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심심할땐

(109)
소통불가 지나간 지산밸리락페스티벌, 그 마지막 밤의 어느 언저리에서, 나는 언어중추의 절반쯤을 알콜의 통제에 맞긴 채 브로콜리너마저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다. 다시 브로콜리를 듣다가 그 이야기를 문득 다시 떠올린다. 이 밴드가 쓰는 가사에는 소통불가의 상황을 관조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는 제목부터가 그러하다. 어느 순간 소통을 멈춘 마음들이, 제아무리 용을 쓴다고 해봐야 나아질 게 있을 리 없다는 담담함. 아무리 사랑한다 말했어도 /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때 그 맘이 / 부른다고 다시 오나요 하지만 꼭 거기서 그쳐버린다면 아마 이 가사의 매력은 반감됐을게다. 그 뒤를 관통하는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이 백미다. 아무래도 니가 없인 안되겠어 / 이런 말 하는 자신이 비참한가요 / 그럼 나는 어땠을까요..
소원을 말해봐, 밴드 ver. 그래도 원곡이 더 낫다!
강철의 연금술사 Remake 오프닝 :: Again 이노래... 어쩐지 마무리가 이상한 느낌이라 원작 OST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꾸 듣다보니 정이 간다. 영상 자체도 퍽이나 맘에 들고!
드래그 미 투 헬 및 벼르고 벼르던 을 봤다. 영화계에 트랜스포머의 융단폭격이 시작된 이판국에 청주cgv에 다행히도 딱 한 타임이 살아있었더랬다. (휴) 자랑은 아니지만 어지간한 영화도 힘들어하며 보는 편은 아닌데 이건 정말 완전 힘들었다. 끝난지 한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쿵쾅쿵쾅 정말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공포영화" 를 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샘 레이미. 역시 명불허전이로다. 허허허허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에는 그만 사악한 실소가... 미안해 크리스틴;; 하지만 나같았으면 스튜를 잡혀가게 하는 걸로 끝맺었을 텐데. 역시 메이저의 감성이란 어쩌다보니 트랜스포머도 보긴 봤다. 뭐 예상대로 멍청한 이야기... 이상하게 이 시리즈는 1편부터 영 정이 가질 않는다. 특수효과의 신기원인지 뭔지도 잘은 모르겠고. 게다가 여..
짧게, 마더. 사실 영화 중반부터 뭔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기대를 너무 했던 것 같다. "모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상황을 연출한다기에 정말로 사정없이 막나가는 물건이 나올 줄 알았던 건데, 뭐 이건 단순한 착각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그저 언론플레이에 희생된 것 뿐인가. 사실 모성 어쩌구하는 이야기보다 봉준호 감독은 그저 김혜자라는 거대한 배우와 한 번쯤 함께 작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걸 살짝 뒤집어 본다면 영화 내내 김혜자씨가 어찌나 고생했는지 눈에 훤하다는 말이 되기도 하려나? 기대를 봉준호의 전작들 정도로 접어두고 본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작품이다. 더구나 이야기가 거의 의도적으로 "엄마"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보니 관람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면서도 머릿속 정리가 상당히 깔끔하게 되는 편..
박쥐 (Thirst, 2009) 1. 를 봤다. 언제나처럼 참 말이 많을 수 밖에 없는 박찬욱 영화 2. 하기야 따지고 들자면, 거의 모든 창작자가 평생 몇 가지 안되는 화두만을 갉아서 이런저런 식으로 변주해 보기 마련이겠지만, 이 영화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건 조금 아쉬운 일이다. 굳이 "복수 3부작" 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어 가면서 죄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억지로라도 결론짓고자 했다면 이제는 조금 그 범주에서 벗어나 보는 게 괜찮지 않았을까. 하지만 영혼이야 3부작 쪽에 있더라도 육신은 에 조금 더 가까운 영화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부조화가 영화의 주된 재미를 이룬다.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식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하는 방식에 여유가 묻어난다는 건 적어도 감독이 몇 가지 강박에서는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짧게 이야기..
마더! 내일모레는 개봉일이라 룰루랄라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요 영화 예고편을 덜컥 보고 나니 그저 정신이 혼미해진다 개인적으로 는 뭐 그럭저럭, 일지라도 는 정말 물건일 것 같은 예감이... (사실 이 와중에 묻혀버리고 있는 가 안타깝지만서두;;)
비타협적 감상문 1. 어쨌든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짓기 마련이다. 무슨 아담과 이브 혹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주변의 누군가에게는 민폐가 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걸 "죄" 라고 이름하느냐, 혹은 "관계" 라고 이름하느냐, 조금 다르게는 "기쁨" 이라고 이름하느냐가 사람과 사람간의 아우라가 겹치며 만들어내는 중간계에 대한 가치부여가 될 뿐이다. 결국 만들어지는 것은 현상이고, 가치를 부여하고 구조를 잡는 것은 단어이다. 단어가 죄를 숨기기에 죄를 죄로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속죄 대신 예의를 차린다.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후배는 선배에게 존경을 표하며, 선배는 후배를 챙겨주고, 연인은 다른 연인에게 신뢰를 보낸다. 관계를 규정하는 어마어마한 무게의 단어들이 ..