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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방금 들은 어떤 대화

(그러니까 오후 6시 즈음 방영되는 화제집중 어쩌구 따위의 프로그램에서)

여 진행자 : 오늘은 시청자 여러분께 훈훈한 이야기를 전해드려야겠네요.
                올해 구세군 냄비 모금액이 목표치를 훌쩍 넘어서 35억원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남 진행자 : 와. 정말 대단한데요? 우리 모두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시다.
                특히 올 겨울은 경제위기로 모두의 주머니가 가볍지 않습니까?
                작년의 경우에는 경제상황이 호황이었는데도 목표치가 31억원이었는데요,
                우리 시민들은 올해 이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모아주신거죠.
                어려울 때 일수록 우리끼리 돕고 사는 서민들의 모습을 (...후략)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작년 이맘때는 "죽어가는 경제를 부흥시키겠다" 는 단 하나의 이야기만을
별다른 설득력 없이 되풀이 한 어떤 분이 대통령이 되어서 많은 사람의 가슴을 쓰라리게 했을텐데.

오늘날 이 나라에서 대다수의 국민들이 느끼는 "국가경제상황" 이란 것은 (그 단어 자체가 담고 있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거시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실상 거시경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오늘 내일 '내' 주머니에 쓸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많으며 써야할 돈은 얼마나 적은가에 달려있을 뿐. 아쉬우나마 그 잣대를 서민경제라 이름짓는다 치자. 그럼 상식적으로 이름이 다른 것 사이에서 혼동하는 짓은 쫌 자제하는 편이 좋지 아니한가? 당신이 가난하다고 해서 국가경제가 망해가는 건 아니잖아. 상식적으로, 주머니에 돈이 없는 이유는 둘 중 하나다. 받는 돈이 적거나, 쓰는 돈이 많거나. 그럼 당신의 월급이 올라가지 않는 이유 및 당신의 펀드가 폭락하는 이유와 당신 자녀의 학원비 혹은 등록금이 치솟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하는 편이 엄한 친북좌파빨갱이들의 남한붕괴전략을 분석하는 것보다야 훨씬 더 영양가있는 것 아닌가?

물론 어떤 분들은 이 문제를 훨씬 더 간단명료하게 해명할 수 있다. 대책없고 눈치없고 시대착오적인 간단명료함이 그분들의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니까. 당신의 월급이 적은 건 당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어느 날, 당신이 당신 자녀의 교육비 혹은 교통비 혹은 의료비 혹은 공공요금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수입이 부족하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좀 더 밤잠을 줄이고 열정을 기울여 좀 더 많은 부분에서 남들보다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간단한 말로는 "경쟁력을 상실했다" 고 할 수도 있겠다. 조금 야속하겠지만 더욱 더 간단명료하게 정리하자면 말이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나는 내 기억이 허락하는 한, 그 어느 시대의 대한민국 뉴스에서도 동시대의 경제상황이나 취업시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어떤 종류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몇몇 이들의 증언에 따르자면 뭐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황금기처럼 평가되곤 하는 6~70년대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도 경제는 늘 어려웠고 취업문은 늘 바늘구멍이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에 호황이 단 한번도 없었느냐, 하면 또 그런 건 아니겠지. 한강에는 기적이 있었으니까. 여기에는 분명 미묘한 종류의 속임수가 숨겨져 있다. 누군가는 "만족을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들" 탓으로 던져버릴 수 있고 누군가는 조금 다른 문제로 넘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난 어느 쪽 편을 들 만큼 입장이 뚜렷하지도 못하고 게다가 자세한 것도 잘 모르겠지만, 단 한가지만 단언하자면 말이다. 앞으로도 이따위로 나간다면 국가경제가 제아무리 나아지더라도 영-원-히 "호황" 뉴스는 들을 일이 없을 게다.

물론 당신의 주머니가 묵직해질 가능성은 더더욱 없을테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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