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 보면 나는 대략 군생활이 마무리된 2011년 무렵부터 왜 인생이 계속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어서 꾸준히 당황하는 중이다. 게임으로 치면 플레이할 메인 퀘스트 서브 퀘스트 다 끝나고 이제 엔딩이 나와야 하는 시점이라 그렇다. 이제는 그동안 쌓인 원한과 미련을 쿨하게 마무리하고 엔딩 크레딧과 엔딩 주제가를 올리며 모두에게 훈훈하게 스페셜 땡스 투를 날려야 할 때인데, 인생은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계속되고 이따금 꿈속의 꿈에서도 상상한 적 없는 비극과 희극이 난해한 경로에서 들이닥쳐 정신을 멍하게 한다. 이를테면 이번 추석이 그랬고...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어렵고 힘든 일에서 도피해 평온한 마음을 찾아가는 데에는 도가 튼 사람이다. 존재감이 있는 듯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없고, 결정적인 사건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서는 늘 반 발짝쯤 물러서 있었다. 그게 도피라는 걸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고 실은 하늘도 땅도 모르게 해치운다는 점에서 조금은 얄미운 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이런 태도로 살았던 과거를 돌이키면 결국 별 이벤트가 없이 살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별 수가 없다.
이 두 가지 태도가 겹쳐지면 어떻게 되는가, 여생은 죄다 보너스 타임 같고, 근데 그 보너스 타임에서 행여라도 접하게 되는 힘든 일은 미연에 피해가려고 한다. 그래서 나란 사람 참 별일없이 산다. 사랑하는 사람도 존경하는 사람도, 엄청나게 미워하는 사람도 때려주고 싶은 사람도 없고 딱히 집착하는 일도 없다. 뭐 취미생활에 그렇게 시간을 쏟아붓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인생 워낙 심심하니까 취미에 시간을 쏟아붓는 거지 뭐. 그나마 취미생활에서도 뭔가 골치아프고 힘든 일이 생길 것 같은 순간이 되면 발을 빼는 게 나란 사람이 세상을 사는 법이라는 거다. 요사이 내 삶은 정말 평온 그 자체다. 나 스스로 이 삶에 너무 만족하고 있어서 정말 평생 이러고 살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가끔 드는데... 인생은 너무 길고 세상은 꾸준히 나빠지기만 한다. 아 정말, 나쁘다 다들. 주가도 계속 떨어지고.
어쨌거나 나이가 나이니만큼 가끔은 미래에 대해 진지한 생각도 하고 내가 떠내려가고 있는 인생길과 나의 태도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다가 명절이 지나고 계절이 스산하게 바뀌는 요즘 같은 때가 되면 뭔가 하나씩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뭐, 댄스를 처음 배우러 간 것도 추석 직후였고 동호회를 찾아가는 건 보통 설날 이후였고... 그러고보면 마법의 가을 같은 게 괜히 나온 말은 아니다. 가을은 뭔가를 시작하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