것이 불가능하오? 내가 지금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고 있소?”
줄리엣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듣던 대로 자신만만하시네요. 백작님, 저는 이미 당신의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당신이 저의 사사로운 선택에 이렇게나 연연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본래 사랑하는 마음이란 영혼을 바치고 죽음을 걸고도 쉽사리 얻어낼 수 없을 만큼 뜨겁고 고귀한 법이지요. 금은보화와 세속의 권력으로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하룻밤에 흩어져버릴 헛된 맹세와 가벼운 입놀림으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줄리엣. 나는 내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소. 헛된 맹세와 가벼운 입놀림이 아니라!”
“저 역시 당신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백작님은 백작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그것이 무가치하다는 걸 모르시는 건가요? 백작님이 진정 절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지옥에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다 한들, 그게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만 두세요. 아름답고 가치 있을 것만 같은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시들어 죽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가혹한 운명에게 놀아나고 있을 뿐이죠. 잃을 것이라곤 이 허약한 목숨밖에 없는 저보다 많은 것을 가지신 백작께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밤이 깊었네요. 돌아가세요. 가엾은 분.”
줄리엣은 나를 등지고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창밖의 별 만큼이나 많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유영했다. 나는 침을 삼키고, 이마를 쓸어 넘기며, 한참을 주저했다. 확답을 듣지 못했을 뿐, 줄리엣의 마음은 이미 명백한 것이었다. 더 이상의 말은 그것이 아무리 고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쓸데없이 덧붙은 얼룩처럼 보일 것이다.
그걸 충분히 알면서도 나는 결국 견딜 수가 없었다.
“한 가지만 묻겠소. 내가 아니라면, 그 자를 사랑하오?”
줄리엣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날, 베로나의 밤은 풍성한 음악과 빛나는 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랑채로 돌아온 나는 몸을 뒤채며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날이 밝았지만, 하루가 다 가도록 사랑채를 벗어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바깥에서 줄리엣을 다시 마주쳤을 때 무슨 이야기를 더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온종일 침대에 앉아 있다가 사랑채 뒤뜰을 서성거리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자니, 먼발치서 시종들이 날 쳐다보면서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젯밤 내가 줄리엣을 만났단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니, 뭔가 그럴싸하고 재미난 이야기라도 만드는 중인 것 같았다. 그 중 몇 가지가 캐퓰릿 영감의 귀에 들어갔는지, 오후 들어서 영감이 잔뜩 근심어린 표정을 짓고 직접 사랑채에 나타났다. 그리고 다짜고짜 물었다.
“백작. 무슨 일 있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냥… 어제 좀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베로나에서 가장 귀한 손님이 내 집안에서 넋이 나가 있다는데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겠소? 어젯밤에 줄리엣을 만났다고 들었는데… 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요? 혹시 맘에 들질 않는다거나…”
“뭐 어젯밤 일이야 줄리엣에게 직접 물어보시면 될 일 아닙니까.”
캐퓰릿은 입맛을 다셨다.
“딸아이는 아침 일찍부터 고해를 한답시고 성당으로 달려갔소. 내가 느끼기론 분명히 어젯밤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둘 다 얘기해 주기를 싫어하는군. 아무튼, 알겠소. 그럼 두 사람의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하면 되는 거요? 우리가 어제 나눴던 이야기도 모두 유효하고?”
“저에게는 유효합니다.”
영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다른 사람 누가 더 있다는 건지…”
“누가 더 있겠습니까?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하는 것인데요.”
잠자코 듣고 있던 영감은 입을 딱 벌렸다.
“줄리엣이… 다른 소리를 하오?”
“사실 가장 먼저 그 의견을 들어봤어야 했던 사람이지요. 전 아직 모르겠습니다. 서로 마음을 확인하기는커녕 얼굴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보다보면 드는 게 정이고 피어나는 게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마음속에 내가 없다는 걸 먼저 알고도 그게 가능 할까요?”
“이 무슨 바보 같은… 알겠소. 오늘 왜 종일 힘이 없었는지 이제야 알겠구려. 내가 줄리엣과 얘기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겠소?”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이것은 운명의 장난이고 줄리엣의 선택이니 누군가 옆에서 강제한다 하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요. 일을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지금, 오히려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바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저인 것 같습니다. 그 선택지에 제가 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입니다…”
“그래, 뭐… 백작이 정신을 차리는 게 먼저라는 점에는 동의하오.”
영감은 떨떠름하게 이야기하고 줄리엣을 만나보겠다며 사랑채를 떠났다.
또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겨서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문득 하인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 사람을 불러 세웠다.
“거기 무슨 일이오?”
그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개 같은 몬태규 놈들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티볼트님이 돌아가셨어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이 두 가문의 본색인 모양이다. 죽고 죽이고 다치고… 어젯밤 이곳에 깃들었던 짧은 평화가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 영주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왜 그리 기뻐했는지 새삼 실감나게 알 것 같았다. 저택 정문서부터 웅성대며 모인 캐퓰릿의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몬태규 가를 향해 달려갈 듯 불같은 살기를 내뿜어댔다. 이래서야, 금방 사람이 죽었다는데 결혼 이야기를 진지하게 꺼내기도 애매한 일이었다. 어쩐지 머쓱해진 나는 한 사람을 더 붙잡고 물었다.
“그래서, 그 칼을 휘둘렀다는 망나니가 누구고, 지금은 어디 있는지 혹시 아시오?”
그는 길거리에서 직접 티볼트의 죽음을 목격하고 돌아온 사람인 것 같았다. 시뻘건 눈으로 쉴 새 없이 자신이 목격한 바를 떠들고 있던 그는 내 얼굴을 확인하자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백작님! 이를 어쩝니까? 사촌 오빠를 저 개자식들의 손에 잃었으니, 아가씨의 상심이 보통이 아닐 겁니다. 백작님이라도 가서 위로를 해 주셔야…”
나는 좀 더 귀를 기울여 보기로 했다.
“그래서 범인이 누군지 묻고 있지 않소. 어서 말해보시오.”
“그 썩을 놈을 잡아오시게요? 이름은 로미오라고 합니다. 몬태규 가문의 장자 되는 녀석이지요! 이미 영주님이 체포령을 내리셨고 베로나 밖으로 도망간 상태입니다. 근방 백리로는 들어오는 즉시 사살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운명의 장난질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경우엔 말이 좀 달라질 것도 같다.
유모는 줄리엣의 방문 앞을 완강히 막아서곤 움직이지 않았다. 아가씨가 너무 울어서 제정신이 아니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나로선 줄리엣과 유모 사이에 뭔가 더 구체적인 약속이 있었던 것만 같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캐퓰릿 공을 직접 부르겠다는 협박이 몇 차례 이어지고 나서야 유모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나는 최대한 정중히, 줄리엣의 방문을 두들겼다. 약간의 휴지 뒤에, 울음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
“돌아가세요.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줄리엣. 파리스 백작이오. 지금 많이 힘들 걸로 알지만 꼭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소.”
“무례하시네요. 나중에 이야기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나는 곁에 서 있는 유모에게 눈짓을 해서 몇 걸음 물러나게 한 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내일 떠날 생각이오. 그리고 줄리엣, 당신이 원한다면 이 결혼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이야기 해 보고 싶은데. 계속 이렇게 바깥에만 세워두는 건 누구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구려.”
나는 잠자코 줄리엣의 선택을 기다렸다. 줄리엣이 내 짧은 말에서 어떤 그림을 연상했는지,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줄리엣의 방문은 예고도 기척도 내지 않고 열렸다. 나는 조용히 방 안에 들어갔다.
줄리엣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가 울다 지쳐서 사람을 볼 수 없다는 말은 진짜인 것 같았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온통 하얀 천을 두른 채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는, 흡사 슬픔의 여신 같은 풍모로 넋이 나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침울하게 말했다.
“때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그럴수록 요란한 일은 어서 처리해야 하지 않겠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캐퓰릿의 사람이, 제 오라버니가 죽었습니다만, 이런 일이 백작님의 구혼을 좌절시킬 만큼 중대한 사안은 아니에요. 생각해 보면 흔하고도 익숙한 일일 뿐이죠.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신다면 아무 차질 없이 진행될 겁니다. 아버님의 뜻이 그러하고, 백작님의 뜻도 그러하시니…”
“내가 궁금한 것은 줄리엣, 그대의 뜻이오. 나와 결혼할 마음이 있소?”
“그에 대해선 지난밤에 충분히 말씀 드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로미오를 아직 사랑하시오? 그가 그대의 오라버니를 죽였는데도?”
“그걸 직접 보셨나요? 로미오의 칼이 티볼트의 몸을 꿰뚫는 걸 두 눈으로 보셨습니까?”
줄리엣의 눈에 전에 없던 힘이 피어올랐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범인은 로미오가 아니란 거요?”
“로미오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고, 오해는 시간이 가면 풀리기 마련입니다.”
“지금 로미오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고 있지, 그렇지 않소?”
줄리엣은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제 천박한 사랑을 조롱하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단지 자신을 끝없이 비참하게 만들고 싶으신 건가요? 다른 말씀을 하실 생각이 아니라면, 그만 나가 주세요. 제 곁에는 백작님이 없어도 충분히 골치 아픈 일이 많습니다.”
줄리엣은 그 말만을 남기고 침대에 등을 돌려 누워버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하오, 줄리엣.”
방안이 고요했다.
“첫 번째 제안은 이렇소. 당신이 로미오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준다면, 나는 그가 누명을 썼다는 걸 믿고, 최선을 다해 그를 보호해 주겠소. 비록 당장 베로나로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이탈리아 어딘가에서는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책임지고 마련해 주겠다는 뜻이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에, 운이 좋다면 어쩌면 베로나로 돌아와서 살 수도 있겠지. 다만, 이 모든 경우에 당신은 정해진 대로 나와 결혼해야 하고, 다시 로미오를 만나는 건 용납할 수 없소. 그리고 다만 그를 마음속에 두는 것도 용납할 수 없소. 내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은 다만 혼자서 마음속에 칼을 갈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잔인한 대가라도 치루겠다는 뜻이오. 무슨 뜻인지 알겠소?”
줄리엣은 분명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그녀의 뒷모습을 눈여겨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당신이 끝까지 나를 받아들이지 않고 로미오, 혹은 그의 약속만을 믿은 채, 지금처럼 홀로 방안에서 나에게 마음을 닫고 있는 경우요. 나는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소. 당신 아버님, 혹은 그 누구와의 약속도 모두 없던 일로 한 채, 그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당신을 떠나겠소. 다만!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건데 로미오는 살아남지 못할 거요. 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그 자에게, 무고한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소. 이탈리아는 아주 넓으니 내 눈을 피해 도망갈 수 있으리란 기대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소. 그 자는 나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었으니…”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렇게 당신의 선택만이 남았소.”
먼 곳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티볼트의 사체가 저택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나는 텅 빈 방에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음울하게 번져가는 것을 무심하게 느끼고만 있었다. 줄리엣은 몸을 일으켜 나를 등지고 창을 향해 앉았다. 바람에 휘청일 듯 가냘픈 몸을 감싼 하얀 옷가지가 호숫가의 갈대처럼 축 늘어졌다. 그녀는 길게 한숨지었다.
“백작님. 당신은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라 하시는군요.”
“당신이 내게 준 선택도 그러했소. 포기하고 떠나가거나, 사랑하지 않는 자와 함께하거나.”
“이렇게 하셔서 당신에게 득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제게 이리도 가혹하게 구시나요?”
“그렇게나 무의미한 말도 드물겠군. 내가 잔인하오? 내가 당신에게 할 말도 같소. 자, 어쩔 거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오?”
줄리엣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먼발치서 들려오는 곡소리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그녀는, 소리가 회랑을 돌아 안채 가까이 다가오자 결심한 듯 울음과 침을 함께 삼켰다.
“알겠습니다. 로미오를 살려주세요.”
나는 나도 모르게 허파에 몰린 숨을 한 번에 내쉬었다.
“저희는 애초에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여린 탓에, 알면서도 입밖에 내어 말하기가 두려웠을 뿐이지요. 하지만 저는 아직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저를 향한 당신의 믿음이 이리도 약하고, 로미오를 향한 당신의 증오가 그리도 큰데, 함부로 그 행방을 알려드릴 수야 없지요. 아버님과 말씀하셔서 혼인날을 잡도록 하세요. 일을 치르고 난 뒤에 행방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미오도 자초지종을 알고 나면 모든 일을 기쁘게 수긍할 것입니다.”
“당신이 상식적인 사람이어서 기쁘오.”
나는 줄리엣의 등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캐퓰릿 영감은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지만, 목전에 닥친 일부터 정리해야 한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었다. 우리의 결혼식은 다가올 목요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며칠 사이 조금은 밝아진 마음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었다. 줄리엣은 나에게 감사할 것이다. 적어도 로미오가 살 수 있는 길은 열어줬으니까. 나 역시 그녀가 한 번에 마음을 바꾸기를 원하는 건 아니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란 종잡을 수 없는 것이고, 가깝고 편안한 것과 멀고 어려운 것을 구분하여 하루 날이 샐 동안 큰 원한과 큰 사랑을 쌓기도 하는 것이니, 언젠가 그녀도 나에게 마음을 열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나는 내가 가진 것으로 그녀의 마음을 살 수 있으리라. 가혹하고 변덕스러운 운명의 장난 같은 것에 기대지 않은, 오롯이 내 선택으로 열리는 마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사랑의 열매. 나는 아름다운 상상과 함께 이윽고 화창한 목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줄리엣은 그녀의 방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그녀와의 약속을 발설한 적이 없다. 때문에 모두들 줄리엣의 자살은 티볼트의 죽음이 원인일 거라고 말했다. 사촌오빠의 죽음이 연약한 소녀의 마음에 이겨낼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 비록 캐퓰릿 가의 어느 누구도 ‘견디기 힘든 슬픔을 이겨내는 동시에 혼인을 준비해야 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 모두가 이 말을 목구멍 속으로 삼켜 커다란 울분으로 남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하나 더 가지고 있던 나는 몹시 우울했다. 더는 캐퓰릿 가에도, 이 도시에도 머물 면목이 없었다.
나는 곧장 캐퓰릿 영감에게 가서 영지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며칠 새 닥친 커다란 비극들에 짓눌려 넋이 완전히 나가버린 표정을 짓고 있던 영감은 내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소. 미안하게 됐소. 저 못된 몬태규 놈들 때문에…”
하지만 이것은 운명의 장난 같은 게 아니었다. 줄리엣은 나의 구혼에 대해 직설적이고 확실하게 대답한 것이다. ‘나는 죽어도 당신과는 결혼하지 않겠다.’ 누구나 살다보면, 이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로 죽어버리는 방법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는 아마 쉽사리 겪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슬프기보다 매우 어이가 없었으며, 믿을 수가 없었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마음이 완전히 내 선택권 밖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 선택이 아닌 것을 그런 이름으로 부르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무책임하고 모호한 단어로 있었던 일을 호도할 생각 따위는 없다. 이 죽음은 명백히 ‘줄리엣의 선택’ 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을 강제하려 했던 내 욕심을 향해 보내는 준엄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나는 몹시 우울했다. 내가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말했던 아버님의 표정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혹시 아버님은 줄리엣이 나를 이토록 격렬하게 거부하리란 걸 미리 알고 계셨던 걸까?
나는 줄리엣의 장례가 끝나는 대로 도시를 뜨기로 했다. 이렇다 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이대로 도망칠 순 없었다. 죄수처럼 사랑채에 갇혀 멍하니 창밖만 지켜보고 있노라니, 지난 며칠간 겪었던 일들이 그림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조리 꿈같은 일들이었다. 다시 영지로 돌아가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지, 도통 자신이 없었다. 내가 만난 건, 내 마음이 어떤 계산도 섞이지 않은 진심일지언정 자신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열 수는 없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어둠 속에서 별빛보다 환히 빛났고, 무르익은 봄날보다 찬란했던 그녀는, 죽음을 통해 죽어도 내가 싫다고 이야기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랑과 증오의 문제를 떠나서 이렇게까지 잔인한 짓은 사람이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난, 줄리엣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내가 미워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장례식을 기다리는 동안, 시종 몇을 영지로 급파해 베로나 인근에서 로미오를 찾아볼 것을 지시했다. 줄리엣의 죽음은 이미 몬태규가에 알려졌고, 어떻게든 로미오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로미오라면, 아마도 줄리엣의 죽음을 전해 듣는 순간 무슨 수를 써서든 베로나로 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사랑했던 이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서. 이것은 그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를 살펴보는 척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말해 그가 줄리엣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읽을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하다.
로미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용서할 것이다. 아마 로미오도 어딘가에서 다른 짝을 만나 편안한 여생을 살아가겠지. 하지만 로미오가 돌아온다면, 그런 방법으로 끝끝내 자신이 내 사랑과 좌절의 마지막 걸림돌이었음을 시인한다면 – 나도 거기에 응분의 응답을 해 줘야 할 것이다. 자신의 부주의한 칼놀림이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어떤 상처를 남길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얼마나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나는 정성스레 갈아놓은 칼을 차고 베로나의 성당을 찾아갔다. 신부는 내 얼굴을 알아봤는지 어쩐지 허둥지둥 대는 느낌이었다. 나는 고해소로 들어가 딱딱하게 말했다.
“신부님, 사람을 죽일 계획입니다.”
신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몬태규의 로미오란 녀석입니다. 신부님은 모르시겠지만, 이 녀석은 줄리엣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저와 줄리엣의 혼인이 정해진 이후에도 줄리엣의 마음은 줄곧 로미오에게 가 있었습니다. 놀라셨지요? 세상사람 모두가 모르더라도 저는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줄리엣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요.”
고해소 뒤편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모른다 하더라도 나는… 주님은 알고 계신다오. 백작… 부디 허튼 일은 하지 마시오.”
“나는 본래 성당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운명이니 주님이니 하는 말들도 좋아하질 않아요. 선택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장난도 사람이 치는 것이며 단죄도 사람이 하는 것이지요. 허니 오늘 여기 온 것도 다만 내 마음을 편히 하고 다짐을 보다 굳게 하기 위해서란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내가 뭐라 하든 로미오를 죽일 거란 뜻이군.”
“예. 다만 그 녀석이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거나 내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굳이 찾아내서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멀리멀리 도망가서 내 눈에 띄지 않을수록 줄리엣을 향한 녀석의 사랑이 얼마나 값싼 것이었는지 증명되는 거니까요. 하지만 오늘 밤에 있을 장례식에 녀석이 그 뻔뻔한 얼굴을 들이민다면… 그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열이 올라서 잠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부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내가 할 일이 없군. 백작, 죄는 사람이 짓되 용서는 주님이 하시는 것이오. 당신이 더 이상 죄짓지 않기를 기도하겠소.”
“그거 좋은 말이군요. 로미오가 나타나지 않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럼 주님께선 내 좁은 마음도 용서하고 로미오도 용서하시는 거라고 생각하지요.”
“그러지. 주님께서 굽어살피사, 로미오는 나타나지 않을 거요.”
좀 이상하지만, 신부의 단언이 어쩐지 단순한 믿음처럼은 들리질 않았다. 나는 고해소 안에서 잠시 팔짱을 끼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진심으로 로미오가 나타나지 않길 바랐다. 더 많은 피를 뿌리기엔 이 도시는 너무 좁다.
저녁이 되자 비가 내렸다. 장례는 조용히 진행됐다. 캐퓰릿 일족 수십 명이 줄리엣의 관을 앞세워 공동묘지로 행진하는 동안 적지 않은 마을 주민들이 길가에 서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자살한 자의 장례인지라 신부도 참석할 수 없었는데, 애도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캐퓰릿 영감은 비통한 표정으로 이따금씩 내 부축을 받아가며 행렬 제일 뒤쪽에서 줄리엣을 따랐다.
땅을 파고, 하관이 끝나가도록 로미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로미오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던 신부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다. 줄리엣이 죽기 전에 신부를 자주 찾아갔다 하니, 어쩌면 신부는 줄리엣, 혹은 로미오의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른편 허리춤에 매달린 칼을 꼭 쥔 손에 힘이 풀려갔다. 어쩐지 허탈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 하룻밤 불장난에 불과한 마음이었나? 이렇게나 가볍고 부질없는 마음을 위해서 당신은 목숨을 던진 거란 말인가?
해질 무렵 시작된 장례가 끝나자, 사방은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만 돌아가자고 이야기하는 영감에게 나는 잠시만 이곳에 남겠다고 이야기했다. 로미오가 어딘가에서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알고 있는 줄리엣과 그런 그녀가 목숨을 던져가며 사랑했던 로미오라면,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다. 모두가 돌아가고, 나는 비에 젖은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어둠이 깔린 묘지 위로 스산한 침묵이 밀려왔다.
그리고 멀리서 희미한 등불 빛이 나타났다.
나는 숨을 죽였다. 등불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줄리엣의 무덤 가까이 다가왔다. 이윽고 무덤가에 정지한 등불에 비친 사람의 실루엣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그는 삽을 들고 있었다. 무덤 앞에서 한참을 뭐라고 중얼거린 뒤, 그는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놈이 벌이는 짓을 지켜봤다. 흐느끼듯 흩날리는 빗방울 속에서 한참동안 혼자서 땅을 파던 그는 이윽고 땅 위로 관을 끌어냈다. 진흙 진창에 뒹굴어 엉망이 되어버린 녀석은 관을 뚜껑을 열어젖히더니 줄리엣의 얼굴을 확인했다. 나는 입을 막았고, 녀석은 순간 짐승처럼 오열했다. “줄리엣-!”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칼을 꺼내 들고 녀석에게 달려갔다.
“이 배워먹지 못한 살인자 녀석, 지금 뭐하는 거냐!”
빗속에서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린 녀석은 로미오가 맞았다. 광기에 젖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로미오는 몸을 일으키더니 칼을 뽑아들고 내 앞에 똑바로 섰다. 이 생각지도 못한 뻔뻔함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 나와 싸우겠다는 거냐? 뻔뻔하게 줄리엣을 버린 것으로 모자라 마지막 안식도 방해하는 놈이?”
로미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당신에게도 우리를 막아서야 할 이유가 있겠지. 모든 것은 운명의 장난일 뿐이니- 나는 다만 아름다움을 사랑했을 뿐, 나를 탓하지는 마시오!”
그리고 매서운 칼날이 날아왔다. 피할 사이도 없이, 가슴팍에 아찔한 고통이 전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나는 진창 속에 무릎을 꿇은 채 풀린 눈으로 로미오를 올려보았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로미오의 얼굴에 아마도 내 것임에 틀림없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가슴을 막아보려 했다. 차가운 빗방울과 뜨거운 핏줄기가 손끝으로 튀어들고, 덜덜 떨리는 손아귀에는 날카로운 금속이 만져졌다. 가슴을 관통한 모양이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내가 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내가 녀석을 죽일 수 있다면 녀석도 나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녀석의 칼이 내 가슴을 꿰뚫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허탈한 기분이었다. 또 착각한 것이다. 나에게 모든 선택권이 주어져 있으리란, 순진하고도 순진한 착각.
내 얼굴을 살피더니 로미오의 낯빛이 변했다.
“당신은…?”
아버님이 옳게 생각하신 거다. 나는 얼마나 겸손하지 못했나. 왜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일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건가. 모든 것을 알게 되니 이젠 때가 너무나 늦고 말았다. 줄리엣이 살아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려면 애초에 내가 이곳에 와선 안 되는 것이었겠지. 아냐, 사실 내가 없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당신들의 사랑은 쉽게 이뤄질 순 없었겠지. 나는 베로나에서 지낸 며칠 동안 내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입가에서 웃음이 번지는 것 같았다. 나는 도대체 뭘 위해서 고민했던 걸까? 내 마음이며, 선택이며, 준비며…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는데.
로미오에게 뭔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 울혈이 밀려나왔다. 나는 피를 토하며 무너졌다. 당황한 로미오가 뭐라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마지막으로, 줄리엣을 보고 싶었다.
(2011. 8. 9)
* 뒤로 갈수록 노동이 되어버린 소설..; 수정도 나중에 해야지.; 힘들어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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